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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71)화 (71/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71화

“……내가 뭘 맡았다고?”

현실을 받아들이느니 내 귀를 의심하는 쪽이 나았다.

“공작 직무 대리요. 설마 전달 못 받으셨습니까?”

“들어본 적도 없어……!”

칼바도스와 약혼설, 그리고 낮황밤영설 이후로 가장 충격을 받은 날이다.

‘공작 대리 직무라니!’

“아버지께선 어디 가신 거야?”

“마님과 동부 백작저로 내려가셨습니다만.”

“뭐라고?!”

이런 거지 같은!

공작이 나를 대리로 세워 두고, 공작 부인과 함께 휴양지로 내뺐다. 이번엔 분명 내가 백작저에 갈 차례인데도 말이다.

피가 섞인 가족에게 배신당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가슴 아픈 일이군.

배신당한 역사 속 인물들의 심정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공작에게 얻어맞은 뒤통수가 지끈거려서 나도 모르게 몸을 휘청였다.

세오가 그런 나를 말없이 부축했는데, 가족애를 상실한 나에겐 그 부축이 참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괜히 세오를 붙잡고 물었다.

“내가 아직 정식 후계자도 아닌데…… 이건 너무 이른 처사가 아닐까?”

“두 분께서 그런 생각을 하시지 않게, 공녀님을 잘 보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배신감과 허탈감에 썩은 동태 눈을 한 나와 달리, 세오의 맑은 두 눈에는 리베르트를 향한 충성심이 가득 묻어났다.

“지금부터 제가 최선을 다해 공녀님을 보좌하겠습니다. 저의 여름을…… 공녀님과 리베르트 가문에 바치겠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론 당장 가지고 꺼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미쳤다고 여름을 바쳐? 나를 쪄 죽일 셈인가.

기분이 상해서 그런지 그 어떤 말도 곱게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내 마음이 삐뚤어졌냐면, 지구가 둥글다는 말에 시비를 걸 정도다.

배신의 상처가 이렇게 크다.

“하아…….”

“그럼 집무실로 가실까요? 공녀님의 수행원인 시즈 경의 책상도 옮겨 두었습니다.”

실컷 놀고 와서 일에 찌든 칼바도스를 놀려 줄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마른하늘에는 날벼락이 치고 있고, 공작은 내 뒤통수를 치고 있다.

그렇게 내 완벽한 여름 계획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

대리직을 맡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공작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어떻게 아무 말도 없이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배신감이 쩐다고, 아버지는 작년에 다녀오지 않았냐고.

그런 내용을 최대한 곱게 돌려 썼다.

하지만 답장을 받은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공작과 공작 부인은 이미 나에게 대리 직무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방학 첫날, 셀레네와 율리안을 공작저에 데려왔을 때라고 한다.

‘그냥, 언젠가 제가 아버지 뒤를 잇는다는 게 실감이 안 나서요.’

‘실감이 안 난다면 이번 여름에 대리…….’

대충 그날의 대화를 떠올려 보니, 이야기한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뒷말을 못 들었다.

아마 신의 아들이 죽은 호수 때문에 정신이 없었겠지.

‘아니, 그래도 떠나기 전에 나한테 말을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두 사람이 말없이 동쪽으로 떠난 이유가 눈에 들어왔다.

“허…….”

최근 놀기 바쁜 내 행실을 보니, 곱게 말하면 대리직을 거절할 것 같아서 나한테 대리직을 냅다 던져 주고 동부로 도망친 것이라고 한다.

‘곱게 말해도 했을 텐데.’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을 대체 뭘로 보시는 건지.

나는 두 사람의 편지를 접었다. 그리고 직무 기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테니 백작저에서 편히 쉬고 돌아오시라는 답장을 썼다. 세오가 있어 든든하다며 그의 충성심을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짜증도 이만하면 충분히 냈으니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나는 펜을 들었고, 그날 이후 점점 나의 생활 패턴이 고정되기 시작했다. 기상 시간과 취침 시간은 일정해졌고, 방과 집무실만 돌아다니니 이동 동선이 축소되었다.

집무실에서 내내 서류 작업을 하던 나는 새삼 여름의 장점을 하나 깨달았는데, 여름의 장점은 낮이 길다는 것이다.

‘6신데 아직 밝네.’

오후 6시였지만 해가 쨍쨍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4시라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아침부터 오후 6시까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울해지기 때문이다. 영리한 우리 세오 경은 내 앞에 놓인 탁상시계를 2시간 앞으로 돌려 주었다.

그리고 잠시 뒤,

‘6시 퇴근이다!’

6시에 퇴근한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실제로는 8시겠지만, 나는 6시라고 믿기로 했다. 이 좋은 날 8시까지 집무실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하느니, 그쪽이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세오와 시즈가 건넨 다음 날 일정표를 확인했다.

“……내일은 극단 사업 보고일이네.”

공작 대리직만 맡는 거면 모를까, 대리 직무에 더해 극단 사업 보고가 들어오는 날은 일정이 늘어나 더욱 바빠졌다.

‘인생 참 거지 같다.’

내가 성인이 된 뒤, 공작은 나에게 가벼운 업무 몇 가지를 맛보기식으로 넘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나는 내가 시험 삼아 해 보기 좋은 일 같다며 공작이 나를 위해 남겨 둔 일들과, 본래 공작이 해야 하는 일을 한 번에 처리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렀고, 남들보다 2시간 느린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질 때쯤이었다.

나는 루나가 가져온 커피를 마시며 칼바도스에게서 온 서신을 확인했다.

[이틀 뒤 저녁 6시에 방문 예정. 할 이야기도 있고. 에녹 헤르트 대동 필수.]

초점을 잃고 반쯤 감겨 있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이틀 뒤에 온다고?’

칼바도스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놀란 게 아니다.

이건 기회다.

황족을 대접해야 하니, 그날 오후엔 일정을 비워야겠지.

즉, 칼바도스를 핑계로 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먹먹하게 칼바도스의 편지를 바라보다가 그 편지를 끌어안았다.

‘내가 이 맛에 얘랑 친구 하지.’

내 생애 이렇게까지 칼바도스를 반긴 날은 없었는데. 9년 동안 못 느꼈던 친구 사랑을 지금에서야 느끼고 있었다.

“세오 경, 이틀 뒤 내 오후 일정은 비워 둬. 황태자 전하께서 저택에 방문하실 거야.”

“……황태자 전하께서 말입니까?”

황태자가 공작저에 방문해서 신나게 놀고 간 모습만을 봐 온 세오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 황태자 전하께서 나에게 긴히 할 말씀이 있으시다는데, 신하 된 자로서, 그리고 벗으로서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나.”

세오의 눈빛이 따끔한 회초리처럼 느껴져서,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거, 사람이 바깥일 좀 하겠다는데 눈치 주기는…….

공작과 공작 부인이 세오 경을 남겨 두고 간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

이틀 뒤 저녁, 칼바도스는 간단하게 호위 둘을 데리고 공작저에 방문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었다.

“아주 좋은 술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겠다며?”

귀족들을 불러 꽃꽂이를 하고 있을 때 분명 그렇게 말했으면서. 칼바도스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내 핀잔에 칼바도스는 텅 비어 있는 제 손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짧게 사과했다.

“……아, 깜빡했다. 미안.”

얘가, 얘가 왜 갑자기 나한테 사과를 하는 거지……?

‘이런 놈이 아닌데.’

칼바도스의 사과를 듣고 당황한 내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뭐야, 왜 사과해? 미쳤어?”

“……내가 지금 너한테 사과했어?”

이젠 자기가 사과한 것도 모른다. 정신을 빼 놓고 다니는 게 틀림없다.

이런 상태로는 일하면 안 되지 않나? 나는 칼바도스를 보며 혀를 찼다.

눈 밑이 퀭한 걸 보니, 이 녀석도 나 못지않게 피곤한 모양이다. 여름부터 바빠질 거라는 칼바도스의 말은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다.

“거울은 봤어? 도스 너, 눈 밑이 까매.”

“그래? 그럼 이제 사교계에선 새로운 화장법이 유행하겠네. 부러 눈 밑을 검게 칠하고 다니는 사람이 나타나겠지.”

“우리 집에서 헛소리하지 마…….”

하지만 칼바도스는 내 말에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내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재수 없는 얼굴로 히죽거렸다.

“너, 공작 대리직 수행 중이라며?”

“어.”

아버지의 배신을 떠올리자 손끝이 차가워졌다.

표정이 굳어 버린 나와 달리 칼바도스에 부드러운 곡선이 자리를 잡았다. 입꼬리도 둥글, 눈가도 둥글. 온 곳이 곡선이었다.

조금 전까지 퀭했던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내 양분을 빨아먹은 게 틀림없다.

“그렇게 내 앞에서 여행 계획 세우더니, 꼴 좋다. 에녹 그 녀석과 여행은 물 건너갔겠어.”

“……재밌지, 지금?”

“어. 네가 괴로워하는 걸 보니까 너무 기분이 좋다. 너희 둘이 여행 못 가는 건 더 좋고.”

나는 칼바도스를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칼바도스는 익숙하게 나를 따라왔고, 저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편하게 앉았다. 그의 맞은편 소파에 걸터앉은 내가 힘없이 말했다.

“이것도 못 할 짓이네. 이번 겨울은 영영 안 왔으면 좋겠어.”

“이번 겨울은 왜?”

“리베르트는 후계자를 겨울 동안 북부에 보내는 관행이 있잖아. 이번에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면 북부에 가게 될 텐데-”

“……네가 후계자가 된다고?”

칼바도스의 눈이 커졌다.

“어. 그런데 내가 후계자가 된다는 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야?”

1황자였던 칼바도스는 황태자가 되었고, 이제는 황제가 될 미래를 그린다. 그러니 공녀인 내가 소공작이 되고, 공작이 되는 것 역시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그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한 쪽이 진부하고 이상한 거지.

“그랬지, 참. 너는 리베르트였어.”

칼바도스는 내가 공작이 될 가능성을 까맣게 잊고 지낸 사람처럼 굴었다.

뭐…… 나도 예전에 부잣집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자기 아버지 뒤를 잇는다는 사실을 거의 잊다시피 했다. 칼바도스도 나처럼 그런 것 같았다.

칼바도스는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내가 네 이름 뒤에 자리 잡은 성을 잊고 있었나 봐. 등신같이.”

스스로를 비웃는 듯한 미소가 오랫동안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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