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76화
그러고 보니 그때 신의 아들이 죽은 호숫가에서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리온. 여기서 갑자기 사람이 아닌 뭔가가 확 튀어나오면 어떻게 할래?’
‘글쎄요…… 아가씨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
‘비명을 지르면서 공격하지 않을까. 좋은 방법은 아니겠지만.’
‘그럼 이렇게 하죠. 비명은 제가 지를 테니, 공격은 아가씨가 하는 겁니다. 아가씨 말씀대로 비명을 지르면서 공격하는 건 그렇게 좋은 방법이 아니니까요.’
그때 나눈 대화대로, 리온은 정말 비명만 질러 대고 있었다.
이 새끼,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담이었구나.
나는 뒤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언제는 아껴 쓰겠다더니?”
“아껴 쓰려고 했는데, 아가씨가 최대한 빨리 쓰길 바란다고 하셔서 생각을 바꿨죠.”
빌어먹을 내 기사.
‘이게 말이나 못 하면.’
리온은 조금 전 내가 한 말을 근거로 들며 또박또박 대꾸했다.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앞으로 잘 들을 테니까 빨리 저 좀 지켜 주세요. 전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연약한 남자라고요.”
자존심도 없는지 리온이 내게 매달렸다.
하지만 어쩐지 그의 얼굴엔 긴장감보단 설렘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얜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나.’
제정신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잘 모르나 본데,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어.”
“아가씨가 눈치 못 채시게 천천히 변할게요.”
개구리를 끓이는 물처럼 서서히 변하겠다고 리온이 덧붙였다.
그럼 최종적으론 내가 개구리가 되는 셈인데…… 이놈은 날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삶아 죽일 셈인가.
순간, 리온을 제물로 바치고 도망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재 이 포악한 사태의 원인은 정신 빠진 나의 손에 있었으므로, 나는 책임을 져야 했다.
그리고,
‘그러다가 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그땐 아가씨가 저를 지켜 주시는 건가요?’
‘음…… 그래. 그러지 뭐.’
오늘 새벽에 그렇게 약속했으면서 바로 약속을 파기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또한 나는 친구를 버리고 도망치는 얍삽하고 치졸한 칼바도스와는 다른 사람이다.
‘참아, 엘렌시아 리베르트. 도망치면 칼바도스 그놈이랑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묘한 책임감이 느껴졌고, 발걸음이 무거워진 탓에 리온을 버리고 발을 떼기 어려워졌다.
“하…….”
의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친 사람처럼 의자를 휘두르니 가드들도 가까이 오지 못했다.
여러 명이 달려들길래 계단에서 의자를 휘두르며 한 사람씩 처리했다.
리온 역시 내 뒤에서 발길질을 하며 사람들을 계단 아래로 떨궜다.
가드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자, 리온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갈까요?”
상황에 맞지 않는 천진한 미소였다.
나는 홀린 듯이 리온의 손을 잡았고, 입구에 있는 사람들을 따돌리며 건물을 빠져나갔다.
건물을 빠져나가면 끝일 줄 알았건만, 가드들은 지겨울 정도로 우리를 쫓아왔다.
그 사람들 손에 날붙이가 들려 있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어디로 가야 하지?’
저놈들이 계속 뒤를 쫓는 상황에서 숙소로 도망가는 건 얼빠진 짓이다. 숨어서 추격을 따돌린 뒤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잡아!”
“이쪽으로 갔다!”
큰 목소리에 당황한 나를 리온이 골목으로 잡아끌었다.
“와, 계속 쫓아오네요.”
“후우…….”
쫓기느라 여유도 없었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느라 정신도 없었다.
고작 이거 뛰고 이렇게 지치다니.
세오에겐 미안하지만, 공작저로 돌아가면 서류 작업보다 운동을 먼저 해야겠다.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고, 눈이 마주친 나와 리온은 동시에 숨을 죽이고 주변을 살폈다.
좋아, 일단 골목 구석에 병 두 개가 있으니 양손에 하나씩 쥐고 싸우면 되겠다.
‘아, 그러고 보니 드라마에선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입을 맞춰서 추격을 따돌리던데.’
놀랍게도 두 사람이 입을 맞추면, 지켜보던 사람이 더 민망해서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피해 준다.
여기서도 그 공식이 먹힐까?
로맨스 소설이니 먹힐 수도 있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몸을 밀착한 리온에게 손짓했다.
“리온, 고개 좀 숙여 봐.”
“왜요?”
그렇게 물은 리온은 내 답을 듣기도 전에 고개를 숙인 채였다.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어디서 봤는데…… 이럴 땐 입을 맞춰서 추격을 따돌리더라고.”
“입을 맞춘다는 게 물리적인 행동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말을 맞춘다는 뜻이 아니라?”
“……어.”
역시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나? 괜히 내 쪽에서 개수작을 부리는 것 같아, 민망한 마음에 리온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리온은 내 계획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을 반짝였다.
“괜찮은 방법 같은데요?”
“……그래?”
“네.”
다행이다.
리온의 반응을 보니 역시 여긴 로맨스 소설 속이 맞구나, 싶었다.
“그럼 눈 좀 감지.”
앞으로 말을 잘 듣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온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입은요? 엽니까, 닫습니까?”
“당연히 닫아야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리온이 소리 내어 웃더니, 고집을 부리듯 천천히 입을 닫았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리온의 목에 팔을 둘렀고 리온은 눈치껏 몸을 숙였다.
그러나 눈은 감아도 입은 가만둘 수 없었는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능숙하죠?”
엄…… 내가 이 세상에 뚝 떨어지기 전에 키스신을 촬영했거든. 어떤 각도가 잘 받는지도 잘 알고.
물론 그렇게 말할 순 없었으므로 그냥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불만이야?”
“그럴 리가요.”
퉁명스러운 말에도 리온은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런 여유로운 모습을 보니 오히려 속이 탔다.
“그럼 이제 입 좀 닫아, 제발. 이러다 혀까지 섞겠다.”
재촉에 못 이긴 리온이 조금 전처럼 입을 꾹 닫았다.
흠, 아무래도 직접 입을 맞대는 건 좀 그렇지. 저쪽에서 착각할 정도로 각도만 잘 조절하면 되니 굳이 입술을 맞댈 필요도 없고.
괜히 나 때문에 휘말린 게 미안해서, 나는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리온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고개를 틀었다.
쓸데없이 서로를 배려한 탓에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바람에 입술이 스쳤다.
‘이게 뭔…….’
입술을 스친 부드러운 감촉에 놀란 내가 눈을 떴다.
‘이 자식…… 설마 실눈인가?’
눈앞에서 리온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먼저 눈을 떠 버린 내가 따질 일은 아니었지만, 말을 잘 듣겠다고 한 놈이 할 짓도 아니었다.
그때, 바로 근처에서 들리는 가드들의 목소리에 쫄았는지, 리온이 나를 더 꽉 감싸 안았다. 나 역시 리온을 붙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다시 눈을 감고 숨을 죽인 그때였다.
“여기다! 이것들 여기 있어!”
“되도 않는 수작질로 우리를 속이려 든다!”
쫓아오던 가드들은 나와 리온을 바로 발견했고, 우리의 개수작에 낚이지 않았다. 대신 골목이 떠나갈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동료들을 불렀다.
‘X발……!’
주인공이 아니라서 그런가?
클리셰가 안 먹힌다.
당황한 것도 잠시, 추격자가 둘뿐이란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갈림길에서 조를 나눈 모양이다.
소리를 듣고 지원이 오기 전에 후딱 처리해야…….
결국 나는 아까부터 눈여겨본 병을 집어 들었고, 보다 못한 리온이 나를 막아섰다.
“그걸로 치면 죽을걸요.”
“아.”
리온은 내 손에서 병을 뺏은 뒤, 쓰레기통 뚜껑으로 머리를 내리쳐 장정 둘을 기절시켰다.
만화 영화 효과음처럼 쨍쨍한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이 쓰러진 것을 확인한 우리는 천천히 가면의 매듭을 풀었다.
“입을 맞추고 있으면 안 들키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들켰네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서 그런가 봐.”
만약 셀레네와 칼바도스가 입을 맞추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저놈들이 헛기침을 하며 그대로 골목을 지나쳤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요즘 젊은 것들은 때와 장소를 모른다고 핀잔을 주거나,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리온이 순수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왜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저는 언제나 저를 주인공으로 생각해 왔는데.”
당연하다는 듯한 리온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가씨는 다른 생각을 하셨나요?”
“…….”
내가 쉽게 답하지 못하자 리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왜 나보다 저놈이 더 크게 동요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온의 지적대로 나는 나를 사랑하면서 나를 주인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여긴 소설 속 세상이고, 주인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세상은 흔들리지 않고 고요했고, 두 발은 땅에 멀쩡하게 붙어 있는데 출렁거리는 파도 위의 배를 탄 것처럼 멀미가 난다.
어지러움을 참지 못한 내가 벽을 붙잡고 구역질을 해 댔다.
“웩…….”
“……지금 저랑 입 맞추고 구역질하시는 거예요?”
뒤를 돌아보지 못해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등 뒤에서 침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이러시면 저 상처 받는데…….”
“닥쳐 좀, 웩-”
목소리만 저렇지, 상처 안 받은 거 다 안다.
내가 고작 입술 한 번 스친 걸로 구역질할 사람이 아니란 것도 잘 알 테고.
나는 확신할 수 있다. 내가 나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하지만 정작 다른 인간들을 내 세상의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등신처럼 굴고 있었네, 내가.’
연이은 구역질이 무색할 정도로 입 밖으로 쏟아낸 것은 없었지만, 속은 꽤 시원해졌다.
*
골목을 벗어나 겨우 숙소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나는 뒤늦게서야 허리 부근의 허전함을 느꼈다.
‘뭐지? 분명 허리 쪽이 좀 더 묵직했던 것 같은데…… 아.’
도박장에 검을 두고 왔다.
“이런 거지 같은…….”
바지 주머니를 더듬어 보니 숫자 72가 새겨진 열쇠가 나왔다. 도망치기 급급해서 짐을 찾을 정신이 없었다.
그냥 검이라면 버리고 가겠지만, 그 검은 황후의 하사품이다.
이대로 다른 곳에 넘어가도 문제지만, 만약 도박장에 온 칼바도스가 그 검을 본다면 바로 내 것이라는 걸 알아챌 것이다.
‘내가 신나게 한 판 달린 것도 알게 되겠지.’
옆에서 칼바도스가 깐죽댈 걸 생각하니 벌써 짜증이 치밀었다.
……정말 더럽게 재수 없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