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63화
학기가 끝나고 나는 셀레네와 율리안을 공작저로 데려갔다.
원래 레이델도 함께 돌아왔어야 하지만, 아직 시험 한 과목이 남은 칼바도스가 혼자 지내기 외롭다는 핑계로 레이델을 기숙사에 붙잡아 두었다.
레이델은 억울해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황족이 남으라는데 남아야지.
저택의 문이 열리고 하인들과 함께 공작 부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주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편지로 이야기 전해 들었습니다. 편히 쉬었다 가세요.”
칼바도스가 찾아왔을 적엔 눈치를 팍팍 주던 공작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하지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봤자 매서운 인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집사와 하인들이 손님을 모시고 사라지자, 공작 부인이 내 뺨을 붙잡고 슬픈 얼굴로 물었다.
“우리 딸 얼굴이 왜 이러니? 왜 이렇게 홀쭉해졌어?”
음식이 입에 잘 맞아 반질반질해진 얼굴로 돌아왔는데, 홀쭉해졌댄다. 할 말을 잃은 내가 고개를 돌리며 말을 돌렸다.
“……오빠는요? 저보다 이틀 먼저 저택에 온 걸로 아는데.”
“마탑에 가기 전에 사야 할 것이 있다며 나갔단다.”
“아.”
졸업까지 한 학기가 남은 카인은, 여름 방학 동안 레반 디아스와 마탑에서 인턴 생활을 할 예정이었다.
마탑의 이야기가 나오자 공작이 헛기침을 뱉으며 주의를 끌었다.
“카인이 마탑 쪽으로 길을 정한 것 같으니, 다가오는 네 생일에 너를 소공작으로 임명할 거다. 그럼 네가 황태자비가 된다는 헛소리는 바로 들어가겠지. 너와 황태자를 둘러싼 모든 소문이 사라질 거다!”
공작 부부가 일찍이 나를 후계자로 정했음에도 발표가 늦은 이유는 간단했다.
저주받았다는 말이 도는 카인을 내버려 둔 채 나를 후계자로 삼겠다 발표했을 경우, 카인과 가문에 대한 나쁜 말이 돌 상황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성급한 발표는 카인이 리베르트 가문에서 버림받은 이미지를 만든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귀족인 카인과 레반이 황실 마법단이 아니라 마탑을 ‘선택’한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가문에서 버림받은 것이 카인이 아니라, 안정과 부 대신 흥미를 택한 괴짜처럼 보일 것이다.
‘이를 수도 있지만 발표하기에 적절한 시기야.’
오랜 시간 검을 쥔 공작이, 투박한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황태자비와 황후라는 단어에서 벗어나는 건 안심이다. 하지만 공작이라는 단어가 조금 무겁게 들려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을 놓치지 않은 공작이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
“그냥, 언젠가 제가 아버지 뒤를 잇는다는 게 실감이 안 나서요.”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라……?’
이상하게도 내 모든 기억 속에서 공작은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다.
‘……공작이 집무실에서 시달리던 모습만 기억나는데. 나도 그렇게 살게 되는 건가?’
이거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야?
“실감이 안 난다면 이번 여름에 대리…….”
공작 부인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무언가를 말했지만, 때아닌 과거 회상에 충격을 받은 나는 그 말을 놓치고 말았다.
*
나는 메이와 루나, 슈아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기사단 건물로 향했다.
자율 훈련 시간이었기 때문에, 훈련장 내부는 정식 훈련 시간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구석에서 천천히 훈련장을 바라보자, 기사 단장이 달려와 나를 반겼다. 공작 부인과 북부 토벌에서 생사를 함께 한 동료였다.
그런데, 풍성한 파란 수염을 자랑하던 단장의 입가가 휑했다.
“수염은 어디다 팔아먹었어?”
손가락 끝으로 단장의 입가를 가리키자, 단장은 마치 발가벗은 사람처럼 부끄럽다는 듯 턱을 쓸었다.
“막내딸이 태워 버렸습니다.”
“장군감이네.”
비록 단장의 입가는 휑해졌으나 인상이 환해졌으니 딸이 큰일을 해낸 것이다.
나는 여섯 살 먹은 단장의 막내딸이 기특하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가 공작저를 떠나 계신 넉 달이 어찌나 길던지요.”
“나도 공작저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그리움에 사무쳐 잠도 못 자고, 밥도 안 먹고 울면서 밤을 지새웠다고.”
“그런 것치곤 얼굴에 윤기가 좔좔 흐르십니다만.”
“티 나면 어쩔 수 없고.”
어머니께선 홀쭉해졌다고 하셨는데, 단장의 눈엔 진실이 비치는 모양이다.
나는 단장의 집요한 시선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 기사단을 살폈다.
‘리온은 당연히 없겠지.’
정식 훈련도 빼먹으려 드는 놈이, 자율 훈련을 하고 있을 리 없었다.
리온은 그렇다 쳐도…… 한 명이 더 비는 것 같은데.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람이 자리에 없었다.
“북부로 파견 간 체르티 경이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자리에 없군. 휴가라도 간 건가?”
그는 전보다 훨씬 잘 보이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환영회 자리에 나갔다가 기사들끼리 싸움질을 해서 하루 근신 처분을 받았습니다.”
‘하루?’
말이 좋아 근신이지 하루 동안 머리를 식히며 쉬고 오라는 소리였다.
우리 기사단 내에서 싸움이 일어났다면, 고작 하루 동안 근신 처분을 받았을 리 없었다.
“어느 가문 기사들이랑 싸운 건데?”
“술집에서 메릴 쪽 기사들과 싸움이 붙었습니다. 혼자 술에 취해서 넘어져 놓고, 우리 쪽에서 발을 걸었다고 달려들었다는군요. 다친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누구랑 싸웠나 했더니 후작가였구나.
다친 사람이 없다는 말에 안심한 내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단장은 그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내게 전해 주지 않았다.
“아직 나한테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아? 중요한 말을 빼먹었잖아.”
단장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나는 단장에게 몸을 낮추라는 듯 손짓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단장에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이겼어?”
“……아.”
깨달음이 담긴 탄성을 내뱉은 단장과 나의 눈이 마주쳤고, 그가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승리했습니다. 체르티가 이빨을 털어 버렸다지 뭡니까.”
“좋았어!”
체르티가 이룩한 명예로운 승리에, 나는 한쪽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나저나, 그 녀석을 보러 오신 줄 알았는데요.”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나는 그가 말한 ‘그 녀석’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오자마자 그 녀석을 찾은 것도 사실이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단장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남자가 뻔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요. 저는 당연히 저를 보러 오신 줄 알았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리온의 눈이 아닌 입술이었다.
누군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건지, 터진 아랫입술에 피가 굳어 있었다.
“내 기사의 얼굴이 왜 이 모양인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같이 싸우기라도 한 거야?”
같이 싸운 거라면 함께 근신 처분을 받아야 하지 않나?
“저는 체르티 경을 말렸습니다. 아가씨께선 지금 고래 싸움에 터져 버린 가여운 새우의 등을 보고 계시는 거고요.”
“함께 날뛴 게 아니라?”
“네. 다음 날이면 아가씨가 돌아오실 텐데, 징계를 받으면 아가씨 얼굴을 못 보잖아요.”
하여간 말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녀석이었다.
새우 같은 제 처지를 강조한 리온이 피 터진 제 입술을 가리켰다. 이상한 표정과 함께.
답지 않게 퍽 애처로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 걱정이 되었다.
“입술 말고 다른 곳은 안 다쳤고?”
“왼쪽 뺨이 아파요.”
“숙여 봐.”
리온은 시키는 대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리온의 턱을 붙잡고 그의 왼쪽 뺨을 유심히 살폈다.
“멀쩡한데?”
“아가씨한테 왼쪽이 저한텐 오른쪽이에요.”
“아.”
반대쪽으로 리온의 고개를 돌려 왼쪽 뺨을 살폈지만, 양쪽 모두 멀쩡했다.
“이쪽도 괜찮아 보이는데…….”
“입술 상처가 너무 심해서 다른 부상은 비교적 괜찮아 보이는 겁니다.”
턱을 붙잡힌 채 눈을 내리깐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특별한 이상이 없는 리온의 뺨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친 입술 쪽을 살폈다.
‘세수할 때 아프려나?’
그 생각을 하니 내 입술이 다 아팠다.
“큼, 크흠!”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린 그때, 단장이 요란한 헛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
리온은 건조한 눈으로 단장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짜내듯이 말했다.
“저런. 감기 걸리셨으면 어서 들어가서 주무세요, 단장님. 우리 아가씨한테 옮을라.”
“아가씨! 저놈 저거 안 다쳤습니다……! 저, 저런 불여우를-!”
단장이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자, 리온이 두 손으로 내 귀를 덮어 버렸다. 단장의 감기가 옮을까 걱정이 됐는지, 그는 얼른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단장에게서 멀어지고 나서야 리온은 손을 뗐다.
나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리온. 내가 가야 할 곳이 생겼는데, 같이 갈래?”
“아카데미에서 권유하는 법을 배워 오셨나요?”
“넌 어디든 나랑 같이 가는 거야. 해 뜨면 바로 출발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리온의 말에 나는 냉큼 태도를 바꿨고, 리온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땅히 그리해야지요. 저는 아가씨의 호위니까요.”
*
이른 새벽, 나는 오랜만에 정원을 구경하기 위해 정원 산책을 나섰다. 어렸을 적 카인이 걸어둔 마법 때문에 가시를 찾아볼 수 없는 장미 정원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슈아 역시 잠이 오지 않는다며 나를 따라왔다. 나는 슈아에게 아카데미에서 만난 그녀의 오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슈바가 연기하는 걸 네가 직접 봤어야 해. 무대 위에 선 슈바는 진짜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았다고.”
“하지만 오빠가 로맨스물의 남주인공이라니…… 속이 별로 안 좋아요.”
상상만으로도 속이 나빠진 것인지, 슈아가 질색하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녀는 슈바의 멜로 눈깔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슈바가 들으면 울겠는데?”
“그럴 리가요. 오빠는 제가 무슨 말만 하면 코웃음을 치면서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린다고요!”
오랜 친구인 다이애나를 사랑하는 남주인공 말렉은 뒤에서 가운뎃손가락을 놀리고 다니는 녀석이었다.
어렸을 땐 아픈 슈바를 그렇게 걱정하더니.
슈바의 욕을 하는 슈아의 모습에 내가 소리 내어 웃던 그때, 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 이름을 부른 카인이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카인의 반대쪽 손에는 짐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저 가방을 들고도 손이 떨리지 않는 걸 보니 마법을 쓴 거겠지.’
나는 슈아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카인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