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66화
“잠깐만…… 저게 뭐지?”
‘가방인가?’
자연과 어우러진 신의 영역에 놓여 있는 인간의 물건에, 나는 돌아가자는 리온을 밀어내고 더욱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낡은 가방이 녹음을 배경 삼아 놓여 있었고, 가방의 잠금 장치에는 녹이 슬어 헐거워져 있었다.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있었던 거지?
“제가 열게요. 녹이 슬었습니다.”
리온은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었고, 나는 그 옆에서 가방 안에 든 물건을 살폈다.
가방에 든 것은 가죽 수첩과 펜, 액자에 끼워진 초상화가 전부였다.
태양신의 영역에서 무게를 잡고 있던 것치곤 생각보다 평범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초상화 속 주인공이 누군지 알게 된 순간부터 이 안에 든 모든 것이 특별해졌다.
‘이 사람은…….’
세 명의 젊은 여성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그림 속 세 명의 여자 중, 가운데에 앉아 있는 여자의 초상화를 수백 번도 더 봤다.
일찍이 죽음을 맞이하여 젊은 시절의 모습만이 초상화로 남아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제국의 황후였던 일레노아 페르데니아, 칼바도스의 어머니였다.
‘시간이 흘러서 얼굴이 꽤 변했지만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은 동생인 에밀리 헤레이스야.’
그리고, 일레노아의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신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도망친 첫째, 로테 헤레이스였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헤레이스 가문의 세 자매다.
칼바도스의 궁에 놓인 일레노아 페르데니아의 초상화가 없었다면, 알아보는 데 시간이 꽤 걸렸을 것이다.
‘그럼 이건 세 자매 중 첫째인 로테 헤레이스의 물건이겠네.’
이곳은 태양신의 영역이고, 로테 헤레이스는 태양신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아들을 데리고 가문에서 도망친 그녀가 이 숲에서 물건을 감춰 뒀을 확률이 높았다.
‘로테 헤레이스도 나처럼 숲에 들어온 거야.’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호수에 끌렸다.
호수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고, 태양신은 내게 호수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단순히 내가 호수의 존재를 의식하고 의문을 가졌기 때문에 숨겨진 땅을 볼 수 있었던 게 아니야.’
태양신이 나에게 숨겨진 땅을 보여 주고, 나를 이 숲으로 불러들인 이유는 로테의 가방 때문이다.
‘이 가방을 헤레이스 가문에 돌려주라는 건가?’
하지만 로테 헤레이스는 아버지인 헤레이스 남작을 경멸했다. 로테의 아들인 단델리온을 영웅으로 만들어 가문을 부흥시키길 원했기 때문이다.
영웅이 되어 이름을 알리면, 외손자가 일찍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럼 남작에게 가져다주란 뜻은 아닐 텐데.’
둘째 일레노아 페르데니아는 죽었다.
‘셋째인 에밀리 헤레이스에게 가져다줘야 하는 건가?’
머릿속이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머릿속과 달리, 귓가에는 잔잔한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리온이 왜 이렇게 조용하지?’
아까부터 돌아가자고 떠들어 대던 리온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온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림 같은 남자가 있었다. 내 맞은편에 주저앉은 리온은 말없이 헤진 가죽 수첩의 내용을 눈에 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눈빛이 이상할 정도로 깊었다.
“거기 뭐가 적혀 있어?”
“……편지 같은데요. 앞장에는 유산을 남긴 금고 위치와 비밀번호가 있고요.”
“편지가 있다고?”
수첩에 적힌 편지를 다 읽은 것인지, 아니면 그리 흥미 있는 내용이 아닌 것인지. 리온은 아무 미련 없이 나에게 수첩을 넘겼다.
시간이 흘러 노랗게 바래진 종이 위에 정갈한 검은 글씨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영역에서 나의 편지를 읽고 있는 너는, 몇 살이 되어 있을까.
네가 여기에 와 있다는 건 내가 죽었다는 뜻이겠지. 너는 꼭 내 말을 새겨 둬야 한다.
숨어라.
외면해라.
비겁해져라.
희생하지 마라.
영웅의 길을 걷지 마라.
타인에 의해, 타인을 위해 너를 내던지지 마라.
아무리 외로워도 외할아버지를 찾지 마라.
사랑하는 외손자 단델리온을 찾는다는 말에 현혹되지 마라.
그 사람은 너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다.
영웅으로 단명할 바엔 평범한 인간으로 오래 살아라.
한심한 놈이 되어도 좋다. 그러니 최대한 한심하게 살아라, 아들.]
그것은 경고인 동시에 염원이었다. 죽음을 경고하고, 생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편지.
로테 헤레이스는 단델리온의 이른 죽음을 원치 않는다.
신경 쓰이는 것은 편지의 첫 번째 문장이었다.
[아버지의 영역에서 나의 편지를 읽고 있는 너는, 몇 살이 되어 있을까.]
‘아버지의 영역에서 편지를 읽고 있다고.’
로테 헤레이스는 아들인 단델리온이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편지와 금고의 비밀번호 등의 유품을 이 숲에 남겨 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아들은 이곳을 찾지 않았다.
‘그래서 태양신은 나를 통해 아들에게 편지를 전하고자 하는 거야.’
내가 단델리온에게 이 편지를 전하길 바란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단델리온 헤레이스를 찾아야 한다. 편지와 유품을 전하기 위해서.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단델리온을 내가 찾아 나서는 것은 아들이 죽은 듯 숨어 살기를 바라는 로테 헤레이스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거 참…… 난처하네.’
편지를 전하자니 로테 헤레이스의 유언을 어기는 것 같아 찝찝하고, 전하지 않자니 태양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아 찝찝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리온한테도 한 번 물어볼까?’
나보다 먼저 편지를 읽은 리온에게 의견을 구하려던 그때였다.
‘아니지. 내가 직접 단델리온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태양신이 로테의 편지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네.’
숲을 찾지 않은 단델리온을 숲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신은 단델리온을 직접 부르지 않고 나를 이용했다. 나를 통해 단델리온을 이곳에 불러들이고자 했다.
내가 숲에 발을 들이면, 그로부터 얼마 뒤 그 역시 숲에 발을 들일 거라는 확신이 있는 거다.
‘아니면…… 단델리온이 나와 함께 숲에 들어오거나.’
그렇게 된다면 나는 굳이 단델리온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고, 태양신은 아들에게 로테의 편지를 전해 줄 수 있다.
‘나와 함께 들어온 사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리온.
신의 기운이 깃든 성스러운 자연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이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림 속 세 명의 여자를 눈에 담고 있었다.
‘……설마 이 녀석이 신의 아들인가?’
다짜고짜 물어볼 순 없었기 때문에 나는 리온이 신의 아들이라 가정하고, 그에 맞는 근거를 하나씩 떠올렸다.
우선, 신의 자녀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
‘대련은 매번 내가 지잖아. 인간 맞아?’
‘저는 인간이지요, 틀림없는.’
‘리온은 검을 잘 다루지.’
인간이라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의 검술 실력.
두 번째, 단델리온이 열 살이었을 때 로테 헤레이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나는 여덟 살 때 리온을 처음 만났다.
‘리온은 그때 열두 살이었고.’
로테가 사망한 뒤 떠돌아다니던 그가 리베르트 기사단에 들어왔다면 시기가 얼추 맞는다.
세 번째로, 리온이 신의 아들이라면, 그가 숲을 찾지 않은 이유를 조금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신을 믿으십니까?’
‘나는 존재를 믿어. 하지만 신뢰하진 않아.’
‘저도 못 믿어요, 태양신 같은 거.’
분명 그는 ‘태양신 같은 거’라고 말했다.
그는 태양신을 신뢰하지 않으며, 신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리고 바로 오늘, 리온은 성스러운 신의 공간인 이 숲을 찝찝하게 여겼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아버지인 태양신을 싫어하니 숲을 찾지 않은 것이다.
네 번째로, 리온은 피오나와 달리 숨겨진 땅의 존재를 인식했고 숲과 호수를 봤다.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도 제가 단명할까 봐 정말 겁이 나거든요.’
‘단명할까 봐 두렵다고.’
신의 아들은 이름을 알린 뒤 일찍 죽음을 맞이한다. 리온은 자신이 미인이라 일찍 죽을 것을 걱정한 게 아니라, 신의 아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아니지. 리온이 태양신의 아들이라 단정 짓기엔 아직 이르다. 하지만 단정 짓기 이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리온이 신의 아들이라는 쪽으로 생각의 무게가 기울었다.
“리온.”
“네.”
초상화를 바라보던 리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가 단델리온 헤레이스야?’
분명 그렇게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저도 제가 단명할까 봐 정말 겁이 나거든요.’
조금 전 리온이 한 말이 떠올라서, 나는 바로 입을 닫아 버렸다.
신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운명이 두려워 이름을 감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묻어 둔 이름을 어찌 다시 파헤치겠는가.
‘무덤을 파헤치는 거나 다름없어.’
일단 뒤에서 조용히 알아보자. 그리고 정말로 그가 신의 아들이 맞다면…….
‘모른 척해야겠지.’
리온은 그동안 내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신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고 싶은 거다.
나에게 정체를 들킨다면, 리온은 공작저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자신의 진짜 이름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살아가겠지.
로테의 편지대로 말이다.
‘그러니까 절대 말하지 말자.’
이대로 영영 모른 척하자고. 나는 그렇게 결단을 내렸다.
기껏 이름을 불러 놓고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냐는 리온의 눈빛에, 나는 나가는 쪽을 가리켰다.
“이만 돌아갈까?”
“바라던 바입니다.”
리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내 손에 들린 가방을 대신 들었다. 그렇게 우리가 가방을 챙겨 숲을 빠져나가던 중, 별안간 걸음을 멈춘 리온이 평소처럼 다정하게 나를 불렀다.
“그런데요, 아가씨.”
“응?”
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물었다.
“왜 모른 척하세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반쯤 놓은 정신줄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내가 뭘 모른 척했다는 거야?”
“제가 단델리온 헤레이스라는 걸 눈치채셨잖아요.”
이 개자식이…… 기껏 모른 척해 줬더니 알아 달라고 난리를 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