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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78)화 (78/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78화

“잠도 안 오는데, 이거나 하면서 놀아요.”

리온의 손에는 카드에 그려진 과일이 다섯 개가 되면 종을 울리는 게임 상자와 종이 몇 장이 들려 있었다.

게임은 1층에 있는 직원한테 요청한 것 같고, 저 종이는…… 내가 공작저에서 가져온 종이 같았다.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챙겨 온 종이였는데, 조금 전 리온의 방에서 짐을 옮길 때 흘렸나 보다.

리온은 테이블 위에 카드를 올렸고,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게임 세팅을 도왔다.

뭐, 결과적으로 게임은 상대도 안 됐다.

리온의 반사 신경이 워낙 뛰어난 탓에, 내가 종을 누를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빨리 반응해도 이미 종을 누른 리온의 손등을 치는 게 다였다.

‘……뭐야, 이 자식. 이거 왜 이렇게 잘 해? 밥 안 먹고 이 게임만 한 거 아니야?’

기가 막혔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나의 처참한 패배였다.

뭣도 모르고 내기를 했으면 탈탈 털렸으려나.

쨍!

다시 한번 날카로운 종소리가 울렸다. 내 손이 움직이기도 전에 리온이 종을 누른 것이다.

질린다는 얼굴로 리온의 손등을 바라보자, 그가 자애롭게 물었다.

“0.75배속으로 해 드려요?”

“됐어!”

리온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 칼바도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놈도 어렸을 때 나한테 계속 졌다고 삐진 적이 있었지.

열을 식히기 위해 베개에 머리를 박자, 리온이 내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 오른쪽에 무게가 실린 걸 보니 리온이 침대 한쪽에 걸터앉은 모양이다.

‘답지 않게 조용하네.’

설마 내 눈치를 보는 건가?

윗사람인 칼바도스가 삐져서 곤란했던 기억을 떠올린 내가 고개를 돌려 리온을 바라봤다.

그러자 게임 상자와 함께 가져온 종이를 펄럭이던 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그가 태연하게 웃으며 손에 들린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빙고 할까요?”

“허…….”

그래, 이놈이 내 눈치를 볼 리가 없지.

뒤에서 도박장 운영하는 걸 들키고도 뻔뻔한 얼굴을 하고 낭만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변명한 놈이니까.

“별론가? 종이로는 딱히 할 게 없네요.”

“빙고 좋지.”

오랜만에 빙고가 하고 싶었던 건지, 이 시간이 즐거워선지. 열린 입 사이로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

“빙고!”

“아, 나도 하나만 더 채우면 됐는데……!”

과일을 주제로 한 빙고는 내가 이겼고, 도시 이름을 주제로 한 빙고는 리온이 이겼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가, 종이가 두 장 정도 남았을 때였다.

“이제 뭐 할까, 빙고는 질렸고.”

침대에 엎드린 채 남은 종이 두 장을 툭툭 두드리자, 리온이 인생 계획도를 그리자고 했다. 몇 살에 어디서 무엇을 할 건지, 계획을 세우는 거였다.

지금이 무슨 중학교 진로 시간이냐고 따질 생각이었지만, 못 알아먹을 것 같아서 관뒀다. 막상 표를 그려 보니, 생각보다 재미있기도 했고.

평탄한 일직선을 쭉 그린 뒤, 그 위에 나이를 적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그때까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적었다.

망설임 없이 술술 써 내려간 리온이 얼마 안 가 펜을 내려놓았다.

“벌써 다 했어?”

“네.”

“빠르네.”

나는 바로 펜을 내려두고 리온의 계획표를 구경했다.

22살- 시몬 관광

23살- 란도르 관광

.

.

.

내용은 생각보다 단순했는데, 매년 여름마다 휴가 계획이 잡혀 있었다.

평생 휴가 안 쓸 것처럼 굴더니, 이번 휴가가 꽤 즐겁긴 했나 보다.

“내년 여름에는 시몬 왕국으로 도망가요. 어때요?”

휴가가 아니라 도주 계획이었군. 그것도 나랑 같이 가는.

시몬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시몬 로시에타 신전이 그렇게 근사하다는데…… 내년 여름이 아니라 올해 겨울에 가는 건 어때?”

“좋죠.”

리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다시 리온의 계획표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보니 다른 계획 없이 휴가와 여행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결혼은 안 해?”

범인 잡다가 연애하고, 진료하다가 연애하고, 공부하다가 연애하고. 그런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다 온 내가 물었다.

게다가 이놈의 인생엔 결혼뿐만 아니라, 은퇴 계획도 없었다. 죽어서 은퇴할 생각인가?

내 곁눈질에 리온이 수줍은 척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가씨께서 아무 생각도 없으신데 어떻게 제가 감히.”

‘형님이 결혼을 안 했는데, 어떻게 동생인 제가 먼저 결혼을 하나요.’ 같은 건가?

아랫사람이 먼저 결혼한다고 내가 눈치를 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하여간 이놈은 나를 대체 뭘로 보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쪼잔한 사람은 아닌데.’

짧게 한숨을 쉰 내가 말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해.”

괜히 나중에 나 모시느라 바빠서 결혼 못 했네, 은퇴 못 했네 같은 헛소리하지 말고.

그러자 리온이 제 파란 눈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앞으로 진짜 제 마음대로 합니다?”

“……? 그래라?”

내 허락이 떨어지자 리온이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나보다 먼저 결혼했다고 내가 눈치 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개자식.

아,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니 갑자기 떠오른 이야기가 하나 있다. 마침 그 이야기가 시작된 게 이 도시기도 하고.

아주 옛날에, 이 땅이 제국에 흡수되기 전의 이야기다.

죽을병에 걸린 이 나라의 리브 왕은, 절박한 마음으로 어느 신을 찾는다. 신은 왕에게 말한다.

‘너 대신 병에 걸려 죽을 사람을 데려와라.’

라고.

단, 그 사람은 외부의 압력 없이 온전한 자신의 의지로 왕 대신 죽음을 선택해야 했다. 절친한 벗도, 충성을 맹세한 신하도 왕 대신 죽는 것을 거부했다.

그때, 소식을 듣고 별궁에서 돌아온 왕비, 칼리슨이 왕을 대신해 죽겠다고 말한다.

왕비가 자기 대신 병에 걸리자, 왕은 이를 끔찍하게 후회하며 왕비의 병을 다시 자신에게 옮겨 올 방법을 찾으려 애쓴다.

하지만 이미 왕비의 몸으로 옮겨 간 병을 다시 왕의 몸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고, 왕은 자신이 찾아간 신의 정체가 절망이란 것을 알고 절망에 빠진다.

뭐, 다행히 두 사람의 사랑에 감동한 사랑의 신이 왕의 병을 치료해 주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이 근처에 왕과 왕비의 동상이 있다고 하는데, 재미없어 보여서 안 갔다.

이런 기적 같은 이야기엔 흥미가 없거든. 왕비는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가고,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선 내 목숨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자.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거냐고?

그 사람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앉아서 작별 인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을 목숨 바쳐 사랑한다니. 나한테 그런 사랑은 불가능하다.

아니, 애초에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 목숨과 맞바꿔서 살아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내 목숨이랑 맞바꿔서 살고 싶어 하는 놈을 사랑할 정도로 안목이 형편없지도 않고.

옆에 있는 이놈은 어떨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리온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만약에 경이 죽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어떡할래.”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내 질문이 당황스러웠는지, 입 끝에 걸쳐져 있던 여유로운 미소에 균열이 일었다.

“그냥, 이 근처에 리브 왕과 왕비 동상이 있잖아. 사랑 하니까 그 이야기가 생각나서 물어봤지.”

“아.”

내 질문이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깨달은 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입을 열었다.

“저는 바로 제 심장을 찔렀을 겁니다.”

무거운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어조였다.

내가 놀란 눈을 하자 리온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 망설임 없이, 바로 심장을 찔렀을 거라고? 그게 가능한가.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신의 아들이 죽은 숲에서 그런 말을 했었지.

‘신이 너에게 선물한 힘은 뭔데?’

‘글쎄요. 전부를 바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

물론 그 용기를 신이 선물해 줬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전부를 바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그의 안에 있다는 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이놈 이거, 어디서 진하게 사랑 한번 해 봤나 보네.

그리고 거하게 말아먹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리온의 옆에 아무도 없으니까.

그나저나 바로 심장을 찌른다니. 대조되는 나의 선택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몸을 돌려 누운 내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말했다.

“아무래도 우린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정반대인 모양이야.”

“자석은 N극과 S극이 만나서 손을 잡는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경은 혓바닥을 참 잘 굴리는 거 같아.”

“저랑 혀도 안 섞어 보셨으면서 그걸 어떻게 아세요?”

“……뭐?”

머리가 멍해지기 무섭게 리온이 다시 혀를 놀렸다.

“아까 분명 입을 닫으라고 하셔서 입술만-”

“진짜 돌았지? 죽고 싶어?”

“제 인생 계획 보셨잖아요. 아가씨랑 여행 갈 곳이 널렸는데, 지금 죽고 싶을 리가요.”

리온이 몇 마디를 더 얹었지만, 혀는커녕 말도 섞기 싫어져서 나는 리온을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

그리고 그날 새벽, 갑작스러운 갈증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더라.’

바로 옆에선 리온이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었다.

물컵이 놓여 있는 탁자 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내 움직임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리온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

뭔가 어색하다 싶었는데, 이놈이 나한테 반말을 하고 있었다.

“왜 반말이야.”

일부러 퉁명스럽게 묻자, 그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어렵게 입을 뗐다.

“우리…… 말 놓기로 하지 않았던가.”

“뭐?”

황당함도 잠시, 나는 리온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저거, 눈이 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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