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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79)화 (79/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79화

조금 전까진 예쁘게 반짝이던 파란 눈이 다 죽어 가는 것처럼 시들시들했다.

그보다 내가 저놈이랑 말을 놓기로 했다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적이 없었다.

오늘 내내 존대를 썼으면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술이라도 마셨나?’

빨리 물을 한 모금 넘긴 뒤, 나는 다시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겨 리온의 상태를 살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리온은 다시 편하게 몸을 눕혔고, 나는 잠들었을 때처럼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술 냄새는 안 나는데…….

그냥 잠에 취해서 헛소리를 나불거리는 것 같았다.

“나랑 반말하기로 했다고?”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눈을 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가씨 나랑 반말하기로 했잖아.”

“그런 적 없는데?”

잠시 멈칫한 리온이 눈을 깜빡였는데, 크게 당황한 것 같진 않았다.

대신 건조하게 한 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아, 착각했나.”

라고.

착각? 네가 나 말고 아는 아가씨가 어딨어, 망할 놈아.

게다가 말을 놨는지 안 놨는지 착각을 할 정도면…… 대체 아가씨 몇 명과 말을 튼 건지 감도 안 온다.

기사단 훈련 빠지고 숙소에서 쉬는 줄 알았는데. 가벼운 엉덩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싸돌아다녔나 보다.

이렇게 술술 불 때 털어야겠다 싶어서, 나는 최대한 나긋하게 물었다.

“우리 리온 경은 아는 아가씨가 몇 명이야.”

“음…… 세 명.”

셋?

내 생각보다 적었다. 누구랑 말을 놓았는지 헷갈릴 정도니, 스무 명은 넘을 줄 알았다.

셋이라. 일단 한 명은 나일 테고…… 남은 둘은 누구지. 공작저에 놀러 왔던 애들인가.

나도 모르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쳤고, 그걸 본 리온이 제 손으로 내 손을 감쌌다.

“나한텐 딱 셋뿐이야.”

그러고는 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어제의 당신, 오늘의 당신, 그리고 내일의 당신. 이렇게.”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접힌 손가락과 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물에 빠지면 입만 둥둥 뜰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쯤 되니 몸에 돌을 매단 다음 물에 제대로 한 번 빠뜨려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 자식 왜 이렇게 입을 잘 털어? 사실 정신 멀쩡한 거 아니야?

하지만 이게 연기일 리 없다. 이게 연기면 나는 당장 리온을 호위직에서 해임하고, 우리 극단에 배우로 눌러 앉혀야 했다.

그러니까 이건 정신이 몽롱해진 채 내뱉는 진심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이 김에 주인 없는 감나무 털듯 제대로 털어 봐야겠다.

“그 셋 중에서 누가 제일 좋아? 어제, 오늘, 내일 중에.”

참고로 나는 오늘의 내가 가장 좋았다.

어제의 나는 어제의 내가 열심히 사랑했을 테고, 내일의 나는 내일의 내가 사랑할 테니, 나는 오늘에 충실해야지.

장난 같은 질문에도 리온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꽤 오래 고민하던 그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매일매일 달라져서 모르겠는데.”

“사람이 지조가 없어.”

“그건 당신이 이해해 줘야지.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지조 없다는 내 말에 리온이 억울한 척하며 살짝 눈을 흘겼다.

계속 반말을 하는 게 신경 쓰였지만, 말의 내용이 좋아서 이번만 넘어가 주기로 했다. 나는 아주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이해해 줘야지. 매일매일 새롭게 반할 만하니까.”

좀 과장해서 말하면, 나도 아침에 거울 볼 때마다 놀라거든.

“그러니까 오래 살아. 그렇게 내가 매일매일 새롭게 반하는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으니까.”

“경이 그렇게 말 안 해도 오래 살 거야.”

“자살하지 말고.”

“……? 그런 거 안 해.”

미친 건가?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자살이라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는 말을 하려 했지만, 말을 마친 리온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

수도로 돌아가기 전, 기념품을 사러 이동하는 중이었다.

강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지 못하는 할머니를 본 리온이 할머니를 업고 강을 건넜다. 건너편에서 할머니는 리온의 이름을 물었는데, 리온은 ‘없어요.’라고 답했다.

우습게도 할머니는 그의 이름을 ‘없어.’라고 알아들었는데, 리온은 그냥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이름이 알려지는 게 싫다지만, 이미 내 호위로 얼굴과 이름을 다 팔아 놓고, 저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잠시 뒤, 다시 내 쪽으로 돌아오기 위해 강을 건너던 리온은,

풍덩―

하고 아주 시원하게 물에 빠져 버렸다.

물에 빠져 손바닥이 까지고 신발 한 짝을 잃어 먹은 주제에 그는,

“그래도 할머니를 모셔다 드린 뒤에 넘어져서 다행이에요, 그렇죠?”

라고 말하며 히죽거렸다.

물이 깊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물이 얕아서 물에 빠졌을 때 리온의 입이 둥둥 뜨는지는 확인해 볼 수 없었다.

대충 신발 하나를 산 뒤, 나와 리온은 근처에서 기념품을 주문하고 공작저로 돌아갔다.

“아가씨다!”

“아가씨, 오셨어요!”

모두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 가운데, 집무실에 있던 세오와 시즈만이 눈물을 흘렸다. 이대로 영영 안 돌아올까 봐 무서웠다고 한다.

짐을 풀고 목욕을 한 다음, 간식을 먹으면서 우편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카인이 지내는 곳이라 그런지, 마탑에서 온 편지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돈 달라고.’

마탑에 돈 좀 지원해 달라는 얘기였다.

얼마 전 비밀리에 연락 기구 좀 만들어 달라고 돈을 좀 줬는데, 자본 맛이 달콤했나 보다.

나는 돈을 주고 마도구를 얻고, 그쪽은 내 돈으로 하고 싶은 연구를 하니 나쁠 건 없었다.

마탑은 앞으로도 써먹을 곳이 많을 테니까 공작한테 허락 맡고 돈 좀 부어 놔야겠다.

게다가 카인 직장이잖아? 언젠가 카인이 마탑주가 될 텐데, 마탑이 짱짱하면 나도 좋고 카인도 좋지.

하지만 너무 대놓고 돈을 부으면 마탑을 견제하는 황실과 사이가 틀어질 위험이 있으니, 카인 쪽을 통해 몰래 지원해야겠다.

그다음으로 까 본 건 신전에서 온 서신이었다. 이 역시 내용은 간단했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축복받으러 오란 거다.

올해 성인이 된 사람 중, 별자리가 같은 사람끼리 묶어서 축복을 해 주는데, 이번이 게자리 차례란다.

*

며칠 뒤, 나는 게자리 동지인 레이델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리온은 당연히 따라왔고.

최근 칼바도스의 부름에 황태자궁을 수차례 들락날락해서 그런지, 레이델의 안색이 나빴다.

당분간 나도 같은 안색을 띠게 될 테니 동정할 처지가 못 됐다.

태양신 신전으로 향하는 길, 마차 안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레이몬드를 만날 방법’으로 정해졌다.

후작저에 심어 둔 사람에게도 소식이 없고, 레이몬드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데, 자연스럽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뭐가 있는가, 였다.

짧은 생각 끝에 꽤 괜찮은 방법이 떠오른 내가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후작가에 혼담이라도 넣어 볼까?”

대충 약혼한 다음, 일 끝나고 바로 파혼하면 되니까.

그러자 레이델은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아, 얘네 브라더 콤플렉스였지, 참.

처음엔 레이몬드가 나한테 파혼당하는 게 싫었나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형이 결혼하는 게 싫은 걸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올해 스물여덟 아닌가?

이상하다.

이 세계에서 스물여덟이면 이미 결혼을 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후작가에선 이상할 정도로 레이몬드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아껴서 싸고도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리고 레이몬드 얼굴 정도면 그동안 들어온 구혼장이 방 하나를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괜찮은 집이 있으면 바로 팔아넘기듯 혼인시켰을 텐데……. 아직 넘기지 않은 걸 보니 후작저에서 레이몬드가 맡은 일의 가치가 상당한 건가.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 것 같으니 곧 고발 관련 소식이 들려오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신전에 도착한 마차가 멈춰 섰고, 나는 레이델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나라에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올해 성인이 된 게자리 친구들이 참 많았다.

건물에 들어가기 전, 내가 축복을 받으러 온 또래 게자리들을 살피자, 뒤쪽에 선 리온이 말을 걸었다.

“아가씨.”

“왜.”

바로 등 뒤에서 몸을 낮춘 리온이 속삭이듯 물었다.

“우리 얼마 전에 입 맞추지 않았나요?”

“응. 그랬었네.”

그날 일을 단순 사고로 여겼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내가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런데 그게 입을 맞춘 건가? 그냥 부딪친 거지.

내가 그렇게 정정하기 전, 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입술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바로 다른 남자와 혼담 얘기를 하시면 제가 너무 섭섭합니다.”

“……미쳤지?”

“사실을 말하는 게 미친 거라면, 미친 게 맞겠지요?”

나는 리온의 발을 꾹 밟은 다음, 신관을 만나러 향했다.

올해 초, 먼저 축복을 받은 나의 친구 칼바도스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라며 해당 의식을 한 줄 요약한 바가 있다.

그리고 칼바도스의 말대로, 의식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말로 요약한 게 신기할 정도로 지루했다.

태양신 신관은 한 손으로 내 머리에 손을 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성수를 뿌렸는데, 음…… 축복이고 자시고 그냥 빨리 수건으로 닦고 싶었다.

축복 의식이 끝난 다음엔 신전의 지하로 향했다. 신전의 지하는 인간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때, 신에게 답을 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운이 좋으면 자신의 운명을 엿볼 수도 있고.

질문을 던지기 위해 자리를 잡으려고 할 때였다. 먼저 입을 연 건, 지하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제였다.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듯한 눈으로 나를 담은 그녀가 말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그대와 같은 존재가 하나 있다.”

“그게 무슨…….”

나와 같은 존재가 있다고?

모르는 사람한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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