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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61)화 (61/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61화

성이 난 칼바도스에게 하트를 선사한 나와 레이델은 느긋하게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회식 장소에 도착했다.

‘율리안 트로이센은 아직 안 왔나.’

레이델과 함께 구석의 작은 테이블에 앉으려는데, 제법 반반하게 생긴 귀족 청년 둘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공녀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금주령도 끝나셨는데, 마음껏 즐기시지요!”

“마침 자리를 잡아 뒀습니다. 이쪽입니다, 리베르트 공녀!”

그들은 나를 안쪽으로 안내하더니 비어 있는 자리 하나를 가리켰다. 내 자리랍시고 상석 하나를 마련해 둔 것 같았다. 자리에 있던 검술학부 귀족들이 일어서서 나를 반겼다.

평소였다면 기껍게 저기 앉았겠지만…… 지금은 나 혼자가 아니다.

“나와 에녹 경 둘이 앉기엔 자리가 너무 좁지 않나. 다른 곳에 앉을 테니 나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영웅 에녹 헤르트의 위치는 애매하다. 그에게 흥미를 가진 귀족들도 꽤 있었지만, 그런 그를 곱게 바라보지 않는 귀족들도 꽤 있었다.

특히 귀족 남자들의 경우엔 더 심했다. 오히려 귀족 여성들은 레이델을 좋게 봤는데…… 아, 이제 생각해 보니 그래서 남자들이 레이델을 더 싫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레이델과의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 그의 팔을 감싼 채 구석 테이블로 몸을 이끌었다. 폐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 건지 레이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저 때문에…….”

“너 때문에 그런 게 아니야. 트로이센 공자가 오면 비밀 연애에 대해 캐물어야 하니까 거절한 거지.”

처음부터 칼바도스에게 셀레네와 율리안의 사정을 캐묻는 게 나았겠지만, 나도 모르게 칼바도스를 두들겨 패고 도망치는 바람에 다시 얼굴을 보기 껄끄러워졌다. 그러니 율리안이 자리에 오면 구석으로 끌고 가서 캐물어야 한다.

그나저나 칼바도스 그 자식은 대체 왜 자기가 연애 상담을 해 주고 앉아 있지?

‘하여간 미친 인간.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나는 레이델과 함께 구석에 놓인 4인용 테이블에 앉았다.

“트로이센 공자는 언제쯤 올까요?”

“글쎄…… 공주를 바래다준 뒤에나 오지 않을까.”

“그런데 공녀님.”

“응?”

누가 들으면 안되는 이야기인지, 레이델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왜 트로이센 공자와 공주님의 연애 소식을 듣고 화가 나신 겁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두 분을 이어 줬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신 것 같아서요.”

아. 그러고 보니 이상해 보였을 수도 있겠다. 내가 율리안을 좋아해서 율리안과 셀레네를 이어 준 칼바도스에게 화를 낸 걸로 생각할 수도 있고.

레이델이 오해할까 싶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시몬의 공주가 황태자비가 되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황태자 전하와 공주님을 이어 줄 생각이셨습니까?”

“그래. 원래 그래야 했는데 다 망했어.”

‘원래?’

내가 크게 티 나지 않을 사소한 말실수를 깨달은 그때, 딸랑― 하는 경쾌한 소리가 문 쪽에서 들려왔다.

셀레네와 데이트를 마친 율리안이 주점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다른 사람이 율리안을 데려가기 전에 내가 크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오! 친애하는 트로이센 공자! 빨리 우리 테이블에 와서 앉아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거든요!”

처음엔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그는 곧 반가운 얼굴로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왔다. 그리고 나와 레이델은 율리안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를 안쪽 자리에 앉혔다.

“듣고 싶은 이야기라니요. 공녀가 나를 이리 환대할 정도면…… 혹시 시몬의 국가 기밀을 알고 싶은 겁니까? 유감이지만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건 아니고요.”

“그럼 뭔가요?”

내가 가까이 와 보라는 듯 손짓하자 율리안이 몸을 숙였다.

“공주님이랑은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습니까?”

율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표정 관리 못 하는 것 봐라, 이놈.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만 다른 자리로-”

“앉아요.”

“네.”

누나가 셋이나 있어서 그런가, 율리안은 말을 참 잘 들었다. 말 한 마디에 얌전히 자리에 앉는 게 우스웠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니요. 나와 에녹 경은 시력이 아주 좋습니다. 그렇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두 분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걸으시는 모습을요.”

“……!”

목격자가 셋이나 있음에도 잡아뗄 생각이었는지, 율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호숫가에서의 일을 말하는 거라면-”

“호숫가에서도 잡았어요……?”

“호숫가에서도 잡으셨습니까?”

“……아.”

우리는 그냥 길거리에서 봤는데…… 다른 데서도 잡으셨군요.

비밀 연애한다더니 여기저기서 손잡고 다닌다. 둘 사이를 상담해 준 칼바도스가 어이없어할 만도 했다.

당황한 것도 잠시, 율리안이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단순한 에스코트였습니다.”

“손깍지까지 끼고요? 그것도 오늘처럼 손만 스쳐도 짜증 날 정도로 더운 날?”

“그건…….”

또 아니라고 할 생각인가? 나는 두 사람의 사이에 대해 캐묻기 위해 조금 거짓말을 보태기로 했다. 그리고 추궁하듯 묻던 조금 전과는 달리, 다정한 목소리를 꺼냈다.

“공자. 우리가 정말 손깍지만 봤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 그것까지 보셨다면 정말 부정할 수 없겠군요.”

‘뭘 했는데…….’

아니야, 거기까진 알려고 하지 말자.

음, 어쨌든 다른 것도 하긴 했다는 게 밝혀졌다. 뒤늦게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아채고 상황판단을 한 레이델이 말을 덧붙였다.

“트로이센 공자님. 공녀님과 저는 입이 아주 무겁습니다.”

“맞아요. 그러니까 빨리빨리 말해 봐요, 육하원칙 적용해서!!!”

내가 재촉하며 테이블을 쾅쾅쾅 내리치자 율리안이 쫄았다. 어차피 다들 자기들끼리 마시고 노느라 이쪽엔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자꾸 주위를 살폈다.

“진짜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약속드립니다.”

그는 조금 전 내가 그랬듯이 가까이 와 보라는 듯 손짓했고, 사과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쯤, 공주님께서…….”

뭐, 대충 요약하자면 율리안을 더 이상 친구로만 볼 수 없게 된 셀레네가 먼저 고백을 했고, 지금 알콩달콩 사귀는 중이다, 그런 이야기였다.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부끄러웠는지 율리안은 몇 번이고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어쨌든 율리안의 앞이었기 때문에 나는 축하한다고, 예쁜 사랑 하라는 말을 해 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깨져라.’

율리안은 똥차다.

그는 리오스 왕자의 명령에 따라 셀레네를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고백을 차면 셀레네와 멀어질 테니 가까이에서 감시하기 어려워진다는 핑계로 셀레네의 고백을 받은 것 같다만…… ‘가까이에서 감시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이런 핑계로 즐길 건 다 즐기고 있었다.

진실을 알게 된 셀레네에게 두 배로 상처 주는 짓이었다.

“큼, 두 분은 방학 때 특별한 계획이 있으십니까?”

분위기가 민망했는지, 율리안이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대놓고 말을 돌리는 게 티 났지만 그냥 받아 줬다.

“극단 사업 쪽만 살펴보고, 그 뒤론 늘어지게 쉴 겁니다.”

“저는 딱히 없습니다.”

“그럼 에녹 경은 나랑 같이 쉬면 되겠네.”

“같이 말입니까?”

깜짝 놀란 레이델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럼 따로 쉴 생각이었던 건가? 어차피 공작저 아니면 갈 곳도 없으면서.

“나랑 따로 쉬려고?”

“……아니요, 저도 공녀님과 같이 쉬고 싶습니다.”

레이델이 입꼬리를 올리며 연거푸 잔을 들이켰다. 칼바도스는 이번 여름에 바쁘다. 그러니 우리끼리 재밌게 놀아서 그를 약 올려 줄 작정이었다.

“공자는 뭘 할 생각인가요? 왕국으로 돌아가나요?”

“아뇨. 저는 학기 초부터 제국에 남아 여기저기 관광을 다닐 생각이었습니다.”

거짓말을 참 야무지게도 하네.

‘학기 초부터 그런 계획을 세웠다고?’

셀레네는 방학 전 외할머니에게서 온 편지를 보고 제국에 남기로 결심한다.

율리안은 셀레네가 제국에 남는다는 말을 듣고 따라 남기로 한 것이니, 학기 초부터 그런 계획을 세우는 건 불가능하다.

급조한 변명이었다.

‘셀레네가 왕국에 돌아간다고 하면 따라 돌아갔겠지.’

어떻게든 셀레네의 곁에서 머물려고 안달이구나.

나는 그의 뻔뻔함을 비웃으며 술을 넘겼다. 이제 곧 방학이니 적당히 쉬면서 레이몬드와 연락을 취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

나와 레이델, 율리안은 다른 학생들보다 일찍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율리안과 레이델이, 내가 사고를 쳐서 금주령이 연장되는 상황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식당 주인에게 돈을 주고 사탕 한 병을 얻은 게 기뻐서 순순히 걸어 나왔다.

겉옷을 두고 왔다는 율리안을 기다리던 때, 기다란 내 그림자가 보였다. 그 옆에 있는 레이델의 그림자는 훨씬 컸다. 옆에 있던 레이델의 어깨에 얼굴을 부딪쳤는데, 새삼 그의 키가 실감이 났다.

“너 진짜 많이 컸구나. 처음 만났을 땐 엄청 작고, 빼빼 말라 있었는데.”

그 작고 마른 녀석이 든든한 영웅이 되어 내 앞에 서 있었다.

하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댔다. 9년이란 시간은 레이델을 바꾸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나도 변했으려나.

나는 레이델을 통해 그간 느끼지 못했던 9년의 세월을 실감했다.

“그랬지요. 그때…… 공녀님께서 저를 구해 주신 날 말입니다. 그날, 저는 어린 공녀님이 정말 커 보였어요.”

“그랬어? 그런데 지금은 내가 너보다 작네. 더 컸어야 하는데.”

“아니요, 지금도 정말 크십니다. 그래서…… 공녀님께선 제 안을 꽉 채우고 계세요.”

술 퍼먹고 어릴 때를 떠올리니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가, 레이델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순간, 레이델과 나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조금 전 그의 말처럼 내가 그를 꽉 채운 듯한 모양새였다.

그림자를 보니 기분이 묘해졌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조금 전 레이델의 눈빛이 애달파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기 바빴다.

잠시 뒤 가게에서 율리안이 나왔고, 레이델은 훌쩍이며 얼굴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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