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공녀는 살고 싶다 (72)화 (72/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72화

“너무하네. 그래도 나는 네가 페르데니아라는 걸 잊지 않고 황족 대우를 해 줬는데.”

“대체 언제 황족 대우를 해 줬어? 나 자고 있을 때?”

칼바도스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칼바도스가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나는 그를 무시하고 루나에게 레이델을 불러오라 지시했다. 하지만 칼바도스가 이를 제지했다.

“아직 부르지 마.”

“에녹 헤르트 대동 필수라며?”

“그 전에 따로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레이델 몰래 해야 할 이야기가 있던가?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지만 나는 바로 근처에 있던 하인들을 물렸다. 그제야 칼바도스가 입을 뗐다.

“레이몬드 메릴이 델소스 섬으로 향하는 게 확인됐어.”

그 말을 듣기 무섭게 표정이 구겨졌다.

후작저로 보내 둔 사람에게서도 연락이 없었고, 레이몬드에게서도 특별한 연락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델소스 섬이라니.

레이몬드가 왜 거기 있지?

델소스 섬은 약 200년 전 제국 영토로 편입된 곳인데, 현재는 메릴 후작의 소유 아래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섬사람들이 난을 일으켜 후작가에서 진압하느라 진을 좀 뺐던 곳이기도 하다.

‘그 바람에 사람들이 많이 죽었댔지.’

그런데 후작저에서만 지내는 줄 알았던 레이몬드가, 내게 아무 언질도 없이 피바람이 불었던 델소스 섬으로 갔다.

“표정을 보아하니 레이몬드 메릴에게선 아직 아무 연락도 없었던 모양이지?”

“후작저에 심어 둔 사람이 있어. 확인해 볼게.”

“아직까지 별다른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배신했을지도 몰라. 네가 심어 둔 사람도, 레이몬드도.”

이 이야기 때문에 레이델을 부르지 말라고 한 거구나.

나는 뒤늦게서야 칼바도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섣부르게 레이몬드의 배신을 의심했다가, 레이델이 우리 쪽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형은 아니에요! 하면서 레이델이 뛰쳐나가면 곤란해지는 건 우리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동생을 배신할 사람이던가.

‘그’ 레이몬드다. 소설에서 그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동생이 자살했다고 믿어서 동생을 따라 목숨을 버리려 했다.

“그럴 사람 아니야.”

다른 건 다 버려도 동생은 못 버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칼바도스가 냉정하게 말했다.

“9년이 지났어. 그동안 제대로 만나 본 적도 없고. 후작 쪽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발견한 것도 우리가 먼저지. 우리 쪽에선 레이몬드 메릴이 배신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둬야 해.”

에이씨…… 괜히 사람 심란하게.

그럴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지만, 칼바도스의 말을 듣자 조금 심란해졌다. 후작저에 보내 둔 사람에게서 연락이 없던 게 거슬리기도 했고.

가능한 빨리 연락을 취해 봐야겠다.

*

잠시 뒤, 나는 루나에게 레이델을 데려오라 지시했고, 칼바도스를 본 레이델이 질린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얼마 전까지 한 방을 쓰던 사이였으니 얼굴 보기 질릴 만도 했다.

게다가 레이델은 혼자 있기 싫다는 칼바도스 때문에 일주일이나 늦게 집으로 돌아왔으니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도박장 문제 때문에.”

칼바도스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덕분에 칼바도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려던 레이델은, 칼바도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라면 남부 쪽이 심각하지 않습니까?”

“어. 그래서 남부 쪽에 방문할 생각이야. 보여 주기식으로.”

아, 이래서 레이델을 데리고 오라고 했구나?

칼바도스는 남부에 갈 때 레이델을 데려가려는 심산이다. 레이델보다 먼저 그의 속을 알아챈 내가 입을 열었다.

“같이 가지그래? 요즘 우리 에녹 경은 매우 한가해 보이던데.”

“……공녀님? 그게 무슨-”

“한가하다고? 마침 잘됐군.”

타이밍 좋게 들어온 칼바도스가 바로 말을 얹었다.

“이 기회에 영웅 에녹이 황태자의 수하라는 걸 보여 주고, 황태자가 영웅의 뒷배라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 줘야지.”

“아니, 하-”

“그렇지 않나? 에녹 경.”

그렇게 레이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칼바도스의 레이델 소환 일정이 정해졌다.

옆에 앉은 레이델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낯짝이 두꺼운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태연하게 그 시선을 받아들였다.

“공녀님,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원망 섞인 그의 목소리에, 나는 영혼 없이 답했다.

“그냥…… 너 요즘 보니까 계속 방에서 쉬고 있더라. 사람이 방 안에만 있으면 썩어. 가끔은 밖에서 맑은 공기도 좀 마셔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이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니까, 저를 걱정하신 거군요?”

“그렇지,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레이델이 혼자 노는 걸 보니 배가 아파서 그런 것이다.

레이델의 말을 들은 칼바도스는, 어떻게 그런 해석을 할 수 있냐며, 저런 신박한 해석을 하는 것도 재주라고 레이델을 실컷 칭찬해 주었다. 꼭 통번역 일을 하라고 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저녁 식사를 마친 칼바도스는 곱게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에게 배웅을 구걸했다.

“마차까지 나 좀 배웅해 주지?”

“제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경은 나를 사랑하나? 왜 자꾸 나랑 붙어 있으려고 지랄, 아니 안달이야.”

“배웅이 사랑의 표현입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공녀님께 배웅을 요구하셔선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지랄이라고 하시는 거 다 들었습니다.”

‘쟤 나한테 할 말 있나 보네.’

조금 전부터 계속 따로 할 말이 있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으니 내가 배웅을 해야 했다. 아까처럼 레이델 앞에선 못 할 말이라 저러는 것 같았다.

“됐다, 내가 가야지.”

어서 나가자며 칼바도스의 등을 툭툭 치자, 그가 씩 웃으며 나를 따라왔다.

하지만 칼바도스는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말없이 그를 기다려 줬다. 그렇게 조용히 걷고 있던 그때,

“야, 미안.”

이 미친놈이 갑자기 사과를 했다.

이 자식이 아까부터 왜 이러지?

갑자기 사과를 한 놈치고는 표정이 너무 평온하고 고요했다. 나는 칼바도스를 보며 표정을 구겼다.

“왜 또 사과야? 안 어울리게……. 어디 아프냐?”

기껏 사과했더니 환자 취급을 받아 어이가 없었나 보다. 칼바도스가 기가 찬다는 투로 되물었다.

“나는 뭐, 아파야만 사과를 하는 사람이야?”

“그럼 나한테 실수한 거 있어?”

“어. 엄청 예전에.”

“뭔데?”

숨을 쉬고 있는 것 자체가 잘못이긴 한데……. 어쨌든 자존심 센 그가 ‘엄청 예전 일’을 가지고 자진해서 사과를 하겠다니, 얌전히 들어 주기로 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뒤, 칼바도스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당연하지. 도자기 깨쳐 먹어서 벌 받은 날이잖아. 한참 동안 손잡고 있었지, 아마? 아, 네가 날 버리고 미로 정원으로 도망친 날이기도 하고.”

황제가 내린 벌은 거지 같았지만, 정원에 숨어 있던 그의 모습이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그땐 칼바도스 성격도 엄청 더러웠지.’

하지만 돌아온 것은 칼바도스의 침묵이었다.

놀리려고 한 말이었으나, 칼바도스는 발끈하지도 않았고 나를 따라 웃지 않았다.

아, 설마 도망친 일을 사과하려는 건가?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무게 잡긴.’

그러나 칼바도스의 입에선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때, 네가 싫다고 말해서 미안해.”

그 말을 듣기 무섭게, 귀가 찢어질 듯 외치는 칼바도스의 어린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기 시작했다.

‘대체 왜 도망간 거야?’

‘도망이라니! 나는 그냥…… 네가 싫어!’

그리고 그의 사과를 들은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뭐……? 야, 그게 대체 언제 적 일이야? 뭐 그런 걸 가지고 사과하고 그래? 난 이제 기억도 안 나.”

“방금 물어봤을 땐 잘만 기억하던데, 뭘.”

‘지금도 내가 싫어?’

‘……싫지 않아.’

그래, 잘 기억한다. 그래서 나중엔 내가 싫지 않다고 말한 것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고 사과하는 게 기가 막혀서, 입 밖으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 나중엔 싫지 않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난 신경 안 써.”

“싫다에서 싫지 않다로 답을 정정했을 뿐이지, 나는 그때 너한테 사과하지 않았잖아. 나는 그날 너한테 바로 사과했어야 해.”

‘이 새끼가 왜 이러지……?’

물론 면전에서 싫다는 말을 들은 그때 당시엔 조금 충격을 받았지만, 싫지 않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네가 싫다고 말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받는 이 상황이 끔찍하게 어색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동안 이런 일로 사과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네가 싫냐는 너의 질문에, 싫지 않다고만 답한 걸 후회해. 분명 더 좋은 답이 있었을 텐데.”

“아니, 나는 그걸로 충분했어. 진짜야.”

나는 ‘싫다’라는 말을 완벽하게 부정하는 그의 답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칼바도스는 이상할 정도로 그 말을 후회하고 있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을 담아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후회하지 마. 후회할 시간에 재밌게 놀기나 하자.”

앞으로 남은 날이 긴데, 그 긴 시간 동안 후회를 하는 건 너무 아깝지.

“이젠 다른 답을 찾을 기회도 안 주네. 후회할 기회도 뺏어 가고.”

너무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칼바도스가 웃었다.

칼바도스가 마차에 오르고, 내가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작게 열린 창틈으로 칼바도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냥 카인 리베르트한테 후계자 자리 넘기면 안 되냐? 아직 정식으로 마탑에 들어간 것도 아니잖아.”

“그럼 오빠한테 후계자 자리 넘긴 나는 뭐 하라고?”

“너는 계속 나랑 노는 거지. 지금처럼, 변함없이.”

솔직히 지금 심정으론 다 때려치우고 놀고 싶긴 하다. 하지만 나의 가벼운 변덕과 투정 때문에 카인에게 후계자 자리를 떠넘길 순 없는 일이다.

“어떤 변화가 있어도 우린 계속 같이 놀 텐데, 뭐. 지금처럼, 변함없이.”

“그런가.”

앞으로도 계속 같이 놀 거라는 내 말에 칼바도스가 담백하게 웃었다.

“가끔 보면 도스 너는 변화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게 갑자기 남 탓을…….’

눈을 흘기는 것도 잠시, 칼바도스는 곧 평소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이만 갈게. 소공작 임명 미리 축하하고.”

“축하는 말로 하지 말고 돈으로 해.”

“너를 보면…… 있는 것들이 더 한다는 말이 생각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칼바도스의 머리를 마차 안에 밀어 넣었고, 뒤따르던 칼바도스의 두 호위가 머쓱하게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