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73화
오늘따라 서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피곤해서 이런 건가 싶었지만, 몸 상태가 나쁜 것 같진 않았다. 입맛도 평소처럼 잘 돌았고, 정신도 또렷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점심시간을 여유롭게 잡았는데, 나는 저택에서 식사를 했고, 오전 업무 내내 내 옆에서 일처리를 도왔던 세오와 시즈는 밖으로 함께 식사를 하러 갔다.
그러고 보니 요즘 두 사람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아무래도 둘이 사귀는 것 같았다.
‘이왕 사귈 거면 결혼까지 했으면 좋겠네. 중간에 헤어져서 집무실 분위기 거지 같아지면 안 되니까.’
지금 상황에서 누구 한 사람이 그만두면 타격이 크기도 하고.
나는 집무실 소파에 기절하듯 앉아, 루나가 가져다준 포도를 두 알씩 입안에 밀어 넣었다.
이제 점심시간도 금방 끝난다고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그런 내 우울함을 뚫고 들어온 것은 꽤 발랄한 노크 소리였다.
“뭐야.”
“접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누군지 아냐고 따지려고 했지만, 너무 잘 아는 목소리였기 때문에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리온이 내 앞에 섰다.
“오랜만이네. 왜 왔어?”
“아가씨께서 제 휴가를 출장으로 처리하라고 지시하셨다던데요.”
리온이 나를 만나러 아카데미에 온 날, 나는 그의 휴가를 출장으로 처리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내가 공작저로 돌아가 공작 부부에게 내 안부를 전하라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건 휴가가 아니라 업무다. 새벽 내내 나를 기다리느라 잘 쉬지도 못한 것도 있고.
“응. 불만 있어?”
“네.”
“대체 뭐가 불만이야…… 남은 쉬고 싶어도 못 쉬는데.”
휴가를 떠먹여 줘도 싫다고 하네. 배가 불렀구나, 불렀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대신 포도알과 함께 말을 삼켰다.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는 내 눈빛에도 리온은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아가씨가 보고 싶어서 만나러 간 건데, 꼭 일 때문에 찾아간 것 같잖아요. 그래서 불만입니다.”
고집을 부리는 게 이놈인지, 나인지. 리온과 함께 있으면 그게 늘 헷갈렸다.
내가 일할 때 레이델과 칼바도스가 놀면 배가 아파서 어떻게든 고생을 시키고 싶었는데, 리온은 그렇지 않았다.
‘아랫사람이라 그런가…….’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정확한 이유를 찾기 위해 내가 리온 뚫어져라 바라보자, 그 눈빛을 잘못 해석한 그가 장난처럼 물었다.
“부러우시면 제 휴가 양도해 드릴까요? 우리 둘이 사이좋게 나눠 써도 되고요.”
“됐거든. ……아.”
말을 하던 중, 갑자기 콧물이 쭉 흘렀다.
‘한여름에 웬 콧물이…… 감긴가?’
놀라서 코 밑을 누르자, 손에 피가 묻었다.
콧물이…… 아니네?
이 세상에 와서 처음 흘리는 코피였다.
솔직히 당황스럽기보단 반가운 마음이 컸다.
공부를 하다가 코에서 물 같은 게 흐르길래 코피인 줄 알고 잔뜩 기대하며 휴지로 코를 닦았는데, 죄다 콧물이었기 때문이다.
“하…… 이걸 칼바도스한테 보여 줬어야 하는데.”
우리 둘 다 콧물을 코피로 착각하고 들떠 있었던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일하다가 피곤해서 코피가 나는구나.
경사스러운 일이었기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런 나를 본 리온이 굳은 얼굴로 휴지를 건넸다.
‘아, 이놈 표정 봐라?’
호위라서 그런가, 내 피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웃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엉엉 울 일도 아니었다.
울어 봤자 서류에 눈물 떨어져서 잉크가 번지면 내 손해지.
별것도 아닌 일로 심각한 리온의 표정이 우스워, 나는 계속 실실 웃으며 코를 감쌌다.
어렸을 땐 연무장에서 그렇게 굴리더니, 지금은 호위랍시고 내 걱정을 한다.
늘 여유로운 모습이 얄밉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당황한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놈은 내가 다쳐야 당황하는구나, 싶었다.
나는 대충 휴지를 돌돌 말아 오른쪽 콧구멍에 쑤셔 넣은 다음, 리온에게 나가라는 의미를 담아 손짓했다.
“이만 가 봐. 나 이제 일해야 돼. 세오도 금방 돌아올 테고.”
하지만 리온은 바로 집무실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내 쪽으로 천천히 몸을 낮추고 작게 물었다.
“아가씨, 우리 도망갈래요?”
도망?
몰래 남편의 얼굴을 확인하라는 언니의 조언을 들은 프시케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개소리로 치부하기엔 너무…… 지나치게 끌리는 제안이었다.
“……어디로? 어떻게?”
엿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지만,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남부 쪽으로 바다 구경이나 가죠. 이렇게 피를 쏟을 정도로 몸 상태가 나쁜데…… 아무리 세오 경 이라도 아가씨를 책상 앞에 앉혀 둘 순 없을걸요.”
“바다…… 바다 좋지. 당일치기로?”
“왜 이렇게 욕심이 없어지셨어요? 우리 아가씨 맞아요?”
“……가만히 좀 있어 봐. 내가 요즘 휴식이 궁핍한 삶을 살아서 그래.”
이게 다 옆에서 쪼아 대는 세오 놈 때문이다.
리온 말이 맞다. 기껏 바다를 보러 남부까지 갔는데, 하루 만에 돌아온다고?
‘그건 바다에 대한 모욕이지.’
첫째 날엔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둘째 날엔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어야 하며, 셋째 날엔 숙소에 누워서 노을을 구경해 줘야 한다. 남부 구경도 좀 하고 말이다.
그렇게 한 일주일 정도 펑펑 놀고 오고 싶지만…… 레이몬드 쪽 상황도 살펴야 하고, 북부에서 온 서류도 봐야 하니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선 안 된다.
생각을 마친 뒤, 짧게 숨을 들이마신 내가 결론을 내렸다.
“1박 2일로 가자.”
당일치기였던 처음 계획보다 고작 하루가 늘었다.
‘그래도, 그래도 당일치기보단 낫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리온 역시 내 표정에서 많은 감정을 읽었는지, 조금 전처럼 왜 이렇게 욕심이 없어졌냐는 말을 얹지 않았다.
“그럼 지금은 좀 쉬시고, 새벽에 바로 내빼는 거예요.”
“콜. 도주, 아니 휴가 비용은 다 내가 부담할 거니까 짐만 대충 챙겨서 만나는 거야.”
“네. 저는 말 두 마리 훔쳐 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리온이 집무실을 나섰다.
나는 한동안 그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후…….”
공작에게서 물려받은 도망과 배신의 유전자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리온이 나에게 새 숨을 불어넣은 기분이었다.
*
세오와 시즈가 저택에 돌아오기 전, 루나는 내 환자용 화장을 도왔는데, 핏기 없는 입술이 마음에 쏙 들었다. 혹시나 싶어 이마에 물도 몇 방울 찍었다.
내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코피를 흘리자 세오는 당황했고,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괜찮다고 더 일해도 된다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세오는 매번 리온 경과 뛰어노시길래 이렇게 몸이 약하실 줄 몰랐다고, 제발 방으로 돌아가 달라고 했다. 내 모습이 안쓰러웠나.
그나저나 그의 말에는 오해가 있었는데, 나는 리온과 뛰어논 게 아니다. 훈련 동안 리온이 나를 굴리고, 수업이 끝나면 내가 달려든 거지.
그는 내일부터 열심히 일하면 되니까 여긴 신경 쓰지 말고 오늘 하루 푹 쉬라고 했다.
‘어리석은 세오.’
내일이면 나는 이 저택에 없을 거다. 새벽에 내뺄 거니까.
나는 방으로 돌아가기 전, 가장 피가 많이 묻은 휴지 한 장을 황태자궁에 있는 칼바도스에게 보내 주었다. 그리고 방에서 시계를 원래대로 맞춘 다음, 편안하게 낮잠을 잤다.
*
늦저녁에 겨우 눈을 뜬 나는 수프 한 접시를 비웠다. 놀러 갈 생각에 기분이 좋아서 푸짐하게 한 상 가득 차려 먹을까 했지만 관뒀다. 공작저 음식으로 배를 채우기엔 아까웠기 때문이다.
공작저 음식은 매일 먹을 수 있지만 남부 음식은 아니니까.
‘놀러 가서 잔뜩 먹어야지.’
주방장에겐 미안하지만, 이 밍밍한 수프는 내가 남부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한 도움닫기에 불과하다.
루나는 식사를 마친 내게 우편물을 전해 주었다.
그중에는 칼바도스가 보낸 서신이 있었는데, 드디어 코피를 쏟은 거냐며, 코피를 흘린 걸 축하한다는 말과 부럽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휴지는 왜 보내냐고 욕할 줄 알았는데, 욕은 안 했네.’
저쪽도 바쁠 텐데 굳이 답장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칼바도스의 서신을 대충 접어 한쪽에 밀어 두었다.
그다음으로 확인한 건 세브리만 백작의 손자인 로버트 세브리만에게서 온 편지였는데, 내용을 보자마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상황을 보아하니 칼바도스와의 약혼이 깨진 것 같으니 위로주를 사겠다는 말이었다.
‘이 새끼는 눈치도 없고 싸가지도 없고…….’
더 읽어 볼 필요가 없었으므로 루나에게 로버트의 편지를 넘겼다.
“이건 그냥 태워 버려.”
“네, 아가씨.”
루나가 방을 떠나고, 나는 기분 전환을 위해 책상 위에 휴양지 정보가 실린 잡지 몇 권을 펼쳤다. 낙소, 오기아나, 유타스 등 남부의 여러 휴양지가 실려 있었는데, 그중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향락의 도시라 불리는 유타스였다.
‘놀러 가기엔 유타스 쪽이 가장 좋은데…….’
돌아오기 싫어질까 봐 가기 겁난다.
그러고 보니 유타스에 도박장이 있다고 했나?
카드를 만져 본 지 오래돼서 그런가, 손끝이 괜히 간지러웠다.
어렸을 때 루카스, 칼바도스와 함께 저택에서 카드 게임을 하려고 했는데, 그걸 본 슈아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엉엉 울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하던 카드랑 똑같다고 했다. 도박에 미쳐서 집에 들어오지 않은 아버지 생각이 난 것이다.
그래서 그 뒤로 루카스는 그 카드 게임을 하지 않았고, 나는 슈아의 앞에서 카드를 섞지 않았다.
게임을 해도 뒤에서 몰래 했고, 1년에 한두 번 가볍게 즐기는 정도였다. 명절날 식구들이 모여서 화투 치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에 칼바도스가 남부 쪽 도박장을 정리할 거라고 했지.’
그럼 칼바도스가 정리하기 전에 한 번 정도는 가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칼바도스한테 들키면 개망신이니까 몰래 가야 한다.
그렇게 나는 1박 2일 방문 코스에 도박장을 추가했다.
리온이 싫다고 하면 숙소에 두고 혼자 밤에 조용히 다녀오든가 하지 뭐.
나는 루나를 내보낸 뒤 가방 하나를 꺼내 짐을 쌌다. 잘 때 입을 옷 한 벌이랑, 다음 날 입을 옷 한 벌……. 그리고 언제나처럼 장검 하나를 챙기고 돈도 여유 있게 챙겼다.
혹시 도주 계획을 들킬지도 모르니, 출발 전까지 짐가방을 침대 아래 숨겨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부푼 마음으로 새벽을 기다렸고, 리온과 약속한 시간이 되자마자 짐가방을 들고 방을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