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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67)화 (67/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67화

그는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 내게, 또다른 신인 확신을 안겨 주었다.

역시 이 녀석은 신의 아들이 맞았다.

그나저나 정체를 들킨 건 저놈인데,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왜 알고도 모른 척하셨어요?”

정체를 들킨 주제에 뭐가 그리 좋은지, 리온은 제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왜 모른 척했냐니. 그 답은 간단했다.

“신의 아들이라는 걸 들키면 네가 공작가를 떠날 테니까.”

그는 내 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더욱 진해진 리온의 미소는 나에게 찝찝함을 안겨 줄 뿐이었다.

그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와중에, 리온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가씨께선 제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시는군요.”

“그래.”

그를 곁에 두고자 한 나의 사심은 그의 정체를 묻지 말자는 내 나름의 배려로 이어졌다. 그리고 배려에서 비롯된 나의 침묵은 그의 추궁으로 되돌아왔다.

리온은 아름답게 웃고 있었지만, 연이어 같은 질문을 하며 답을 요구하는 것이 내게는 꼭 추궁처럼 느껴졌다.

“이번엔 네가 대답할 차례야. 기껏 모른 척해 줬더니 갑자기 네 비밀을 밝힌 이유가 뭐야?”

“네가 공작가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말이 듣고 싶어서요.”

태연하게 말하는 그를 보니 기가 찼다.

‘……이, 이 망할 놈이?’

고작 그 한마디를 직접 듣고 싶어서 왜 모른 척을 하냐며 캐물은 것이다.

내가 그의 비밀을 모른 척한 이유를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리온의 머리털을 다 뽑아 버리고 싶었지만 이곳은 신성한 태양신의 영역이었다.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알고 계시는 거지?”

체르티 경이 함께 있었다지만, 공작 부부가 아무 생각 없이 열두 살 된 그를 내 호위로 붙였을 리 없었다.

두 사람 다 리온의 출생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거다.

“네. 저를 숨겨 주시는 대신 공작가의 기사가 되어 충성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어머니의 유산을 찾을 때도 공작 부인께서 도와주셨고요.”

“어머니 아버지도 아시는 그 사실을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았어?”

“그땐 아가씨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서요.”

나는 그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을 피해 도망친 그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강요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함께한 9년간 내가 그에게 충분한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궁금한 게 있어. 왜 태양신은 나를 통해 너를 데려오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숲에 있는 어머니의 물건을 찾아가라고. 그렇게 직접 리온에게 전하는 것이 더 빠를 텐데 말이다.

“맹세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고 맹세했거든요. 그 뒤로 태양신의 말을 들을 수 없게 되었고요.”

“여기에 온 건 내 명령을 따른 거니까…… 너는 맹세를 어기지 않은 게 되는 거구나.”

“그런 셈이죠.”

‘정말 나를 이용해서 리온을 부른 거였어.’

신의 아들이 빠져 죽은 호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신의 뜻이었던 거다.

태양신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로테 헤레이스의 물건을 전해 주고자 했다.

하지만 리온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리온이 일방적으로 신을 미워하는 것 같았다.

“너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거지?”

“네.”

“미워하는 이유를 물어봐도 돼?”

조심스러운 내 질문에 리온이 담담하게 답했다.

“제 어머니를 죽인 자가 태양신이기 때문입니다.”

답을 듣기 전 숨을 들이마신 나는 다시 숨을 내뱉는 것을 잊고 말았다.

‘이게 무슨 말이지?’

태양신이 로테 헤레이스를 죽였다고?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를 얻어서 혼란스러웠다.

“설명이 더 필요해.”

“신탁이 있었습니다. 로테 헤레이스가 둘째 아이를 낳으면, 신을 넘어선 힘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 신계의 질서를 뒤바꿀 것이라는 신탁이었죠. 그때 제 어머니의 배엔 태양신의 둘째 아이가 있었고요. 영원한 권력은 없고, 불안함을 느낀 태양신은 배 속의 아이와 함께 제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리온은 아주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말하고 있었다.

신들은 체면을 중시하니, 태양신은 권력 찬탈에 대한 두려움을 신계의 질서를 위한 행동으로 포장했을 것이다.

신들도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데, 신이 아닌 인간이 신의 행동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하 깊숙이 숨겨진 금서를 펼쳐본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형태를 한 살아 있는 금서였다.

다시 열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였던 리온의 입에서 먹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신을 원망하지만, 신의 힘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그토록 원망하는 아버지가 내린 능력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셈이죠.”

“네가 가진 능력은 검에 관련된 게 맞아?”

그러자 리온이 고개를 저었다.

“신께서 제게 선물한 능력은 검술 실력이 아닌데요.”

“뭐?! 사기 치지 마! 그럼 그건 그냥 네 힘이었다는 거야?”

인간 같지 않은 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순수한 인간의 힘이었더니.

어쩐지 똑같이 굴러도 혼자만 멀쩡하더라.

그 사실이 퍽 자랑스러웠는지 가족 이야기로 내내 축 처져 있던 내 기사가 가슴을 폈다.

“그런 셈이죠. 저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계속 곁에 두고 싶죠?”

무슨 답을 원하는지 너무 티가 나서 나는 그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했다. 대신 내 궁금증을 해결할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검과 관련된 능력이 아니라면…… 신이 너에게 선물한 힘은 뭔데?”

“글쎄요. 전부를 바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

“알려 주기 싫으면 그냥 알려 주기 싫다고 해.”

허무한 답변에 정색을 하니 그게 웃겼는지 리온이 고개를 숙인 채 소리 내 웃었다.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힘입니다. 몇 번 썼더니 사라지더라고요.”

힘이 사라지기도 한다니. 신의 자녀에 대한 많은 책을 읽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언제 썼는데? 이것도 비밀이야?”

“9년 전에 마지막으로 썼습니다. 이건 비밀 아니에요.”

하지만 비밀이 아니라는 말과 반대로, 그는 엄청난 비밀을 전하는 것처럼 내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9년 전이라…….’

내가 이 세상에 떨어진 시기와 비슷했다. 그리고 그때 리온을 처음 만났지.

나는 리온의 얼굴을 바라보며 제법 귀여웠던 열두 살 리온의 흔적을 찾았다.

“빨리 돌아가죠. 아버지의 공간에 더 오래 있고 싶지 않거든요. 여기 있으니까 자꾸 현기증도 나는 것 같고.”

끙끙거리며 이마를 짚은 리온의 모습이 참 처연해 보였다.

“많이 어지러워?”

“……네. 아가씨한테 기대고 싶어요.”

기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리온은 내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물어본 거지?’

그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따지지 않기로 했다.

조금 전 리온이 해 준 이야기가 생각나서, 어쩐지 그가 조금 측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기꺼이 리온을 부축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름을 숨길 거면 제대로 숨겨야지. 리온이 뭐야? 그거 그냥 단델리온에서 앞에 두 글자 떼어 낸 거잖아?”

“…….”

리온은 자기에게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해명했지만, 딱히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

숲에서 돌아온 나와 리온은 백작저에서 휴식한 메디아를 다시 한번 닦달하여 공작저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공작이 메디안을 대여해 준 시간은 총 8시간이었는데, 다행히 대여 시간을 초과하기 전에 무사히 반납할 수 있었다.

간단히 몸을 씻고 식사를 마친 나는 개인 집무실로 메이를 불러왔다.

“메이. 그때 시몬 왕국에 보낼 만한 적당한 사람을 안다고 했지?”

“네. 저도 함께 보내 주세요.”

“……몸은 괜찮고?”

올해 초, 웰링턴에서 사냥을 하다 부상을 입은 메이는 의식을 잃어 연락이 두절되었다. 웰링턴으로 간 시즈가 대신 편지를 써 줘야 할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그 사실이 떠올라서인지, 그녀를 왕국에 보내기 싫었다.

‘이번엔 그냥 내 옆에서 쉬었으면 좋겠는데.’

모처럼 방학도 했으니 동부나 남부 쪽에서 바다나 구경하며 느긋하게 쉴 생각이었다.

“충분히 회복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진짜? 나 휴양지 가서 쉬고 올 건데 후회 안 할 거야?”

“제가 안 가면 누가 가겠어요. 이런 일엔 저를 보내시는 게 맞아요.”

조금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내가 아무리 달콤한 패를 내밀어도 메이는 내 유혹에 넘어오지 않았다.

나랑 떠나는 휴가가 그렇게 매력 없는 선택지였나.

지난 9년간 내 곁을 떠나 웰링턴에서 생활하며 자유의 맛을 본 게 틀림없다. 어쩐지 뒷맛이 씁쓸했다.

“……그럼 함께 가. 가서 긁어올 수 있는 건 다 긁어와. 리오스 왕자 세력과 칼린 왕자 세력, 공주에 관한 이야기, 뭐든 상관없어.”

“알겠습니다.”

“마탑 쪽에서 비밀리에 마정석을 이용한 연락 기구를 제작 중인데, 시험용 기구 몇 개를 빼돌려왔어. 연락은 그걸로 취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그리고 시즈.”

“네?”

구석에서 서류 작업을 하던 시즈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만간 작게 모임을 열 생각이니까 일정 좀 조율해 봐. 별관에 계신 공주님께도 여쭤보고, 셀라 가문의 피오나 영애를 포함해서 초대 리스트 추려와.”

“네. 내일 오전까지 준비할게요!”

왕국에선 끈이 떨어진 공주이고, 요부의 딸이라 손가락질당하는 공주라 해도, 지금은 제국 땅에 머물고 있으며 나의 보호를 받고 있다.

‘우호국의 공주가 공작저에 머물고 있다는데, 궁금해서라도 와 보겠지.’

셀레네가 영영 왕국에 돌아가지 않고 제국에 정착할 수도 있으니 여름 동안 이런 자리를 몇 번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음 학기 때 적응할 때도 수월할 테고.

“공주님과 공동으로 주최하는 거니까 공주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도록 해.”

“넵.”

아침부터 정신없이 돌아다녔기 때문일까. 이상할 정도로 몸이 피곤했다.

나는 잔뜩 고생하라는 의미를 담아 시즈의 어깨를 두들겨 준 뒤, 낮잠을 자기 위해 유유히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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