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65화
그날 아침, 메이는 나에게 물통과 지도, 나침반, 얇은 겉옷 등이 들어있는 가방을 챙겨 주었다.
문 앞을 나서니 리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우리는?”
“앱솔룬 영지.”
“외박이에요? 거기까지 다녀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아쉽지만 당일치기야.”
호수가 있는 숲은 동쪽 끝에 있다.
떠나 있던 공작 부인과 체르티가 공작저로 돌아왔다는 건 북부의 2차 마수 토벌이 끝났다는 걸 의미한다. 토벌이 끝났으니 체르티와 함께 파견 갔던 저택의 마법사 역시 돌아왔을 거다.
나는 리온을 끌고 공작에게 달려갔고, 공작가의 마법사를 8시간 대여하는 데 성공했다. 메디안 씨는 대여라는 말에 인권을 돌려 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자 포기했다.
그렇게 그는 마법진을 펼쳐 동부 백작저로 이동마법을 시전했고, 나와 리온과 메디안은 무사히 백작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메디안은 바로 곯아떨어졌다. 원거리 이동 마법은 마나 소모가 컸기 때문이다.
‘카인은 멀쩡하던데.’
나는 새삼 카인의 대단함을 느끼며, 옆에 있는 리온을 곁눈질했다.
“경도 여기서 쉬면서 기다리지그래? 혼자 다녀오면 되는데.”
생각해 보니 나로서는 혼자 가는 게 나았다.
분명 지도의 끝에 숨겨진 땅이 드러났음에도 피오나는 그 땅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 숲은 나만 볼 수 있는 거야.’
괜히 리온과 함께 갔다가 숲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다리라는 내 말에 리온은 말없이 미소를 짓더니, 백작저에서 말 두 마리를 빌려왔다.
“가시죠, 어디든 같이.”
쳇.
혼자서는 절대 안 된다는 뜻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데려오지 말걸.
‘나는 왜 리온한테 같이 오자고 했지?’
이제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이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숨겨진 땅을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리온을 데리고 여기에 왔다.
처음부터 혼자 오는 게 깔끔했을 텐데. 꼭 리온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결국 나는 함께 가자는 리온의 뜻을 받아들였고, 말에 오른 우리는 계속 동쪽을 향해 달렸다.
황량한 벌판에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고 흙먼지가 일었다.
이보다 더 동쪽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낙원과도 같은 울창한 숲이 신기루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숲은 존재한다.’
그리고 신은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리온은 숲을 봤나?’
나는 고개를 돌려 리온을 바라보았다.
숲이 보이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리온 역시 숲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리온의 반응이었다.
‘……왜 저런 표정을 짓지?’
푸른 눈동자에 숲을 담은 리온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뒤늦게 내 시선을 의식한 리온이 백지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 위에 떨떠름한 미소를 그렸다.
“……여길 꼭 들어가셔야겠어요?”
“어. 신의 뜻이거든.”
나는 나도 모르게 호수에 이끌렸다.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정의를 내리기엔 호수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컸다.
신은 나에게만 호수가 있는 숲의 위치를 알렸고, 숲을 보여 주었다.
그러니 나는 지금부터 숲에 들어가야 한다.
“언제부터 그렇게 신을 믿으셨다고…….”
“싫으면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자 투덜거리는 리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주 약간의 원망이 담긴 리온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숲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깊은 한숨 소리가 내 뒤를 따랐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제 머리를 헤집은 리온이 복잡한 표정으로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따라오기 싫다더니?”
“기약 없는 기다림을 더 싫어하거든요.”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그것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리온이 질척거렸다.
“그러니까, 자꾸 저 두고 가려고 하지 마세요. 갑자기 사라지실까 봐 무섭습니다.”
“내가 경을 두고 갑자기 사라진 적이 있어?”
“……어렸을 때요. 야시장에서 갑자기 사라지셨잖아요.”
아. 슈아와 루카스를 보고 달려간 날이 리온에겐 악몽처럼 남아 있었나 보다.
하긴, 그땐 리온도 많이 어렸지.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에이, 그땐 여덟 살이었잖아. 나이 먹고는 안 그래.”
“있습니다.”
“내가? 대체 언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리온을 두고 사라진 적이 있었나?
‘루카스를 만난 날 이후로는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답을 추궁하자 리온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말 안 할래요. 어차피 기억 못 하실 테니까 저만 기억하고 싶어요.”
말도 안 해 줄 거면서 왜 이야기한 거람…….
입술을 때려 주고 싶었지만 성스러운 곳이라 꾹 참았다.
*
숲 안쪽에 다다를수록 물씬 풍겨오는 성스러운 기운에, 성자가 아닌 나까지 괜히 경건해지는 기분이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안정감을 찾는 나와 달리 리온은,
“꺼림직하네요.”
라고 말했다.
리온은 내가 느끼지 못한 뭔가를 느낀 걸까?
‘귀신이라도 있나.’
리온은 찝찝하다는 듯 숲 안쪽을 살폈다.
그 모습을 보니 얼마 전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있었던 귀신 소동이 떠올랐다.
나는 내 양쪽 팔을 뜯어질 듯 붙잡았던 칼바도스와 레이델을 그리며 물었다.
“리온. 여기서 갑자기 사람이 아닌 뭔가가 확 튀어나오면 어떻게 할래?”
“글쎄요……. 아가씨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
“비명을 지르면서 공격하지 않을까. 좋은 방법은 아니겠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온 답이었다. 셀레네가 튀어나오자마자, 비명을 지르면서 셀레네의 머리를 내리친 전적이 있었으니까.
“그럼 이렇게 하죠. 비명은 제가 지를 테니, 공격은 아가씨가 하는 겁니다. 아가씨 말씀대로 비명을 지르면서 공격하는 건 그렇게 좋은 방법이 아니니까요.”
같이 싸우는 게 아니라 뒤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겠다고?
지켜 주지는 못할망정……. 호위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 괘씸한 선택지에 웃음이 나왔다.
“뭐, 그래도 날 내팽개치고 혼자 도망치는 것보단 낫네.”
적어도 뒤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으면, 함께 있는 거니까 말이다.
제국인을 사랑하는 선량한 황태자의 가면을 쓴 주제에, 나를 두고 잽싸게 달아난 칼바도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리온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어떤 망할 놈이 아가씨를 팽개쳐 두고 도망치기라도 했어요?”
“황태자가.”
“힘없는 저의 침묵을 용서하세요.”
황족이 거론되자 리온은 침묵을 택했다.
이런 우스운 일로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용서를 구하는 말과 함께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그렇게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뿌리에서부터 서글픔을 가득 머금은 포플러 나무 사이로, 햇빛을 받은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저건 설마…….’
그 반짝임의 정체를 알 것 같아서, 나는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빨라진 내 걸음에 끌려가고 있었다.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누이들의 슬픔을 담담하게 지나친 나는, 이윽고 어느 호수의 앞에 섰다.
수많은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되지만 그 누구도 직접 보지는 못한 장소. 인간의 어리석음과 만용을 보여 주는 장소.
‘여기가 신의 아들이 죽은 호수구나.’
햇빛을 받은 호수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무덤이 또 있을까.
눈앞의 광경을 두고 쉬이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압도당한 동시에 감탄한 나와 달리 리온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호수를 바라보는 눈이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호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호수를 보는 나를 보는 것을 택한 것 같았다.
호수 가까이에 다가간 나는, 고요한 호수 표면에 비친 내 얼굴을 감상하며 말했다.
“미인은 단명한다는데, 정말 걱정이 많아.”
그래. 정말 걱정이 많았다.
일이 잘못되어서,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는 엘렌시아의 운명을 바꾸지 못할까 봐.
미인이라서.
그리고 운명을 바꾸지 못해서.
내가 단명할 이유는 두 가지나 있었다.
하지만 곧 리온의 입에선 조금 전의 나 못지않게 뻔뻔한 목소리와 뻔뻔한 말이 흘러나왔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걱정이 아니라 내 걱정을 한 거야.”
“아가씨께선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가 나를 다독이듯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제 얼굴이 너무 잘난 탓에 내가 미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건가?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리온을 흘겨보자,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싼 리온이 나를 세심하게 살폈다.
“아름다운 우리 아가씨께서 단명하시면 어쩌나, 그런 걱정은 제가 이미 넘치도록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나는 입에 발린 말을 야무지게 내뱉는 리온의 재주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 그러니 아가씨께서도 제 걱정을 조금만 해 주세요. 저도 제가 단명할까 봐 정말 겁이 나거든요. 저는 아주 오래오래 아가씨 옆에 있고 싶은데.”
미인은 단명한다는 말은 그저 속설일 뿐인데, 그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얼굴뿐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기라도 하지. 리온은 얼굴을 제외하면 단명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말이다.
‘진짜 단명할까 봐 무서운가 보네.’
쫄아 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우리 둘 다 오래 살자.”
내가 리온의 손을 떼어 내자, 그는 약간의 미련이 남은 눈으로 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리온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가리켰다.
“이만 돌아갈까요? 메디안 님도 슬슬 깨어나셨을 겁니다.”
“여기서 나가고 싶구나?”
“……네.”
숲을 본 순간부터 리온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늘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놈이 이렇게 무언가를 꺼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미 호수도 봤고. 내 볼일은 끝났지.’
계속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을 붙잡아 둘 순 없었기 때문에 나는 리온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호수를 눈에 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던 때, 숲 안쪽에 놓여 있던 뭔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