그 공녀는 살고 싶다
80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는 말만으로는 예언자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나와 같은 존재라면, 그건 단순히 예언자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 또 다른 빙의자가 있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목이 갑갑해졌다.
“누굽니까, 그게.”
“…….”
“그 사람 어디 있습니까?”
사제는 답하지 않았다.
짧게 한숨을 쉰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속이 탔지만, 여기서 더 추궁해 봤자 의미가 없다.
어차피 잠시 뒤면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릴 사람이니까.
맨정신으로 신의 진언을 들으면 미쳐 버리니, 사제들은 뭔가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신의 말을 읊기 때문이다.
신전의 기둥을 걷어 차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사제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거나, 광인 취급을 받을 게 뻔했으므로 나는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 하나를 밟으며 내려갈 때마다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X됐다는 걸 느꼈다.
‘아니 진짜 미치겠네.’
이 세상에 나 말고 또 다른 빙의자가 있다.
그 사람은 뭘 바꿨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바꾸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내가 아는 이야기와 너무 많이 달라지면, 오히려 내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그래, 분명 처음엔 손을 안 대려고 했는데……. 돈 되는 것들이 자꾸 눈에 보이니 나도 모르게 손을 대 버렸다.
유망한 디자이너, 화가, 광산 위치 등, 여기저기 손대 놓은 게 너무 많아서, 지금은 빙의자가 뭔가를 바꿨어도 쉽게 눈치채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가능성은 대략 세 가지다.
그 사람은 이미 무언가를 바꿨는데, 그 변화가 너무 작아서 티가 나지 않는 거거나, 내가 만든 변화에 한 발을 걸치고 있어서 내가 쉬이 눈치채기 어렵거나.
조연도 아니고, 소설에 이름 하나 안 나오는 사람 몸에 빙의한 거면, 그 사람이 뭔가를 바꿨어도 내가 찾아내기 어렵다.
내가 만든 변화 속에 끼어 있다면 더더욱 찾기 어려울 테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거나.
하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을 리 없다.
‘눈앞에 로또 번호가 있는데 가만히 있겠냐.’
어디 주식이 떡상하는지 다 알 텐데, 안 사고는 못 배기지.
돈이 없다면 돈을 꿔서라도 샀을 거다.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데 어떻게든 건드려 보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그 사람도 소설을 읽었으면 내가 엘렌시아 몸에 빙의했다는 걸 알았을 텐데.’
엘렌시아의 행동이 이상할 정도로 많이 바뀌었으니까.
그 사람은 칼바도스의 편에 붙은 내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도 예측하고 있을 거다.
전개상 우리 쪽 다음 행동은 후작가를 쳐 내는 건데……. 설마 주인공조한테 붙는 게 아니라 역으로 후작저에 정보 팔고 망명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오…….”
그 인간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눈에 띄는 움직임을 찾지 못하니 생각이 나쁜 쪽으로 흘렀다.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가던 나는 발을 헛디뎠고, 식겁한 리온이 나를 붙잡았다.
“표정이 왜 그래요? 사제가 무슨 개소리라도 했습니까?”
사제가 한 말이 개소리가 아니라서 문제였다.
어라……?
다시 생각해 보니까 사제가 한 말은 아니네?
사제는 신의 목소리를 전해 준 것뿐이다. 그럼 빙의와 관련된 이 정보의 출처는 태양신이라는 뜻이다.
태양신은 나의 빙의를 알고 있고, 나에게 다른 빙의자의 존재를 알렸다.
‘나를 도와준 건가?’
하지만 신이 굳이 나를 도와줄 이유가 없지 않나.
이유를 추측하던 중, 나를 붙잡고 있는 리온의 손등에서 시선이 멎었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리온의 얼굴을 바라봤다.
‘설마 그때 리온이 가방을 가져갈 수 있게 도와줘서 그런 건가.’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리온을 숲으로 이끌었으니, 내비게이션 노릇을 해 준 값을 준 건지도 모른다.
흠, 빙의자라…….
혹시 그 인간이 제국이 아닌 다른 곳에 있나?
주인공조 중 칼바도스와 레이델이 있는 제국에는 내가 있으니, 다른 빙의자는 셀레네가 있는 시몬 왕국 쪽에 있을지도 모른다.
‘왕국 쪽이라면 내가 모를 수도 있지.’
올해 초, 뚝 떨어진 셀레네의 입학 성적을 보고 빙의자가 있다고 의심했는데, 그게 현실이 될 줄이야.
시몬에 가 있는 메이와 다른 정보원이 돌아오면 왕국 돌아가는 꼴이나 좀 물어봐야겠다. 내가 알고 있는 왕국 정보와 비교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갑갑했던 목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
빙의자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일이 터졌다.
시몬에 보내 둔 메이와 다른 정보원 하나가 누군가에게 붙잡혀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오늘 새벽, 마탑에서 제작한 마도구로 연락이 왔는데, 로펨이라는 남자에게 붙잡혔다는 연락을 끝으로 메이는 마도구를 부숴 버렸다.
‘로펨?’
로펨이라는 남자가 제 이름 뒤에 비르본이라는 성을 가지고 있다면,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조금 아는 사람이었다.
로펨 비르본은 리오스 왕자의 최측근이니까.
일단, 정황상 마도구를 파괴한 건 로펨이 아닌 메이다.
나에 대한 정보가 유출되지 않게 할 생각인가 본데…… 이대로라면 메이가 자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우리 쪽 정보원 둘이 리오스에게 붙잡혔고, 연락이 끊어졌다.
그럼 나는 이쪽에 와 있는 리오스의 정보원과 접촉하는 수밖에.
현재 이곳에서 내가 아는 리오스의 사람은 한 명뿐이다.
‘율리안 트로이센.’
요즘 리오스 왕자 몰래 셀레네랑 알콩달콩 연애하던데, 이놈을 통해서 연락 좀 취해 볼까.
바로 율리안을 찾아가려던 나는 걸음을 멈췄다.
리오스처럼 독한 놈이 내 정보원 둘을 그냥 넘겨줄 리 없다.
‘나중에 이 건으로 문제 삼으면 골치 아파지는데.’
그러고 보니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기억나는 소설 속 사건들을 적어 놓은 수첩이 있었지.
그때 시몬 쪽 정보도 몇 개 정도 써 놨던 기억이 났다.
거래용으로 써먹을 정보를 찾기 위해, 나는 방 안 서랍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내 들었다.
*
수첩을 뒤적거린 후, 꽤 괜찮은 자료를 건진 나는 율리안이 있는 별관으로 달려갔다.
“트로이센 공자.”
“예?”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가라앉힌 뒤, 바로 본론을 꺼냈다.
“요즘도 리오스 왕자님이랑 연락하죠?”
“무슨…….”
“그럼 리오스 왕자님한테 연락 좀 넣읍시다. 왕자님한텐 당신이 공주님이랑 사귀는 거 비밀로 해 줄게요. 그리고 공주님한텐, 당신이 왕자님과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을게요.”
“아니, 그, 하…….”
“빨리 종이 꺼내요. 시간 없어.”
그렇게 나는 율리안을 통해 리오스 왕자에게 다이렉트로 연락을 넣을 수 있었다.
일단 정보원 둘의 생존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칼린 2왕자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고 했더니, 리오스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
나는 리오스에게 딱 두 가지를 요청했다.
내가 보낸 정보원 둘을 무사히 돌려보낼 것.
이번 일은 우리끼리 조용히 합의 봤으니 나중에 언급하거나 문제 삼지 말 것.
이렇게 딱 두 가지였다.
일단 맛보기로 칼린이 제국과 왕국에서 허가되지 않은 약물을 들일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자료를 보내니,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리오스에게서 답장이 왔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길래, 제국민 복지에 신경 쓰다 보니 약물 관련 정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답장을 썼다.
리오스는 내 마음이 아름답다며 칭찬해 줬지만, 누가 봐도 그냥 하는 말이었다.
어차피 둘 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자.
그런데 이건 에피타이저고 메인디쉬는 따로 있다고 편지를 보내니 리오스가 아주 좋아하더라. 글자 사이사이로 설렘이 느껴졌다.
아, 메인디쉬로는 칼린과 왕비의 목을 날릴 자료를 줄 생각이다.
제국에서 후작가를 썰어 내면 칼린과 왕비도 함께 썰려 나갈 테니, 그때 보여 주기식으로 협조를 요청하면 되겠지.
리오스가 발로 박수 치며 반길 소식이었다.
그렇게 나는 우리 쪽 사람 둘을 돌려받는 대신 리오스에게 에피타이저와 메인디쉬를 대접하기로 했다.
더 이상 오갈 대화가 없어지고 편지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쯤, 갑자기 리오스에게서 이상한 편지가 왔다.
[앞으로도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군.^^]
‘……뭐야?’
어울리지 않게 웃는 이모티콘도 그려서 보냈는데…… 그게 참, 호의로 보낸 거라면 미안하지만 조금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해서, 별관에 있던 율리안을 찾아가 편지를 보여 줬더니 율리안도 자기도 이런 답장은 처음 본다며 얼굴을 구겼다.
“이거 누가 대신 쓴 거 아닙니까?”
“아뇨, 이건 왕자님 필체가 맞는데…….”
주군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왕자의 필체가 아니라고 하는 게 나았을 거다.
흠, 이거 되게 안 친한 사람이 SNS 팔로우하자는 쪽지를 보낸 기분인데?
차라리 읽지 말걸 싶어지는 그런 쪽지 말이다.
‘리오스가 이런 성격이었나.’
천하의 독종이 이런 편지를 보내다니. 칼린을 엿 먹여서 기분 좋은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왕국 쪽 정보를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다고 판단해서 이런 답장을 했거나.
읽고 씹으려다가, 아직 정보원을 돌려받기 전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나중에 시간 나면 같이 밥 한번 먹어요~^0^]
라고, 대충 형식적인 답장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