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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69)화 (69/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69화

“황, 황태자 전하?”

예고도 없이 황태자를 만난 귀족들의 눈이 커졌다.

“전하를 뵙습니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칼바도스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칼바도스는 사석에서 이럴 것 없다며 태양 같은 미소를 선사했다.

레이델에게서 칼바도스의 방문을 전해 들은 내가 태연하게 말했다.

“에녹 경을 만나러 오셨지요?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나는 분명 에녹 경을 만나러 가고 있었는데…… 왜 여기 서 있는지 모르겠군.”

나한테 인사를 하러 온 게 아니었나? 그런데 왜 여기 서 있는지 모르겠다니.

그는 꼭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전하께선 장미를 좋아하셨지요. 이왕 여기까지 오신 거 한 송이 드리겠습니다. 챙겨 가시죠.”

한참 재밌었는데 칼바도스가 와서 흥이 식었다.

나는 더 이상 모임을 방해하지 말고 빨리 꺼지란 뜻을 담아 칼바도스의 옷 앞주머니에 노란 장미 한 송이를 꽂아 주었다.

옅게 헛웃음 소리를 낸 그는 바로 자리를 떠나는 대신, 내 앞에 놓인 화병을 보고 시비를 걸었다.

“그런데…… 공녀는 화병에 꽃을 담는 것보다 술을 담는 것을 좋아하지 않나? 내가 아는 모습과는 다르군.”

저 개자식이 왜 시비지?

그리고는 가만히 있는 셀레네에게 귓속말을 하듯 물었다.

“공주. 여기 있는 이 사람이 정말 엘렌시아 리베르트가 맞습니까? 내 친구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괴수가 아니라?”

말이 귓속말이었지, 말소리는 평소와 똑같아서 다 들렸다.

능청스러운 그의 모습에 셀레네와 귀족들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나는 화병으로 칼바도스의 머리를 내리치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눌렀다.

“제가 병에 담는 것은 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술을 마실 기대 또한 함께 담는 것이고요.”

“그래? 그럼 다음번에 나는 아주 좋은 술을 가지고 공녀를 찾아야겠네. 마음과 기대를 가득 담아서.”

그 말은 내가 칼바도스에게 좋은 사람임을 뜻했다. 실컷 엿 먹이다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마무리하며 내빼려는 심산이다.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어. 에녹 경이 기다리고 있겠군.”

예상대로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마친 그는, 오른쪽 가슴 쪽에 노란 꽃을 꽂은 채로 자리를 떠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혀를 차는데, 양 옆자리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들 웃어?”

“전하께선 저희와 동갑이어도 한참 어른 같다고 생각했는데, 제 생각보다 조금, 음…….”

말을 잇기 애매했는지 크리에타가 말끝을 흐렸다.

“유치한 구석이 있다고?”

“……네. 전하껜 비밀로 해 주세요.”

칼바도스가 유치하다는 걸 이제야 알다니. 눈치 좋다는 말 취소다.

아니지, 그동안 칼바도스가 떨어온 가식과 대외용 미소를 생각하면 사람들이 오해할 만도 했다.

‘그놈이 이미지 관리를 철저하게 하긴 했지.’

남들 앞에선 자애롭고 다정한 척이 심했다. 연회에서도 온갖 폼을 다 잡았던 칼바도스를 떠올리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그런 내 웃음을 잘못 해석한 피오나와 룬다가 한마디를 얹었다.

“전하께선 공녀님 앞에서만 솔직해지시는 것 같아요.”

“정말 전하와 약혼 안 하시나요? 틀림없이 전하께서 공녀님께 마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칼바도스가 나한테 마음이 있어 보인다고?

‘눈이 삐었군.’

“약혼이라니……. 내가 그럴 일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하나?”

이마에 아니라고 써 붙이고 다니면 그때서야 알아줄 건가?

“다들 처음에는 아니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청첩장을 돌리길래……. 공녀님도 그러실 줄 알고…….”

‘에이씨,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그러는 거야?’

괜히 나까지 억울하게.

속이 활활 타는 바람에 나는 가슴을 쿵쿵 내리쳤다.

그나저나 루카스도 분명 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한 명 있었던 것 같고.’

그게 누구였지?

이쯤 되니 정말 누가 그랬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런 사람이 꽤 많은가?”

“그…… 누구였죠? 남배우 중에요, 처음엔 그렇게 안 사귄다고 하더니, 어떤 작가랑 결혼한 사람 있잖아요. 머리가 되게 붉었는데…….”

‘아.’

그 말을 들으니 이제야 생각이 났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잡아떼다가 결혼에 골인한 내 주변 사람이.

짐작 가는 사람이 있었는지 셀레네가 작게 손뼉을 쳤다.

“아, 로버트를 말하는 거죠? 연극 <영웅과 운명>에서 주인공을 맡은!”

“맞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지, 참.”

나는 로버트와 그의 아내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로버트란 이름을 입에 올리며 두 눈을 반짝이는 셀레네를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도 셀레네가 배우들한테 관심이 많았나?’

책을 좋아했던 것 같긴 하지만, 배우를 좋아한다는 말은 없었다.

그녀가 로버트 같은 남자 배우를 열정적으로 좋아했다면, 남주인공인 칼바도스나 서브남주인 율리안이 질투하는 장면이 한 번쯤은 나왔을 텐데…… 그런 장면도 없었고.

그 묘한 차이를 눈치채자마자, 마음 한구석이 굉장히 찝찝해졌다.

나는 그 찝찝함을 바로 잡기 위해 최대한 돌려서 물었다.

“공주님께선 로버트의 팬이신가요? 만약 그러신 거라면 제가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볼게요.”

내 제안에 셀레네가 손사래를 쳤다. 손에는 커다란 꽃 한 송이가 들린 채였다.

“아,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러고는 잘 익은 딸기처럼 잔뜩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고백했다.

“사실 나는 로버트가 아니라…… 로버트와 결혼한 작가의 팬이거든요.”

로버트가 아니라 그 아내의 팬이라고?

‘……말도 안 돼.’

남배우 로버트와 결혼한 작가라면 나도 잘 아는 사람이다.

올해 초 그녀의 동생과 함께 식사를 하고, 편지까지 주고받지 않았던가.

“<살인자와 영혼>의 저자인 ‘벨라’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 남배우 로버트와 결혼한 사람은 배우 라티아의 언니인 벨라였다.

결혼한 후에야 인연이 생겨서 그녀가 로버트와 비밀 연애를 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다.

‘셀레네가 벨라의 팬이라니.’

이건 듣도 보도 못한 설정이다.

하지만 새로운 설정에 내가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셀레네는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살인자와 영혼>은 이번에 연극으로도 제작된 작품이잖아요. 그걸 보려고 왕성을 몰래 빠져나왔답니다?”

“그 연극을 보셨다고요……?”

성을 빠져나와서까지?

그때라면 한창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준비할 시기이다. 나는 꽃을 아무 데나 꽂아 버리고 셀레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요. 주인공 아스테리아 역할을 맡은 라티아가 정말 멋졌어요. 공연을 보고 나니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더라고요.”

“그때가 아카데미 입학시험 준비 기간으로 아는데 시험 준비에 지장은 없으셨나요?”

“시험은 망했지만 후회는 없어요. 시험은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지만 연극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48등을 했구나.’

이 빌어먹을 공주 같으니.

갑자기 성적이 뚝 떨어졌길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정말 명언이에요, 공주님!”

셀레네의 당찬 말에, 피오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우렁찬 박수를 들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이어지는 셀레네의 주접을 들으며 한참을 허탈하게 웃었다.

“공주님께선 정말…… 벨라와 라티아를 좋아하시는군요.”

“네. 그래서 문예창작학부에 지원했어요. 처음엔 역사학부에 지원할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거든요.”

‘……?’

벨라 때문에 문예창작학부에 들어간 거라고?

하, 이 공주님이 진짜…….

갑자기 소설과 다른 행동을 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또 다른 빙의자가 나타나 셀레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기막혀.’

이 여자의 입학 성적이 뚝 떨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벨라의 소설의 연극화를 추진했고, 그 극단 사업을 시몬으로 확장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아닌 시몬 왕국이니 내한이라는 단어 대신 내시라는 단어를 내세워서 말해 보겠다.

우리 공주님은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 연극화된다는 소식을 듣고 신이 나셨고, 그들이 내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왕성을 탈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학업과 덕질은 병행하셔야죠, 공주님!’

라티아와 벨라가 그녀의 인생을 책임져 주는 것도 아닌데, 학업을 때려치우고 논다?

이건 정말 큰일 날 소리다.

셀레네에게 영향을 미친 또 다른 빙의자는 없었다. 그녀의 모든 행동에 영향을 미친 건 나였다.

‘그래도 다른 빙의자가 없어서 다행이야.’

그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이후로도 셀레네는 라티아와 벨라를 찬양했고, 우리는 각자가 좋아하는 배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며칠 뒤, 나는 셀레네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호위를 대동하고 둘이서만 나갈 예정이라고 하니 율리안과 레이델은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율리안의 경우엔 더 심했다.

“어디에 가는 건가요?”

“그냥…… 좋은 곳이요.”

셀레네를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 나는 목적지를 감추고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트로이센 공자가 저를 미워하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네요.”

“아하하…….”

얼마 전, 심심했던 나와 레이델은 셀레네와 율리안이 머물고 있는 별관을 찾았다.

그런데 둘이서 또 손잡고 있더라. 셀레네는 에스코트라고 변명했지만, 이미 우리 사이에선 식상한 변명에 불과했다.

‘이왕 아니라고 할 거면, 더 재미있게 변명해 보라고.’

뭐 아무튼 나와 레이델은 두 사람의 스킨십을 또 목격했고, 두 사람의 부탁대로 비밀을 지켜 주기로 했다.

얼마 안 가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고, 먼저 마차에서 내린 리온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을 필요 없었지만, 이대로 무시하면 그가 섭섭해할 것 같아서 손을 잡고 내렸다.

뒤이어 내린 셀레네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눈앞에 위치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여긴…… 호텔이잖아요……?”

“네.”

호텔 처음 와 보시나? 이상할 정도로 요란한 반응이다.

“안에서 저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서 들어가요.”

“……기다리는 사람? 지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난, 난 이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고요!”

“공주님께서 트로이센 공자를 좋아하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요.”

나는 셀레네의 손목을 붙잡고 이틀 전에 예약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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