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64화
“바로 마탑으로 가는 거야?”
“레반과 로미오를 빼내야 하니, 디아스 공작저에 먼저 가야겠지.”
데리고 가는 게 아니라 빼낸다고?
함께 마탑에 가는 레반이야 그렇다 쳐도, 로미오는 왜?
카인의 이상한 단어 선택에 의문을 가진 내가 물었다.
“레반 선배랑 로미오 선배가 공작저에 갇히기라도 했어?”
“응.”
“진짜 갇혔다고? 왜 갇힌 건데?”
내내 담담하게 답하던 카인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로미오는 연극부에 몰래 가입할 걸 들켜서, 레반은 황실 마법단이 아닌 마탑을 선택해서. 그래서 갇혔대.”
늘 실실거리며 웃고 다녀서 아무 고민과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 형제는 참 딱한 사정에 놓여 있었다.
“레반 선배는 텔레포트 못 써?”
생각해 보니 마법학부인 레반이 카인의 구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텔레포트를 쓰면 카인이 갈 필요도 없이 로미오와 바로 탈출할 수 있을 텐데.
“그 녀석은 단거리밖에 못 해.”
말을 마친 카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 없는 두 사람을 향한 측은함이 담겨 있었다.
‘첫째 아들은 마탑에, 둘째 아들은 연극이라.’
이전에 연극부실에서 우연히 만난 로미오는, 나에게 자신의 처지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다.
‘유령 회원이야. 부모님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안 된다고 하셨거든.’
그리고 카인은 부모님의 눈에 흙을 뿌리는 것을 친히 도와주겠다고 했다.
로미오를 위로하기 위한 농담인 줄 알았는데. 막상 디아스 공작가로 향하려는 카인을 보니, 전혀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디아스가에 가면, 그 집 사람들 눈에 흙 뿌릴 거야?”
“……안 되려나?”
눈에 띄게 몸이 굳은 카인이 머쓱하게 웃었다.
“안 될 게 뭐 있어. 손으로 직접 흙을 뿌리지 말고,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게 더 좋을 거야.”
그래야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카인이 괜한 날씨 탓을 하며 모른 척할 수 있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고 하면 공작가에서 따지고 들 수 없을 것이다.
흙을 만지지 않으니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야.”
내 말을 듣고 머쓱함을 집어치운 카인은 대견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눈을 피하는 대신 말을 돌리기로 했다.
“디아스 공작가에 쳐들어갈 만큼 두 사람이 좋아?”
“시끄럽긴 하지만 같이 있으면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니까.”
두 가지 이유 모두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거늘. 두 번째 이유만큼은 카인의 혼잣말처럼 느껴졌다.
내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린 카인은 그것마저 짐이 될까 싶어 이내 손을 내렸다.
잠시 뒤, 일그러진 얼굴을 한 그의 입에서 조금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만약에…… 네가 아버지의 뒤를 잇고 싶지 않아진다면, 꼭 나한테 먼저 말해 줘. 같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나는 네가 후계자가 되는 게 너에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너에겐 그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어렸을 땐 내가 후계자가 되는 것이 무조건 나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던 그가, 이제는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카인은 언제나 나에게 이득이 되는 쪽을 생각해.’
분에 넘치게 좋은 오빠를 두었지, 나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그의 동생인 엘렌시아를 연기하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내가 카인의 진심에 진심으로 답한 순간부터 그건 더 이상 연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다시 한번 그의 진심을 마주한 내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오빠. 하지만 내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모든 시작엔 두려움이 있다.
소공작으로 임명하겠다는 말을 들은 후 두려움을 느꼈으나, 그것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긴장과 떨림에 가까웠다.
내 기억 속 공작이 책상 앞에만 앉아 있던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공작이 일하는 모습을 보러 갔기 때문이야.’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나도 알고 싶어서.
이따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면, 내 눈높이에 맞춰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시는 이야기가 꽤 재미있어서.
그런 당신을 조금은 닮고 싶어서.
그러니 내 마음이 변할 이유는 없다.
확고한 나의 의지에, 카인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럼 혹시, 아카데미 건물을 부수고 다닌 것도 내가 안정적으로 후계자가 될 수 있게 하려고 일부러-”
“아니…… 그건 진짜 열받아서 그런 거 맞아.”
“아. 그래.”
그땐 진짜 빡쳤었구나. 내가 웃자 카인이 예쁘게 따라 웃었다.
카인은 나에게 이득이 될 일을 먼저 생각한다. 이번에도 그럴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만약에 내가 황태자비가 되고 싶다고 하면 도와줄 거야?”
“황태자 없이도 황태자비가 될 수 있던가? 그런 방법이 있으면 당연히 도와주지.”
“내가 황후가 되겠다고 하면?”
“황제 없이 황후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아니지.”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는 듯, 카인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뒤 그의 입 밖에서 흘러나온 말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황후보단 황제가 되는 쪽이 훨씬 낫겠는데.”
하지만 단순하게 들리면서도 복잡한 방법이었다.
페르데니아의 초대 황제 로울레우스 페르데니아는 태양신과 피의 계약을 했다.
그리고 그자의 피를 잇는 자만이 황위에 오를 수 있다.
‘엘렌시아가 황제가 된다면 신전부터 들고 일어설 테지.’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말도 안 되는 카인의 생각에,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복잡하잖아.”
신과의 계약을 깨고 왕조를 뒤엎는 무모한 싸움을 이어 나가느니, 차라리 무능하고 일 모르는 황족을 남편으로 삼아 황제로 내세운 다음, 내 마음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왕 형제 중 한 명을 옆에 둬야 한다면, 칼바도스보다는 루카스가 낫겠네.’
루카스는 칼바도스보다 고분고분하고, 흥미가 없는 분야에는 무지하니까 말이다.
여차하면 옥새까지 내어 줄 것 같았다.
아.
‘이래서 엘렌시아가 루카스를 선택했구나.’
하여간 미친 여자가 틀림없다.
묘하게 속이 불편해진 내가 슈아를 힐끗 바라보자, 그 시선을 슈아에게 가 보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한 카인이 내 머리를 쓸었다.
“다녀올게.”
“다시 안 와도 되는데, 굳이.”
“그렇게 살 떨리는 농담은 좋아하지 않아.”
“농담 같지?”
내가 정색하자 카인이 쫄았다.
“…….”
“농담 맞아. 잘 다녀와.”
달라진 인사에 카인이 겨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 짧은 대답과 새벽 같은 미소를 남겨 두고, 카인은 디아스 공작저로 떠났다.
정원 한구석에서 기다리고 있는 슈아에게 바로 돌아가야 했음에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카인이 떠난 아쉬움 때문이 아니라, 조금 전 카인이 한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니까.’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그럼 나는 왜 배우가 되고 싶어 했지?
그 길에 들어선 건 나에게 어떤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부터 때려치우고 싶었는데, 그 목적 하나가 나를 버티게 했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목적을 잊어 은퇴하려 했는데 교통사고가 났고.
그 목적이 뭐였지?
그동안 한 번도 기억해 내지 못한 것을 이제 와서 갑자기 기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아닌 모양이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 억울해서라도 그렇게 믿어야 했다.
*
낯선 곳에서 쉬이 잠들 수 없는 스스로를 원망하던 셀레네는 피곤한 몸을 이끌어 달빛이 스며드는 창가 앞에 섰다.
온전한 달빛을 맞이하기 위해 그녀가 커튼을 걷었다.
하지만 정원에 서 있는 누군가로 인해 그녀의 시선은 하늘이 아닌 땅을 향하게 되었다.
‘저 사람은…….’
화염을 닮아 당장이라도 타오를 것 같은 붉은 장미의 정원에서, 리베르트 가문의 남매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저 정원의 장미에서는 가시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린 아가씨가 가시에 찔려 피가 나자, 화가 난 도련님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저택의 집사는 그렇게 설명했다.
그렇게 말하는 집사는 두 손자 손녀의 우애를 기특히 여기는 할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셀레네는 카인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아 고요하게 빛나는 은발에 흉포하게 느껴지는 붉은 눈.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까지.
어린아이의 눈을 빌려 봐도 두 사람은 남매였다.
아카데미에서 우연히 카인을 마주한 셀레네는, 카인이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사람이 저런 표정도 지었던가?’
매섭게 올라가 있던 카인 리베르트의 눈꼬리가 누그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온갖 재앙이 담긴 상자가 저 남자의 손에 들려 있다고.
마법은 신의 힘을 닮았다.
그리고 카인 리베르트는 신이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도 신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저 사람의 힘은 언제든지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카인 리베르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동생의 손에 피가 나서 화가 났다고.”
황공 1차 비밀 회담에서 황태자는 말했다.
‘오라비인 카인 리베르트가 저주받았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공자의 멱살을 쥐고 테라스로 끌고 나가 떨어뜨리려고도 했지요.’
오빠는 동생이 다쳤다는 이유로 장미의 가시를 없애 버리고, 동생은 오빠를 욕하는 놈을 테라스로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고.
참으로 난폭한 우애였다.
“……내 오라버니께선 내 피를 보지 못해 안달이신데.”
‘어머니가 같은 1왕자는 나를 죽이려 들고, 아버지가 같은 2왕자는 나를 팔아넘기려 들고.’
다시 생각해보니 이쪽도 난폭하기는 했다. 우애가 없어서 그렇지.
제 처지를 떠올린 셀레네가 한숨처럼 혼잣말을 내뱉었다.
“좋겠네, 공녀는.”
공녀의 가족은 공녀에게 독을 보내지 않을 것이고, 공녀를 팔아넘기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셀레네는 한참 동안이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