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공녀는 살고 싶다 (75)화 (75/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75화

연보랏빛 저녁 하늘에 흐릿하게 달의 형상이 잡혔을 때쯤, 나와 리온은 사이좋게 솔룸으로 향했다.

도박장에 다녀갔단 소문이 나서 좋을 게 없다. 나는 근처 가게에서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검은 가면을 하나 사서 뒤집어썼다. 그 옆엔 공작 깃털로 장식된 파란색 가면이 하나 있길래, 리온의 얼굴에 씌워 주었다.

‘조용히 놀다 가야지, 조용히.’

어렸을 적부터 카드만 쥐면 날뛰려 드는 오른손을 겨우 잠재웠다.

마음이 차분해진 것도 잠시, 도박장 입구 근처에서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이곳에 오기 전, 나를 열받게 한 편지를 보낸 로버트 세브리만 놈이다.

심지어 그는 내 성격이 더러워서 칼바도스와 약혼이 깨졌다고 믿고 있다.

가문에 소식이 들어가도 상관이 없었는지, 저놈은 나처럼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입구에서 서성이던 로버트는 친구와 함께 도박장에 들어갔고, 그와 동시에 내 기분은 더러워졌다.

“아, 저놈은 진짜 마주치기 싫은데…… 만나면 꼬리라도 치든가.”

그래, 꼬리라도 치면 한 마디는 더 섞어 줄 텐데. 자꾸 사람 속을 긁는 말만 하니 곱게 보이지 않았다.

‘조만간 처리를 해야…….’

그렇게 생각하며 낮게 욕설을 읊자, 내 말을 들은 리온이 천천히 물었다.

“꼬리 치는 남자가 취향이세요?”

누굴 보고 그렇게 살벌하게 욕을 하느냐, 아는 사람이냐 같은 예상 범위 내의 질문은 아니었다.

평소였으면 가볍게 무시했을 질문이지만, 이번 기회에 나의 취향을 되돌아보기로 했다.

꼬리 치는 남자가 취향이냐고?

음…… 그랬나?

잘 몰랐는데 그랬나 보다.

로버트 개망나니 덕에 나도 모르는 내 취향을 발견했다.

“어.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니까 소문내면 안 돼.”

괜히 소문 듣고 이목구비 자유분방한 남자들이 와서 말 거는 건 안 내킨다. 꼬리도 잘생긴 남자가 와서 쳐야 넘어가는 법이다.

어디서 괜한 놈들이 와서 꼬리치면, 나도 모르게 가위로 꼬리를 자르려 들지도 몰라서 한 말이었다.

그러자 리온이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소문을 왜 내요. 전 어디 가서 손해 볼 짓 안 합니다.”

그렇게 말한 리온이 미소 지었다.

하긴, 저 얍삽한 놈이 어디 가서 손해를 볼 놈은 아니지. 더 뜯어 오면 몰라도.

도박장에 로버트가 있는 게 거슬리긴 하지만…… 그놈 때문에 내 휴가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건 더 싫었다.

혹시 그놈이 알아볼까 싶어, 나는 다시 한번 가면 뒤에 달린 끈을 묶어 가면을 고정했다.

*

“검은 반납하셔야 합니다.”

건물 안쪽으로 향하는 계단에는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조를 이뤄 사람들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있었다.

나는 내 허리춤에 가지런히 매달린 검을 흘끗 보았다.

올해 초에 황후가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며 하사한 검이다.

그 점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들어가려면 어쩔 수 없다. 코앞까지 와서 숙소에 검을 두고 오겠다며 돌아가기도 귀찮고.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나를 살핀 뒤, 숫자가 적힌 열쇠를 주고 검을 가져갔다.

손에 들려 있던 돈주머니도 몇 번 살피더니, 금화밖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바로 돌려주었다.

‘리온은 끝났나?’

칩을 교환한 뒤 리온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리온의 몸수색을 하던 남자가 가면 너머 리온의 얼굴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집요한 시선이 불쾌했는지 리온은 가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잘생겨서 그런가.’

저 얼굴은 가면을 써도 숨길 수 없는 모양이지.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제법 귀여운 자세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얼마 안 가 리온을 통과시켰고, 우리는 신나는 마음으로 입장했다.

꽤 소란스러운 도박장 내부는 내 생각보다 훨씬 깔끔하고 화려했는데, 그럼에도 어딘가 음습한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다. 당장 경찰이 들이닥쳐도 납득할 수 있을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랬다.

‘그나저나, 짓는 데 돈을 어지간히 쏟아부었겠어.’

이쯤 되면 솔룸의 소유주가 굉장히 궁금해지는데, 그건 조만간 칼바도스와 레이델이 알아낼 테니 굳이 내가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칼바도스의 일이 끝나면 그때 물어보면 되겠지.

홀에서 몇 판을 즐기다 보니 더 안쪽 자리로 안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놀다 보니 깨달은 건데, 홀에는 로버트 개망나니 놈이 없다.

‘안쪽에서 노는 것 같은데 굳이 내가 그쪽에 갈 이유가 없지.’

그러고 보니 저놈은 가면도 안 쓰고 잘도 돌아다니네. 아, 혹시 여기 소유주가 로버트 세브리만인가?

그 생각 없는 놈이라면 이런 곳에 휘황찬란한 도박장을 지을 법도 하다.

‘망해라.’

수도로 돌아가면 칼바도스한테 솔룸부터 뒤져 보라고 해야겠다.

게임이 끝나자 리온이 실실 웃으며 나를 다른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이놈은 왜 자꾸 웃어?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하지만 그걸 물어볼 틈도 없이 게임이 시작됐고, 나는 정신없이 카드를 받아 패를 확인해야 했다.

*

리온은 내 생각보다 훨씬 등신이었다.

어디 가서 손해 볼 짓은 안 한다더니…… 지금 제대로 손해를 보고 있었다.

‘이런 실력으로 왜 여기 오고 싶어 했는지 도통 모르겠네.’

내가 카드를 섞을 차례가 왔고, 리온이 건넨 카드를 섞어서 돌리던 그때였다.

“거기 아가씨.”

“?”

나를 부르는 건가 싶어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방금 카드, 밑에서 뺐지?”

……나도 모르게 그런 짓을?

이 테이블에 아가씨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둘이다. 남자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걸 보아 밑장빼기를 한 사람이 내 대각선 자리에 앉은 아가씨는 아닌 것 같고…….

‘그럼 나란 소린데.’

문제는 이 미친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바람에 확신이 없다는 거다.

하는 수 없이 옆자리의 리온에게 속삭이며 사실을 확인했다.

“저놈 저거 나한테 하는 말 맞지? 내가 그랬어……?”

“……알고 하신 거 아니었어요? 아까부터 계속 그러셨잖아요.”

맙소사.

그래서 웃고 있었구나?

리온의 말에,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조용히 놀다 갈 생각이었는데 글러 먹었다.

“게임은 정당하게 해야지! 돈이 걸렸는데!”

불법 도박하는 주제에 정당을 찾네?

물론 같이 하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악……!”

화가 난 남자는 거의 사람을 찢을 기세로 내 손목을 잡아끌어 테이블 위에 내리쳤다.

‘설마, 이 인간이 내 손을 망치로 내리치려고……!’

보다 못한 리온이 바로 남자를 제압했다.

리온이 내 옆에서 떨어지자, 같은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내 움직임을 막았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장 큰 문제는, 실내에 있던 가드들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는 거다.

덩치 큰 남자들 여럿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건 생각보다 무서운 광경이다.

이거 걸리면 손목 하나로는 안 끝나겠는데……?

플레이 한 번 더럽게 한 거치곤 대가가 너무 컸다.

“하하…….”

당황하고 겁을 먹은 나머지 미친 사람처럼 웃고 말았다.

그대로 테이블을 엎어 버리려고 조용히 눈치를 보며 테이블 밑에 손을 집어넣고 힘을 줬는데…….

‘안 들려?’

테이블이 좀처럼 들어 올려지지 않는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이상함을 느낀 내가 눈을 깔아 테이블 아래를 확인했고, 바닥을 본 나는 기가 차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 미친 인간들이 테이블을 바닥에 박아놨다.

‘……설계자 누구야.’

이제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이랬을 것 같진 않다. 시간이 지나 테이블을 엎는 사람이 수두룩하니 짜증 나서 테이블을 바닥에 박아 버린 거겠지.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침대도 이렇게 굳건하게 땅바닥에 박혀 있진 않을 거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던 나는 뿌리를 깊게 내린 테이블과 달리 고정되지 않은 의자를 발견했다. 이건 뭐,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기분이었다.

검도 없고……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저 의자로 가드들을 공격하면서 튀는 것뿐이다.

“리온.”

“네.”

튀자.

그 눈빛을 알아먹은 리온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팔꿈치로 나를 붙잡은 사람들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죄송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사람들은 잘못이 없다.

어떤 여자가 도박장에서 사기를 쳤고 그걸 붙잡은 것뿐이다.

더러운 수작을 부린 내 잘못이지만, 갑자기 몰려드는 가드들 탓에 겁이 나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할 여유가 없었다.

조금 현타가 왔지만 나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의자를 휘둘렀다.

‘어차피 얼굴도 가렸는데 무슨 상관이냐.’

로버트도 없는 것 같고…… 적어도 지금 이 홀에서 날 알아볼 사람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고, 그 덕에 가드 둘을 때려눕힐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리온은 내 뒤에 숨어서 꺅꺅거리고 있었다.

내 뒤에 숨는다고 그 몸이 가려질 리도 없건만. 이놈은 나를 방패처럼 쓰고 있었다.

꺅꺅거리는 그의 비명 소리가 큭큭거리는 웃음소리로 바뀌었을 때쯤, 나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다.

‘얘 직업이 뭐지?’

답은 명료했다.

나는 내 뒤에 숨어 어깨를 붙든 리온에게 짜증스럽게 물었다.

“경은 내 호위 아니야? 대체 왜 내 뒤에서 숨어 있는 거지?”

나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친애하는 나의 호위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바로 입을 열었다.

“아까 호위직 반납 기회 주신 거 기억하시죠?”

“어. 설마 너-”

내 말을 끊고 리온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뒤따라 나온 말은 전혀 차분한 내용이 아니었지만.

“지금 시간부로 호위직 반납하겠습니다.”

이 치사한 새끼. 하필 지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