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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68)화 (68/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68화

일주일 뒤, 일찍 종강을 맞이했지만 칼바도스에게 붙잡혀 기숙사에 남아 있던 레이델이 공작저로 돌아왔다. 일주일 동안 악독한 황족에게 시달린 탓인지 얼굴빛이 나빴다.

침대에 기절하듯 엎어져 있던 레이델이 나를 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나는 편히 있으라고 했지만 레이델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됐으니까 누워. 안색이 나쁘다.”

나는 레이델의 어깨를 밀어서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의자 하나를 끌어와서 침대 옆에 앉았다.

“별일 없었지?”

“……예.”

많이 피곤했는지 그의 입에서 반쯤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에 전하께서 찾아오신다고 했습니다.”

“오후에? 나 오늘 모임 있는데.”

칼바도스와는 사전에 약속을 잡지 않고도 서로의 집에 오가는 일이 잦았는데, 한쪽이 볼일이 있는 경우엔 찾아온 쪽이 기다려야 했다.

“오늘은 공녀님이 아니라 저를 만나러 오시겠답니다.”

“그래? 둘이 많이 친해졌나 보네.”

그러자 레이델이 정색했다. 하지만 정색은 잠시였다.

“친해지다니요……. 그럴 리 없잖습니까……. 전하께선 그냥, 제가 공녀님과 휴가 가는 걸 막으려고 이러시는 겁니다.”

아. 자기 혼자 수도에 남아서 일할 걸 생각하니 배알이 꼴리나 보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레이델을 칼바도스한테 보내 버릴까?’

레이델과 둘이 놀러 가 칼바도스를 놀려 주는 것보단, 혼자 놀러 간 다음 레이델과 칼바도스를 놀려 주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았다.

칼바도스는 혼자 소외당하지 않고 같이 일할 사람을 얻는다.

레이델은 황태자의 든든한 측근으로 자리 잡는다.

나는 고통받는 두 사람을 생각하며 더 즐겁게 놀 수 있다.

‘최곤데?’

리베르트 부인은 매년 여름마다 백작령으로 휴가를 가는데 꼭 식구 중 한 사람을 데려갔다. 재작년 여름엔 카인이, 작년 여름엔 공작이 함께 백작령에서 휴가를 보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올해는 내 차례란 소리지!’

이번 여름엔 배가 찢어질 정도로 게으르게 놀라는 계시다.

극단 관리자한테 보고를 받고 서류 작업만 조금 하다가 동부 휴양지로 달려가면 되는 거다.

‘남들 일할 때 노는 게 최고라던데.’

내가 놀 때 칼바도스와 레이델은 열심히 일하고 있겠지. 그 생각을 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내 시선이 찝찝했는지 레이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냥. 네가 칼바도스한테 시달릴 걸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즐거워.”

“정말 못되셨습니다.”

실실 웃고 있는 나와 달리, 레이델의 입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괜찮아. 내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넌 날 용서해 줄 거잖아.”

“아마 용서 못 할 겁니다.”

용서 못 한다고?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치고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부드럽고 잔잔했다.

얘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칼바도스랑 한 방을 쓰다 흑화했나?

이래서 룸메이트를 잘 만나야 한다. 룸메이트를 잘못 만나면 멀쩡한 인성까지 망가지는 법이다.

용서하지 못한다는 레이델의 말에 당황한 내가 그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뭐? 왜? 그냥 통 크게 용서해 줘.”

“……미워해야 용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전 공녀님을 미워할 수조차 없으니, 제가 공녀님을 용서할 일은 평생 없을 듯합니다.”

나를 미워할 수 없어서 용서할 수도 없다니.

그 말을 속으로 따라 읊던 그 순간, 오래전 나의 실수로 레이몬드가 자살 시도를 한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방금까지 했던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레이델이 용서할 거라니. 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한 거지?

소설과 달리 이 녀석이 나에게 순종적으로 구는 것을 보고, 그런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조금 전까진 내가 어떤 못된 짓을 해도 그가 나를 용서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레이몬드의 자살 시도 건을 떠올리니 얘기가 달라졌다.

제대로 미움 받을 것 같았고, 용서는 절대 못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소수고, 레이몬드의 성격상 절대 레이델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네 말대로 평생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레이델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레이몬드의 일을 알고 있는 나는 조금 무거운 마음을 안고 모임 장소로 향했다.

*

내 계획은 대충 이랬다.

일단 평소 친분이 있는 귀족 영애 서너 명을 부른 다음, 맛있는 걸 먹는다. 그다음엔 각자 가져온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각 나라의 도시를 차지하는 보드게임을 하는 것이다. 주사위를 굴리면서 재미난 이야기도 주고받는 거고.

분명 처음엔 격식을 차리던 모임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시즈는 내 지시대로 셀레네를 찾아갔고, 셀레네는 바로 나를 찾아왔다.

모임에서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이 있냐는 나의 형식적인 질문에 그녀는,

“모임을 열면 꽃꽂이를 해 보고 싶었어요! 제 모임은 늘 왕비님이 기획하셨거든요…….”

라고 답했고, 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 내 계획을 취소했다.

친구라곤 율리안 트로이센 하나뿐인 사람이다.

그마저도 이젠 친구가 아니지만.

늘 왕비의 통제 속에 살던 사람인데, 이런 곳에선 하고 싶은 걸 해야지.

모임에서 꽃꽂이를 할 거니까 꽃을 준비하라는 내 말에 시즈는, ‘술이 아니라 꽃이요?’라고 되물었다. 볼을 잡아당기고 싶었지만 화낼 기운도 없어서 내버려 뒀다.

약속 시간은 오후 4시. 모임 장소는 공작저 정원.

가장 먼저 공작저에 도착한 피오나가 셀레네에게 반갑게 인사하더니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실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공녀님…… 꽃꽂이라니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저는 이번 모임 때 입으려고 형광 셔츠를 맞춤 제작했다구요.”

원래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게임을 할 땐 누가 가장 이상하고 튀는 옷을 입느냐가 중요하다. 피차 체면 차리는 걸 잊은 뒤로는 모임이 변질됐다.

‘형광 셔츠라니, 작정했네.’

원래대로 모임을 열었으면 튀는 의상 콘테스트에서 내가 질 뻔했다.

게임 내내 피오나를 보며 질투했겠지.

“어쩔 수 없었어. 공주님이 꽃꽂이를 하고 싶으시대.”

“뭐…… 꽃꽂이도 좋지만 그래도 아쉽네요…….”

잠시 후, 피오나의 뒤를 이어 바체스 후작가의 후계자 크리에타와 리스네 백작가의 룬다가 도착했다. 눈치가 좋은 이들이라 나보다 셀레네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우리는 정원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꽃꽂이를 시작했다. 나와 셀레네는 화병에, 나머지 손님들은 바구니에 꽃을 꽂았다.

셀레네의 옆자리에 앉은 크리에타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꽃을 보는 건 오랜만이라 기분이 좋네요. 공주님께선 어떤 꽃을 좋아하시나요?”

“나는…… 나는 프리지아를 좋아해요. 새로운 출발을 응원하는 꽃말이 꽤 마음에 들거든요.”

“공주님은 꽃말 같은 걸 잘 아시는군요! 멋져요. 저는 그런 걸 잘 몰라서-”

음, 생각보다 분위기가 좋다.

나는 웃으며 화병에 노란 장미와 이름 모를 하얀 꽃을 꽂았다. 칙칙한 공작의 집무실에 가져가 장식할 생각이었다. 딱히 꽃꽂이에 대해 아는 바는 없었지만, 의외로 재밌었다.

적당히 대화에 어울리며 화병을 이리저리 살피던 때, 피오나가 말했다.

“아, 우리 다음 학기와 내년을 대비해서 강의 정보를 공유하는 건 어때요? 전 이번 학기에 너무 힘들었거든요.”

“좋은 생각이네. 먼저 공유할 사람?”

내가 동의하기 무섭게 룬다가 번쩍 손을 들었다. 옆자리에 있던 피오나가 장난을 쳐 머리에 꽃 몇 송이를 꽂은 채였다. 의외로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꽃을 빼지 않았다.

“저는 <문화의 세계>라는 강의 추천해요. 토론이 조금 부담스러운 분도 계시겠지만, 다양한 생각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토론은 얼마나 자주 하는데?”

“매주 한 번이요.”

“토론 참여도가 성적에 반영되나요?”

“네. 10퍼센트로 알고 있어요.”

크게 부담되는 정도는 아니구나. 다음에 열리면 들어야지. 강의명과 교수님 성함을 기억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에타는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 백금발을 쓸어 올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 저도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제국 미술의 이해>, 이 수업은 절대 듣지 마세요. 정말 등록금이 아까울 정도였어요.”

“대체 어느 정도길래…….”

쾅―

다시 학기 중의 기억이 떠올라 짜증이 났는지, 크리에타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강의력이 최악이에요. 그냥 혼자 책을 사서 읽는 게 낫겠더라고요. 내가 뭘 배우고 있는지 모를 정도예요.”

크리에타가 화를 낼 정도면 정말 피해야 하는 강의였다.

‘제국 미술의 이해……. 쳐다도 보지 말자.’

나는 씩씩거리는 그녀를 달래 주며, 속으로는 피해야 할 과목명을 읊었다.

“리베르트 공녀는 재미있게 들은 수업이 있나요? 아니면 힘들었던 수업이라든가.”

입학시험에서 48등을 차지한 셀레네에게 드디어 학구열이란 것이 생겼나 보다. 내 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힘들었던 수업?’

그 말을 듣자마자 칼바도스와 함께 수강한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이라는 강의가 떠올랐다.

세 번이나 데이트를 시키고 보고서를 쓰게 시킨 수업이었다.

‘보고서 평가 기준도 애매하고 등급 컷도 높았지.’

열심히 공부한 덕에 시험은 괜찮게 봤지만, 데이트 보고서 과제에서 이상할 정도로 많이 깎여 있었다. 보고서 점수를 생각하니 짜증 났지만, 나는 셀레네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재미있게 들은 수업은 없고, 힘들었던 수업은 있어요.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이라는 강의라고, 무작위로 정해진 파트너와 데이트를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제가 있는 수업인데……. 보고서 평가 기준도 애매하고 등급 커트라인도 높아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네요. 모르는 사람이랑 파트너 하는 게 싫은 사람한텐 추천 안 하고.”

“데이트요? 공녀님은 누구랑 데이트하셨는데요???”

팀플 과제와 보고서 과제가 싫은 사람은 알아서 피하라는 의미를 담아 답해 줬건만.

룬다에게서 엉뚱한 질문이 날아왔다.

“나는 황태자-”

칼바도스와 파트너가 되었다고 말하려던 그때, 우연처럼 바로 근처에 있던 칼바도스와 눈이 마주쳤다.

레이델을 만나러 왔다가 나에게 인사를 하러 온 모양이다.

내 시선이 한곳에서 멎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네 사람 모두가 나의 시선이 향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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