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70화
“공녀,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그대는 리베르트 가문의 명예를 지킬 의무가 있잖아요. 그런데 대낮부터 호텔에서 이런 행동은 너무-”
어느 순간부터 셀레네는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셀레네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 공주님. 이 방에 어떤 사람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 있으세요?”
“당연하죠. 난 유리뿐이에요.”
그녀는 언제나처럼 또렷한 눈으로 답할 뿐이었다.
두고 봅시다, 어디.
그렇게 읊조린 내가 망설임 없이 308호의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나야, 열지.”
문에서 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바로 문이 열렸다.
그리고 막 피어난 봄의 꽃처럼 청초한 분위기의 여인이 나를 반겼다.
“오셨어요, 공녀님!”
라티아와 내가 서로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녀에게선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났다.
“잘 쉬고 있었어? 벨라는?”
“죄송합니다. 앉으실 곳을 정리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뒤늦게 안쪽에서 걸어 나온 벨라가 나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동생인 라티아는 명랑했고, 언니인 벨라는 고요했다. 자매가 이렇게 달랐다.
셀레네의 시선이 한곳에서 멎었다.
그녀의 시선은 라티아를 향해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라티아를 응시하던 그녀의 입에서 어느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스테리아……?”
그것은 얼마 전 라티아가 맡은 배역의 이름이자, 소설 <살인자와 영혼>의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뒤늦게 눈앞의 광경이 현실임을 자각한 그녀가 내 팔을 붙잡았다.
“공녀, 이게 무슨…….”
“팬이라고 하셨잖아요? 평소 친분이 있는 이들이라 자리를 마련해 봤습니다.”
조만간 라티아와 벨라를 만나기로 약속도 했었고.
내 팔을 붙잡은 셀레네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귀여운 수준이라 내버려 뒀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라티아와 벨라가 고개를 숙였다.
“시몬의 공주님을 뵙습니다. 라티아입니다.”
“저는 벨라라고 합니다. 공녀님의 서신을 받고 공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헙……!”
셀레네는 하얀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아, 입 밖으로 튀어나와야 할 감격을 제 안에 가두었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겠다는 셀레네의 말이 떠오른 내가 작게 물었다.
“조금은 흔들리셨을까요?”
“이건 내가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뒤집힌 수준인데…….”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깨달은 그녀가 서서히 팔을 붙잡은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내 눈치를 보았다.
“왜 굳이 호텔에서 만나는 거예요? 괜히 오해했잖아요…… 미안하게.”
유명인인 라티아를 밖에서 만나면 사람들이 계속 그녀를 힐끔거려서, 내 쪽이 다 피곤했기 때문이다. 가게를 하루 빌릴까 했지만, 가게보단 편하게 뒹굴 곳이 필요해서 호텔을 잡았다.
솔직하게 말할까 했지만, 라티아에 관한 이유는 빼고 말하기로 했다. 자기 때문에 밖에서 마음 편하게 못 논다고 미안해할 것 같았다.
“여기 식사가 괜찮아서요. 가끔은 집 말고 다른 곳에서 쉬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정확히 어떤 오해를 하셨나요?”
“그, 그러니까…… 공녀가…….”
당황해서 삐걱거리는 공주를 보니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나는 셀레네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성적으로 문란한 생각 하셨구나? 제가 헝겊 같은 옷을 걸친 남자들을 불러 놓은 줄 아셨죠? 하하!”
“공녀……!”
정곡을 찔렀는지 셀레네의 귀 끝이 붉어졌다. 실은 그 반응이 재밌어서 일부러 방으로 올라가는 내내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셀레네는 참 귀여웠다. 놀렸을 때 반응도 칼바도스 못지않게 재미있고.
이래서 칼바도스와 율리안이 그녀를 사랑한 건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저랑 이러실 시간이 있나요? 벨라와 라티아가 눈앞에 있는데.”
“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시 생각해 보라며 나를 말리던 셀레네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방 안에 들어갔다.
나는 라티아와 벨라를 보낸 뒤, 뒤따라온 리온에게 열쇠 하나를 쥐여 주었다. 리온은 열쇠를 직접 확인하는 대신, 내 손을 잡은 채 물었다.
“이건 뭡니까?”
“307호 열쇠.”
“이건 왜 주시는데요?”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옆 방에서 편하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마차는 기다리기 불편하잖아. 경이 심심할 것 같으면 내가 그 방에 놀러 가 줄게.”
아직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나지막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싫다는 제 말이 먹힌 모양입니다.”
“미안하지만 그 말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
“속상하네…… 전 침대에 엎드려 울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손수건 챙겨 갈게.”
나는 리온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며 문을 걸어 잠갔다.
그와의 짧은 대화를 끝마치고 나서야 방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처음보다 커진 셀레네의 목소리에 의아함을 느낀 내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벨라의 옆자리에는 셀레네가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은 라티아와 내 자리였다. 나는 라티아의 옆에 앉아 내 앞에 놓인 과자 하나를 입에 넣었다.
“내가 그대의 소설을 정말 좋아해! 내 궁의 책장에는 그대의 첫 작인 <인어가 숨은 바다>부터, 가장 최근에 낸 작품인 <살인자와 영혼>까지 전부 꽂혀 있어. 작가 아스테리아가 집필 중인 추리 소설의 뒷 내용을 완성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하는데…… 그 끝이 자살일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어!”
뭐, 뭐야? 당신 누구야? 당신 셀레네 아니지? 셀레네의 탈을 뒤집어쓴 래퍼 아냐?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셀레네를 바라보았다. 잠시 숨을 고른 셀레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주인공인 아스테리아는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책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작가인 그대는 아스테리아의 죽음으로 이 이야기를 완성했다는 평론을 보고 얼마나 소름이 돋았는지 몰라!!! 아스테리아가 시계를 보는 직접적인 묘사가 13번, 그리고 간접적인 묘사가 5번 등장하던데 어떻게든 이야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집착과 압박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쓰였다고 해석해도 되는 건가?”
벨라가 앉은 쪽으로 살짝 몸을 튼 셀레네가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벨라를 찬양했다.
나는 셀레네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아니, 소설에서도 이렇게 말 많은 셀레네는 본 기억이 없었다. 내뱉는 단어 사이사이로 광기가 느껴졌다.
당황한 나와 달리, 벨라는 셀레네의 반응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모습을 유지했다.
“제 책을 이미 다 가지고 계시다고요?”
“당연한 말을!”
“혹시나 싶어 가져왔습니다만…… 이미 다 가지고 계시다니. 그럼 이것들은 필요 없으시겠군요.”
뭘 말하는 거지? 나는 그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벨라는 곧 묵직해 보이는 가방 속에서 여러 권의 책을 꺼냈다.
첫 작품인 <인어가 숨은 바다>부터 가장 최근 작품인 <살인자와 영혼>까지, 그녀가 집필한 소설의 전권이었는데, 속지에는 그녀의 사인이 실려 있는 한정판이었다.
사인을 본 셀레네의 동공이 무서울 정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인……? 설마 나한테 주려고? 나를 위해서?”
“공주님이 아니면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책을 다 가지고 있다는 셀레네의 말에, 벨라가 책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으려던 순간이었다.
“자, 잠깐!”
“네?”
“워, 원래 책은 관상용을 따로 구매해야 하잖아?”
셀레네가 다급하게 벨라의 손을 붙잡았다.
“왕국에 있는 책은 직접 읽는 용도라, 관상용으로 한 권씩 더 구입하려던 참이었어!”
그러니까 제발 너의 사인본을 달라.
거의 구걸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셀레네는 벨라의 손안에서 놀아나고 있었고, 벨라는 능숙하게 손 위에서 셀레네를 굴렸다. 과연, 카사노바였던 배우 로버트가 벨라에게 목을 맬 만했다.
그렇게 겨우 벨라의 책을 얻어 낸 셀레네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한참 동안 책을 바라보던 그녀는 겨우 정신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라티아를 찬사하기 시작했다.
“연기가 정말 인상 깊었어. 아스테리아의 정신이 점점 피폐해져 가면서도 살인에 중독되는 과정을 어쩜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지! 극을 보는 내내 칼 위를 걷는 기분이었어! 죄가 늘어날 때마다 무대에 설치된 저울이 조금씩 기울더군. 잡지에 실린 인터뷰를 읽어 보니 그대가 낸 아이디어였다며? 정말 굉장해! 아 참, 내가 따로 사람을 보내 브로치를 선물했는데…… 혹시 받았나?”
브로치?
짐작 가는 바가 있었는지 라티아가 바로 되물었다.
“혹시 그 초승달 모양의 브로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셀레네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선물한 분이 공주님이셨군요! 얼마 전에 그 브로치를 차고 공녀님과 식사도 했어요!”
‘이거 보세요. 부모님 몰래 제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이 편지랑 같이 선물로 보낸 거예요. ’
‘저희 언니 책을 재밌게 읽었나 봐요.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어요.’
공작저에서 라티아와 식사를 한 날, 그녀의 한쪽 가슴을 장식한 초승달 모양의 브로치가 떠올랐다.
‘그 브로치를 선물한 게 셀레네였다니.’
누가 봐도 값비싼 물건 같아서 왕국의 귀족이 선물한 것이라 예측했었건만. 설마 공주였을 줄이야.
“라티아가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제 귀를 자르고 싶었습니다. 배우의 입을 꿰맬 수는 없으니까요.”
“귀족인 공녀님께서 귀를 자르시면 아니 될 일이지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한 위치라고, 공녀님께서 이전번에 그리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러니 아무리 자르고 싶으셔도 참아 주세요.”
라티아는 내 쪽을 보며 귀엽게 봐 달라며 웃었다.
얘가 지금 누굴 꼬셔.
흥, 목소리가 꾀꼬리 같아서 귀엽게 봐 주기로 했다.
역시 이 자매는 사람을 홀리는 데 뭔가가 있다.
자매에게 완전히 넘어간 셀레네는 두 사람의 손바닥 위에서 굴러다녔고, 나는 넘어갈 뻔한 것을 꾹 참았다.
*
아, 이거 며칠 동안 정말 잘 놀았다. 근래에 나보다 알차게 논 사람은 없을 정도다.
이제 공작 부인과 함께 동부 백작저로 떠난 다음, 편히 쉴 일만 남았다.
‘바다 구경해야지!’
관광지도 돌아보고.
공작 부인이 나에게 휴가 일정을 설명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뭐, 내가 먼저 가서 물어보면 되겠지.’
생활 패턴이 틀어져 오전 11시에 눈을 뜬 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려가는 것도 귀찮아서 방에서 식사를 한 뒤,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었을 때였다.
똑똑―
“공녀님, 세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을 두드린 이는 공작의 보좌관이었다.
‘저놈이 왜 아침부터 나를 찾지?’
의문도 잠시, 나에게만 이른 아침이란 것을 뒤늦게 깨달은 내가 그의 출입을 허락했다.
물빛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그가 나를 살폈다.
“세오 경?”
“방금 기상하셨습니까? 제시간에 내려오지 않으셔서 걱정했습니다.”
“제시간이라니? 그보다 경이 왜 나를 기다리는데?”
당황한 나와 달리 세오는 평소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그거야 오늘부터 공녀님께서 공작 직무 대리를 맡으셨으니까요.”
“?”
이게 무슨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