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62화
레이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며 걸었다. 늘 칼바도스가 서 있던 자리를 율리안이 채웠고, 우리는 교수님 욕과 성대모사를 하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율리안이 성대모사를 너무 잘해서, 웃다가 토할 뻔했다. 내가 헛구역질을 하자 아쉽게도 그는 성대모사를 관뒀다.
“에녹아, 잘 들어가라! 공자도 잘 가요!”
“예, 공녀님!”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두 사람을 향해 한쪽 손을 마구 흔들어 주었다.
왼손과 달리 오른손이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오른손에 사탕을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걸 왜 또 산 건지.”
잘 먹지도 않는 사탕을 홀린 듯이 사 버리고 말았다.
저번에 자습실에서 셀레네에게 사탕을 사다 준 적이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셀레네를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늦었으니 공주님 책상에 두고 올까.
시간이 늦었으니 자러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면서, 자습실 문을 잠그고 갔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자습실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에서, 나는 가장 윗 계단의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셀레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우 씨…… 깜짝이야.’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어두운 얼굴로 계단에 앉아 있는 셀레네는, 굉장히 음침해 보였다. 밝고 희망찬 자세로 슬픔을 이겨 내는 여주인공이, 조명 하나 없는 어두운 복도에 잡아먹힌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낯설어, 나는 나도 모르게 멍하니 셀레네를 올려다보았다.
“왜 거기서 그러고 계세요?”
“……그냥, 가족 걱정을 하느라요.”
셀레네가 걱정할 만한 가족은 하나뿐이다.
“프리아모스 자작님이요?”
“가족이라는 말에 왕비님과 전하, 두 왕자님도 아닌 내 외할머님을 가장 먼저 떠올린 걸 보니, 공녀는 왕국 사정을 꽤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실수한 건가?
셀레네가 레오폴드 공작과의 혼인을 피해 제국 아카데미로 도망친 것을 아는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셀레네에게 아카데미행을 권한 이가 그녀의 외할머니인 프리아모스 자작이라는 사실까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공주님이 제국 사정에 대해 아시는 만큼 저도 왕국 사정을 아는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뻔뻔하게 답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자작이 셀레네의 후견인이 된 사실은 극비 사항이 아니라, 알려고 하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계단을 올라 셀레네의 옆자리에 앉은 나는, 바로 뻔뻔스러운 얼굴을 거두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작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잠시 답을 망설이던 셀레네가 입을 열었다.
이미 왕국 사정을 알 만큼 아는 내게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번 여름에 왕국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왕국에 돌아오면 왕비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편지가 왔어요.”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가 구겨졌다.
“사실 처음 아카데미에 왔을 땐 정말 신이 났어요. 왕국을 벗어나 왕비님이 없는 곳에서 공부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외할머니가 너무 걱정돼요. 왕비님뿐만 아니라 공작가와도 척을 졌는데, 어떻게 내가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말의 끝을 향할수록 목소리가 높아졌다.
셀레네는 떨리는 숨을 내뱉은 뒤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곧 자신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왕비를 거스를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뒷일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신나 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칼린 2왕자를 지지하는 조건으로 왕비에게 셀레네를 요구한 공작은 이미 장성한 아들을 둘 정도로 나이가 차다 못해 많은 놈이었다.
공작은 양심이 없고 왕비와 칼린은 셀레네를 물건 취급하니, 공주의 처지가 딱했다.
“트로이센 공자도 공주님이 제국에 남는 걸 알고 있나요?”
아니까 셀레네를 따라 제국에 남는 거겠지. 대화를 쉽게 이어 가기 위해 일부러 아는 사실을 물었다. 하지만 셀레네의 입에서 나온 답은 뜻밖이었다.
“아뇨. 아직 유리에겐 말하지 않았어요.”
‘말을 안 했다고……?’
그럼 대체 율리안은 왜 제국에 남겠다고 한 거지?
누군가가 바늘로 내 무릎을 쿡 찔러서, 둔해진 감각이 서서히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제국에 남는다는 셀레네의 말을 듣고, 셀레네의 곁에 남기 위해 갑작스럽게 만들어 낸 계획이 아니었나?
셀레네의 말을 듣고 남기로 결정한 게 아니라면,
‘설마 율리안은 셀레네가 왕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셀레네보다 더 먼저 알고 있었던 건가?’
율리안에게 그런 정보를 전해 줄 사람은 리오스 왕자뿐이며 그런 명령을 할 사람 역시 리오스 왕자뿐이다.
하지만 셀레네는 자작의 편지를 받고 제국에 남기로 정했다.
리오스는, 자작이 셀레네에게 그런 편지를 보낼 것을 알고 율리안을 제국에 남겼다. 리오스와 자작이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거다.
‘이상해.’
천천히 셀레네와의 대화를 되짚어 보니 이상한 점이 가득했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다지만, 외손녀를 그토록 사랑하는 외할머니가, 시종이나 호위 하나 없이 외손녀를 낯선 제국 땅에 남겨 둔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자작이 셀레네에게 시종과 호위를 따로 보내지 않은 이유는, 이미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셀레네의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누구인가.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종이나 호위의 역할이 아닌 친구의 역할로, 언제나 셀레네의 곁에 머문 남자가 있었으니까.
‘그게 율리안이었구나.’
자작은 율리안이 왕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셀레네의 곁에 머물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래서 셀레네에게 제국에 남으라고 편지를 보낸 거고.’
자작은 율리안과 리오스의 관계뿐만 아니라, 율리안이 리오스의 명을 받아 셀레네를 감시하는 것까지 알고 있는 것이다.
일개 자작가에서 왕비의 뜻을 거스르고 레오폴드 공작가와 척을 졌다.
외손녀를 보호하기 위해 독단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다.
‘리오스가 자작의 뒤를 받쳐 주고 있는 건가?’
프리아모스 자작과 리오스 왕자가 셀레네를 제국에 두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셀레네와 공작의 혼인을 막으며 자작은 셀레네를 보호하고, 리오스는 칼린을 견제할 수 있다.
‘자작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셀레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국으로 돌아가겠지.’
힐다 왕비는 왕국으로 돌아간 셀레네를 붙잡아 둘 것이다.
‘그러니 리오스는 셀레네가 돌아오지 않도록 자작을 보호할 거야.’
셀레네가 외할머니인 프리아모스 자작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율리안은 셀레네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셀레네의 일과를 리오스에게 보고했다. 그 감시의 목적은 견제였다.
하지만 자작과 리오스가 한뜻을 품은 지금, 상황이 달라졌다.
율리안의 감시 목적이 견제에서 보호로 일시적으로 변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우선순위가 있어. 나에겐 너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리오스 왕자님의 명령이 우선이야. 그건 내 안에서 절대 변할 수 없는 원칙이지.’
율리안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리오스 왕자의 명령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율리안은 셀레네를 구하고 죽었다.
‘마지막 순간만큼은 리오스의 명령이 아닌 셀레네를 택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율리안의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셀레네를 ‘보호’하라는 것이 왕자가 내린 명령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율리안은 리오스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거 아닌가?
‘내가 셀레네 머리를 두 번이나 내리칠 동안 대체 어디서 뭘 한 거야?’
셀레네를 공격한 사람은 나였으나, 괜히 엄한 놈에게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율리안을 원망해 봤자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을 증명하는 꼴이었기에 나는 원망을 관뒀다.
“그러고 보니 트로이센 공자도 제국에 머물기로 했대요. 알고 계셨나요?”
“유리도요?”
“네. 두 분 다 머무실 곳은 생각해 두셨나요?”
“나는 아마 기숙사에서 지낼 것 같은데…….”
왕족이 방학 동안 기숙사에서 지낸다고?
내 표정이 눈에 띄게 변하자, 셀레네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아직 확실하게 정하신 게 아니라면, 두 분 다 공작저에서 지내시는 건 어때요? 기숙사보다 편하고 안전할 거예요.”
“정말 끌리는 제안이긴 한데…… 이렇게 취한 상태에서 함부로 약속해도 돼요?”
“저는 취하지 않았어요.”
술을 마시긴 했지만, 셀레네의 말을 듣고 리오스와 자작의 관계에 대해 제법 날카로운 판단을 내리지 않았는가?
취한 상태로 이런 판단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술 냄새가 나는걸요?”
“공주님이 저한테 취하신 거겠죠.”
고개를 기울인 채 실실 웃으며 셀레네를 바라보자, 당황한 셀레네가 얼어붙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후,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내 손을 잡아당겼다.
“……공녀는 취한 게 맞아요. 빨리 들어가서 자요.”
“들어가서 자면 공작저에서 지내 주실 거예요?”
셀레네가 여주인공이라서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타국의 왕족이기 때문에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타국의 공주가 기숙사에서 머물다가 나쁜 일이 생기면 왕국 쪽에서 말이 나올 것이 뻔했다.
제국과 왕국이 남매의 나라라는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계단에 엉덩이를 딱 붙인 채 셀레네의 답을 기다렸다.
“유리랑 상의해 본 후 답해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죠.”
잠시 고민하던 셀레네가 대답을 미뤘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율리안과 셀레네가 집을 구하고 호위를 고용한다 해도, 공작저보다 안전하진 않을 것이다.
감시의 목적이 ‘보호’인 이상, 율리안은 내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할 것이다.
*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친절한 셀레네는 나를 방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피오나가 자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쉬이 잠들지 못해 눈을 감는 대신 나무 천장의 무늬를 눈에 담았다.
눈을 감지 못한 이유는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고,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한 가지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리오스는 왜 이런 번거로운 선택을 했을까.’
리오스의 목적은 셀레네와 공작의 혼인을 막는 것이다.
‘그럼 그냥 죽이는 게 빠를 텐데…….’
굳이 데면데면한 외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후 셀레네를 아카데미로 보낼 필요가 없었다. 왕비의 패가 된 셀레네와 공작과 혼인 이야기가 오갔을 때, 그때 그냥 죽여 버렸어도 그만이니까.
‘어렸을 땐 셀레네에게 독을 보냈잖아.’
아버지를 죽인 숙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셀레네를 그토록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하면서.
‘왜 리오스는 아직까지 셀레네를 살려 둔 거지?’
그 답을 찾지 못한 탓에,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