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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77)화 (77/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77화

리온 역시 주머니 속에서 73이 새겨진 열쇠를 꺼내 들었다.

“제가 찾아올게요. 저도 두고 온 게 있으니까요.”

“제정신이야?”

“네. 먼저 들어가서 쉬고 계세요.”

담담하게 말을 마친 그는, 나를 건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를 안심시키듯, 창 너머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갈 거면,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는 게 낫지 않나.

아까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갔다가 붙잡히면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른다.

뒤늦게 문을 열고 리온을 따라나섰지만, 이미 리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쩐담. 그냥 먼저 방에 돌아가서 씻고 잘까?

지금 내가 먼저 씻어야 리온도 돌아와서 바로 씻을 수 있을 테니 괜찮은 선택 같았다.

하지만 나는 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역시 혼자 보내는 건 좀 아니지.’

리온이 붙잡히면 돈으로라도 해결해야겠다.

나는 대충 옷을 갈아입은 다음, 돈을 챙겨 조금 전 리온이 떠난 길을 따라 걸었다.

*

내 예상과 달리, 리온은 붙잡히지 않았고 손목을 날려 먹지도 않았다.

검을 되찾은 그는,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얼굴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게 기뻐 알은척을 하려던 그때, 도박장에서 타코야끼를 닮은 남자가 뛰쳐나와 리온을 붙잡았다.

“오실 거면 미리 언질이라도 좀 주시지! 놀랐잖습니까?!”

도박장 운영자로 보이는 타코야끼는 리온을 귀빈처럼 대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내가 할 수 있는 추측은 하나였다.

‘역시 리온은 도박장 고인물이었던 건가.’

하지만 그런 것치곤 플레이가 개털이던데.

납작 엎드리는 타코야끼의 태도에도 리온은 내내 덤덤하게 굴었는데, 타코야끼는 그런 리온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대표님 일행이시라지만, 이렇게 가드들을 때려눕히시면 곤란합니다……!”

“?”

대표?

예상하지 못한 호칭에, 잠깐 얼빠진 표정을 지은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구구절절 떠들어대는 타코야끼의 말을 되새기다 보니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리온이 여기 대표라고?’

내 예상과 달리 저 도박장의 주인은 개망나니 로버트 세브리만이 아니라, 늘 옆에 머물던 내 호위였다.

‘저거 진짜 미친놈 아냐?’

뺀질거리긴 해도 정신은 그나마 멀쩡하게 박힌 놈인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틀렸다.

앞에선 싱글벙글 웃으면서, 뒤에선 불법으로 도박장을 굴리고 있었다니.

‘아버지랑 어머니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저런 짓을 해?’

들키면 쫓겨나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저런 녀석을 여태 호위라고 달고 다녔다니…… 속이 터져서 이마를 몇 번이나 내리쳤는지 모르겠다.

거북목이 나을 정도로 이마를 퍽퍽 내리치고 있던 그때, 우연처럼 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마주친 나를 보고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그는 곧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안에서 쉬고 계시라니까.”

“걱정돼서 따라왔지.”

나 역시 리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그냥 방에서 쉬고 있을 걸 그랬나 봐. 이 도박장이 네 소유니까, 처음부터 내가 네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잖아?”

“…….”

“그렇지?”

“음…… 네.”

다 들킨 마당에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짧은 고민 끝에 리온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기사단 월급으로 이만한 건물을 사는 건 무리다.

혹시 사채나 도박으로 돈을 불려서 지은 건가 싶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돈으로-”

하지만 말을 완성하기 전, 얼마 전 리온이 한 말이 떠올랐다.

‘저를 숨겨 주시는 대신 공작가의 기사가 되어 충성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어머니의 유산을 찾을 때도 공작 부인께서 도와주셨고요.’

아, 설마.

“……설마 어머니 유산으로 지었어?”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이놈이 아무리 상식 밖의 인간이라지만,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재산으로 도박장을 지을 생각을 하진 않았을 거다.

“네. 탈탈 털어서 지었죠.”

그리고 리온은 그런 내 기대를 완전히 박살 냈다.

“미쳤니? 미쳤어? 진짜 제정신이야!?”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끊기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미친 듯이 그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아니, 나를 생각해 준 건 고마운데, 왜 하필 ‘유산 털어 도박장 짓기’로 결론이 났는지 모르겠다.

코가 막히기라도 한 건지, 이놈은 내 속이 활활 타는 냄새도 맡지 못하고 얻어맞으면서 헬쭉거릴 뿐이었다.

웃는 낯에 침 잘 뱉을 자신 있었는데. 리온이 웃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해져서, 나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함부로 때리는 버릇 좀 고쳐야겠어.”

확실히, 손이 먼저 나가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다.

물론 지금은 리온이 미친 짓을 저질러 어쩔 수 없었다며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었지만, 혹시 아나. 나중엔 그냥 작은 실수 하나로도 하녀들에게 손을 올릴지.

손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는 나를 보며 리온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요? 전 아가씨가 저를 거칠게 쓰다듬으신 줄 알았죠.”

“쓰다듬은 게 아니라 때린 거야.”

친절하게 정정해 주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음엔 너무 거칠게 쓰다듬지 말고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세요.”

“쓰다듬은 게 아니라니까? 나 지금 대체 누구랑 말하니……?”

“저랑 말하고 계시잖아요. 저를 바로 앞에 두고 그걸 물으시면, 제가 너무 섭섭하죠.”

“야이씨, 뭐 이런…… 진짜 돌았어?”

이쯤 되면 한 대 얻어맞고 싶어서 일부러 내 성질을 긁는 게 틀림없다.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니, 그걸 본 리온이 양손을 붙잡았다.

“말했잖습니까, 전 아이스크림 같은 남자라니까요. 다치기 쉬우니 부드럽게 대해 주셔야죠.”

하, 이놈 이거 아까부터 자기 모에화가 수준급이다.

‘버릇 고친다고 말한 지 5분도 안 지났는데, 한 대 칠 수도 없고…….’

대신 잡힌 손을 들어 올려 리온의 손을 살짝 깨물었다.

“아이스크림은 달기나 하지.”

“누가 아이스크림을 그렇게 먹습니까? 살살 녹여 먹어야지.”

“빨리 녹아서 죽었으면, 싶네.”

나는 인자하게 웃으며 덕담을 해 준 뒤, 리온이 소유한 도박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저걸 운영한 거야?”

그래, 어디에 돈을 쓰든 그건 리온 마음이다.

뺀질거리면서 훈련 빠지는 건 알았는데, 이런 어둠의 세계에 손을 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어머니 유산으로.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자, 그걸 의식한 리온이 급히 해명하듯 말했다.

“타당한 이유가…… 아니, 낭만적인 이유가 있었어요.”

“얼마나 낭만적인지 그 이유 좀 들어 보자.”

조금 전 도박장엔 불법에서 정당을 찾던 남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불법에서 낭만을 찾는 남자가 있네.

“곧 생일이시잖아요?”

“그런데……?”

“받으세요. 생일 선물이에요.”

“어……?”

“예전부터 게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슈아 양이 신경 쓰여서 그동안 제대로 못 즐기셨잖습니까. 여기서 편하게 즐기시라고 지었습니다.”

내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리온은 수도로 넘어가면 정식으로 문서를 넘기겠다고 덧붙였는데,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상황을 넘기려고 지어낸 말은 아닌 것 같고.’

정말 성인이 된 나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솔룸을 지은 거다, 리온은.

가만, 그럼 처음부터 가드들한테 쫓길 필요가 없었던 거네?

그냥 순순히 붙잡힌 뒤 리온이 제 정체를 밝혔으면 그만이다. 입구에서 몸수색을 하던 사람도 리온을 얼추 알아본 것 같았고.

“그럼 굳이 입 맞출 필요도 없었네. 미리 말하지 그랬어.”

“엄…… 그땐 저도 당황해서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습니다.”

민망했는지 리온이 제 뒷머리를 매만지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입으로는 죄송하다고 하는데, 사실 하나도 안 죄송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시비를 걸 여유가 없었다.

조만간 칼바도스가 여기에 올 테니까.

관련자들이 붙잡혀 갈 텐데, 거기 리베르트 기사단 소속 기사가 있다고 할 순 없지.

“저거 당장 정리해. 조만간 황태자가 나설 거야.”

리온이 실명을 밝히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워 운영을 했다 해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이참에 이쪽 사업에서 손을 떼면 더 좋고.

“지금 황태자 전하의 업무보다 제 안위를 우선시하고 계시는 건가요?”

아까부터 실실 웃는 게 짜증 나서 이 질문은 무시하기로 했다.

*

숙소에 돌아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다.

“404호 손님! 빈방이 하나 생겼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방이 하나 남았다는 말에 난처해하던 나를 기억한 직원이 생글생글 웃었다.

“안 됩니다.”

물론 리온은 반대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바로 대처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허, 솔룸에서 장난삼아 호위 때려치운 건 까먹은 모양이지?

방이 멀면 안 된다는 리온의 말에, 직원이 반색하며 외쳤다.

“마침 딱 옆방입니다! 405호!”

“오.”

나는 바로 직원에게 오케이 사인을 날리고, 405호로 방을 옮겼다.

도망치느라 지친 몸을 씻은 뒤 편하게 드러누웠다.

‘공작저로 돌아가면 세오가 잔소리를 퍼부을 텐데…….’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냐고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지. 방문객을 짐작한 내가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왜 왔어?”

문을 열자, 예상대로 리온이 서 있었다.

잠이나 자지 왜 찾아왔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아주 찌질한 미소를 곁들이며 답했다.

“혼자 자는 게 무서워서 잠이 안 옵니다.”

진짜 미친놈인가.

저런 말을 뻔뻔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재주다.

‘아, 혼자 있다 보니 심심했나.’

계속 같이 있다가 혼자 있으려니 그럴 법도 했다.

그가 처량하게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우스워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웃다 보니 잠이 다 깨 버렸고, 나는 리온을 방으로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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