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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74)화 (74/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74화

“어우 씨……! 깜짝이야……!”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튀어나온 루나 때문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탈출하기’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아가씨……? 어디 나가시려고요?”

루나 역시 갑자기 뛰쳐나온 나를 보고 놀란 것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에 들린 쟁반 위에는 찻잔이 놓여 있었는데, 긴 낮잠 탓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를 위해 가지고 온 것 같았다.

어디 보자, 뜨거운 물에 손을 데진 않은 것 같고…….

루나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그녀의 어깨를 두들기며 목소리를 낮췄다.

“잠이 안 와서 바람 좀 쐬고 올게. 내 방 책상에 편지가 있으니까 내일 아침에 세오한테 가져다줘. 알겠지?”

“네. 어……? 잠깐만요, 그 말씀은 내일까지 안 들어오신다는-”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내가 루나의 입을 막고 작게 귓가에 속삭이자, 루나는 내 사랑을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격하게 고개를 저어서 조금 상처받았다.

몰라요, 몰라.

손 틈으로 루나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모르긴 뭘 몰라. 아무튼 해 뜨기 전까진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았지?”

루나의 확답을 받은 뒤에야 나는 마음 편히 저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리온은 낮에 말한 것처럼 말 두 마리를 대령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나한테 들켜서 좀 늦었어. 바로 황실 기관 쪽으로 가자.”

저번처럼 메디안을 시켜 유타스로 갈까 했지만, 황실 기관을 이용하기로 했다. 메디안의 성격상 바로 다음 날 세오에게 목적지를 불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세오는 유타스로 호위를 서른 명쯤 보내겠지.

리온 하나를 데리고 저 남쪽까지 내려갔다는 사실로 잔소리를 퍼부을 것이다.

나한테 호위 서른 명을 다 붙이려고 할 텐데, 그럼 쪽팔려서 도박장엔 발도 못 디딘다.

세오가 내 행선지를 알게 되면 조용히 놀다 오는 건 실패라고 할 수 있다.

‘공녀님을 잘 보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분명 공작 대리직을 맡은 첫날에도 그렇게 말했지.’

혼자 가겠다는 내 말보다 나를 잘 보필하라는 공작 부부의 말이 우선일 테니, 우리 충실한 세오 경은 내 예상대로 행동할 거다.

공작저엔 이상할 정도로 고집이 센 사람이 많다.

지금 내 옆에 있는 리온도 그렇고.

내 발로 걸을 수 있다고 소리쳐도, 다칠까 봐 걱정이 된다며 나를 들쳐메고, 휴가를 줘도 반납하는 놈이었다.

내가 손을 들어 오랜 시간을 함께한 호위의 어깨를 쓰다듬자, 리온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하루 동안 호위직 반납할 기회 줄게. 쉬고 싶을 때 써먹어.”

“그러다가 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그땐 아가씨가 저를 지켜 주시는 건가요?”

“음…… 그래. 그러지 뭐.”

내팽개치고 나만 냅다 도망칠 거라고 답하려다가, 입을 열기 직전에 답을 바꾸었다.

만약 리온이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면, 그땐 리온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들켜 유사시에 희생을 강요당하는 순간일 테니까.

그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누군가가 그의 희생을 강요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그를 감추고 지켜 줘야지.

“도망친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왜요?”

“그냥.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되잖아.”

내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리온이 웃었다.

그는 앙큼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 사이가 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는데, 이상하게 그 질문엔 답을 하기 어려워서 나는 그냥 침묵을 택했다.

단순히 내 호위인 사이라고 답하자니,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반납 기회, 아껴 뒀다가 다음에 써도 되는 거죠?”

“어. 그래도 최대한 빨리 쓰길 바랄게.”

일단 넣어 두기라도 해라.

그래도 저번처럼 내 휴가 권유를 거절하진 않았으니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나중에 필요할 때 알아서 쉬겠지.

그렇게 나는 황실 기관에 돈을 던져 주고, 이동마법을 통해 리온과 함께 남부의 유타스로 도망칠 수 있었다.

*

여름 특유의 끈적거리는 느낌이 없는 유타스는, 나를 아주 흡족하게 만들었다.

‘수도는 최악인데.’

더위가 심한 날은 칼바도스와 손끝만 스쳐도 기분이 더러워져서, 황실 마법사들을 불러 몸을 식히는 쿨링 마법을 부탁할 정도였다.

물론 칼바도스와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위를 심하게 타기도 했지만.

도주 성공이 불러온 기쁨도 잠시, 숙소 직원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리온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뭔데?”

“남은 객실이 하나뿐이라는데요.”

“뭐?”

휴가철에 바다로 놀러 가면서 숙소 예약도 안 하고 다짜고짜 달려온 멍청이가 여기 있습니다.

“하…… 예약을 했어야 하는데.”

나는 꽤 오랫동안, 나의 어리석음에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몇 주 뒤로 예약을 잡고 천천히 놀러 왔어야 하는데. 공작저에서 도망치기 급급해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다.

아, 그냥 실명 까고 돈 얹어 준 다음에 쫓아낼까? 가문 이름으로 다 눌러 버려?

하지만 마음 여린 나는 그런 개망나니 짓을 할 성정이 못 되었으므로 관두기로 했다.

이거, 어쩐지 휴가 시작부터 일이 꼬이는 기분이다.

“남은 방이라도 잡죠? 어차피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 길바닥에서 잘 순 없으니까.”

“방이 하나 남아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렇게 말한 리온은 콧노래를 부르며 직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휴가 시작부터 망했다고 생각하며 이마를 짚은 나와 달리, 데스크로 돌아가는 리온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콧노래까지 부르는 걸 보면 기분이 꽤 좋은 모양이다.

‘하긴, 하나라도 남아 있는 게 어디야.’

남은 숙소를 전전하다가 길바닥에 나앉는 것보단 지붕 있는 곳에서 쉬는 쪽이 훨씬 나으니까.

“올라가죠.”

리온이 환하게 웃으며 열쇠를 흔들었고 나는 그를 따라 웃었다.

우리가 머물 방은 404호였는데, 내 생각보다 깔끔하고 넓은 방이었다. 창도 크고 커튼도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이 완벽한 방에서 굳이 아쉬운 점을 찾아보자면…… 침대가 딱 하나뿐이라는 거다.

싱글 베드가 두 개 놓인 객실은 이미 전부 사용 중이었기 때문에 별수 없었다.

‘뭐, 그래도 상관없나.’

어차피 내가 극구 사양해도 리온은 나를 침대에 눕혀 두고 소파에 드러누울 테니, 침대의 주인은 처음부터 정해진 셈이다.

그래서 나와 리온은 하나뿐인 침대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놀러 갈 장소를 추리기 시작했다.

“솔룸에 가자고요?”

“응. 여기서 제일 유명한 도박장이래.”

도박장 이야기가 나오자 리온의 눈이 커졌다.

“왜, 가기 싫어?”

“아뇨. 마침 저도 아가씨랑 같이 가 보고 싶은 곳이었거든요.”

처음엔 조금 놀란 것 같더니 어느새 리온의 얼굴에선 놀란 기색이 사라지고, 반가움과 비슷한 감정이 자리를 잡았다.

‘설마 도박 좋아하나?’

그래서 도박장에 가자는 내 말에 이렇게 기뻐하는 거고?

‘그런 얘긴 못 들었는데.’

리온을 데리고 가지 말까 싶었지만, 한 판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함께 가기로 했다.

혹시 모를 중독과 탕진에 대비해 나와 그는 도박장에서 사용할 금액의 한계선을 정한 뒤, 숙소 주인이 준 책자를 보며 나머지 여행 코스를 짰다.

*

한창 휴가철이라 그런가, 해변가에 사람이 붐볐다.

대외적인 이미지와 체면을 고려했을 때, 해맑게 웃으며 물장구를 칠 처지가 아니었기에 그나마 사람이 적은 해변 구석에서 놀기로 했다.

나는 신발을 벗고, 옷이 젖지 않게 바지를 걷은 채 바다에 들어갔다.

그런데 리온 이 망할 놈은 나를 빠뜨리기로 작정을 한 건지, 음습한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다행히 그의 표정을 읽은 내가 선수를 쳐 다리를 걸었더니 리온이 순순히 자빠지며 물에 빠졌다.

리온은 조개껍데기 때문에 발을 다칠까 봐 나를 안아 들 생각이었다고 해명했지만, 누가 봐도 거짓말 같아서 콧방귀를 제대로 뀌어 줬다.

리온에게 계속 젖은 옷을 입고 있으라고 할 순 없었기에, 나와 리온은 대충 물기를 말리고 옷을 사러 갔다.

“내가 다 사 줄 테니까 일단 이거 입어 봐.”

“이거랑…… 이것도.”

“아, 저 프릴 달린 것도 입어 봐.”

나는 의상실에서 괜찮아 보이는 옷들을 골라 리온의 몸에 한 번씩 걸쳐 보았다.

흠, 옷걸이가 훌륭해서 그런가. 뭘 입혀 놔도 봐 줄 만했다. 아니, 봐 줄 만한 정도가 아니라 뭘 입혀 놔도 훌륭했다.

자꾸 이것저것 입혀 보고 싶은 맛이 있었다.

‘아, 이거 되게 재밌네.’

이래서 치장을 돕는 하녀들이 그렇게 나랑 카인한테 따라붙었구나?

내 옷을 고를 때와는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리온은 목 부분에 실크로 된 리본 매듭이 있는 연분홍색 블라우스를 입고 나왔는데,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평소 자기 얼굴 잘난 것을 아는 그답게, 거울로 반반한 제 모습을 확인한 리온은 화려한 수컷 공작처럼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런 색은 처음이라 걱정했는데…… 역시 저한텐 다 잘 어울리네요. 하지만 제가 평소에 이런 옷을 입을 일이 없을 거 같은데요.”

“일단 사 놓으면 입을 일이 생기는 법이야.”

“그런가요. 뭐, 아가씨 눈이 즐거우시다면 저는 시스루도 입고 다닐 수 있습니다.”

‘……시스루?’

크게 티를 내진 않았지만, 굉장히 솔깃한 말이었다.

지금 당장 한 벌 사 줄까 싶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수도에서 주문 제작해야지.’

호위에게 시스루룩을 입히는 주인으로 소문나서 좋을 게 없으니 익명으로 주문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리온이 소파 위로 쌓여 가는 옷들을 보며 말했다.

“돌아갈 땐 짐이 두 배가 되겠는데요.”

“원래 여행이 그런 거지. 내일은 기념품도 사야 해.”

기사단에도 돌리고 저택 내 고용인들한테도 작은 선물을 돌려야겠다.

카인이랑 칼바도스, 레이델 것도 사야지. 아, 셀레네와 율리안에게 줄 선물도 사야 한다.

“기사단에 기념품 돌릴 거니까, 경이 생색내.”

“저 기사단에서 예쁨 받으라고요?”

리온의 눈꼬리가 곱게 휘어졌다.

“맞긴 한데…… 되게 좋아하네. 그렇게 기사단 사람들한테 예쁨 받고 싶었어?”

그럼 단장한테 까불지나 말지.

“……아. 예쁨은 아가씨한테만 받아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웃는 것도 잠시, 다시 생각해 보니 기사단 사람들한테 예쁨 받는 것이 끔찍했는지 리온이 정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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