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60화
“알았어. 같이 놀면 되잖아…….”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쓸며 껄끄러운 얼굴로 답했다.
“다음 주 목요일에 뭐 해?”
“독서 모임 나가는 날인데-”
남들 앞에서 표정을 잘 숨기는 칼바도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고스란히 비쳤다.
“내 말 끝까지 들어. 독서 모임 나가는 날인데, 안 나갈 거라고 말할 참이었어.”
“왜 안 나가는데?”
“거기 사람들은 다 오시미우스를 싫어하더라. 나는 진짜 좋아하는데.”
“나도 좋아해. 아, 물론 오시미우스를.”
우리가 영웅 오시미우스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건, 우리 둘 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렸을 땐 루카스까지 껴서 오시미우스 놀이를 한 적도 있었다. 그를 따라 도끼 머리 열두 개를 늘어놓고, 그 구멍 사이로 화살을 쏘는 놀이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칼바도스는 나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듯이 말했고, 나는 그 말을 처음 들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아…… 정말? 너도 오시미우스를 좋아한다고?”
“어. 그런데 어떤 못된 녀석이 뒷이야기를 스포해 버린 게 한이야. 물론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9년 전 일을 아직도 기억하다니. 그것도 일기장에 적어 놨나 보다.
하여간 뒤끝이 긴 녀석이다.
“독서 모임 상대로 나는 어때? 나는 너랑 취향이 비슷하잖아.”
“음…….”
친구 없는 건 불쌍하긴 한데…… 너무 나랑만 놀면 안 되지 않나?
내가 쉽게 답하지 않자, 칼바도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내 망설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놀아 주겠다더니?”
“……알았다고. 도스 너, 다음 주 목요일에 바빠?”
형식상 그렇게 묻자, 칼바도스가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남들이 한심하게 바라볼 정도로 한가해.”
자랑할 말은 아니었지만, 칼바도스는 저가 한심해 보일 정도로 한가하다는 사실이 참 자랑스러운 것 같았다.
*
피오나가 기다리는 방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수석 자습실이 있는 5층에 먼저 들렀다.
자습실 안에서 따뜻한 느낌의 노르스름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셀레네가 글을 쓰고 있구나.’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 있던 셀레네가 문을 열었다.
“공녀? 무슨 일이에요?”
도서관에서의 공포스러운 모습과 달리,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말끔하게 묶은 모습이었다.
지난번 실수를 사과하고 약간의 친분을 다져 두기 위해서, 나는 알록달록한 사탕이 들어 있는 병을 하나 내밀었다.
“글을 쓰고 계시다면서요.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셀레네는 달달한 사탕을 하나씩 입에 물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사탕을 발견한 셀레네가 환한 얼굴로 병을 건네받으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자습실에 간식까지! 고마워요. 공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
“제가 좋은 사람은 맞긴 한데…… 너무 빨리 판단하시는 거 아닌가요?”
셀레네가 나를 좋게 보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공주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거 아닙니까?
‘나랑 몇 번이나 대화해 봤다고?’
대화라고 해 봤자 내 쪽에서 셀레네를 공격한 뒤 사과를 하고, 셀레네가 사과를 받아 주는 게 다였다.
너무 이른 판단이 아니냐는 내 물음에, 셀레네는 손에 들린 사탕을 가리켰다.
“빠르긴요. 먹을 거 주는 사람은 다 좋은 사람이랬어요.”
맞다.
먹을 거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다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오빠한테 독살당할 뻔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아니면 내 생각보다 셀레네가 생각이 없거나.
나는 찝찝한 마음으로 자습실을 나섰다.
*
시간이 흘러, 기말시험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검술학부 학생 모임 3시간 전, 나와 레이델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모임 장소에 나가기로 했다.
나는 근처 카페의 2층 테라스에서 차를 한잔 마시고, 최대한 늦게 모임에 나갈 생각이었다.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한산한 곳이었기에, 일부러 그 카페를 택했다.
그런데 테라스엔 칼바도스가 있었다.
‘쟤가 왜 여기 있지.’
칼바도스를 발견한 레이델이 조용히 물었다.
“공녀님, 다시 나갈까요?”
“다 들리거든. 빨리 와서 둘 다 내 앞에 앉아라.”
작게 물어봤다고 생각했는데 다 들렸나 보다.
어쩔 수 없이 나와 레이델은 칼바도스의 앞자리에 착석했다. 칼바도스의 말 때문이 아니라, 다른 곳을 찾기 귀찮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칼바도스의 손에 들린 책이었다.
“그건 뭐야?”
“문집이야. 공주가 선물해 줬어.”
셀레네가 속한 동아리의 문집이었다.
동아리 부원들만이 소장하는 문집이었지만 선물용으로 두세 권을 주문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셀레네는 그중 한 권을 칼바도스에게 선물한 거고.
깔끔한 하얀 표지에는 동아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도 읽어봐도 돼?”
“어차피 필명이라 어떤 게 공주가 쓴 글인지 모를걸.”
‘알거든.’
칼바도스는 순순히 내게 책을 건넸고, 나는 바로 셀레네의 필명을 찾았다.
하지만 단번에 셀레네의 글을 찾아 읽으면 이상하니까 다른 글도 함께 읽기로 했다.
그리고 잠시 뒤, 문집의 내용을 확인한 나는 바로 책을 덮었다.
‘……뭐야, 이거.’
셀레네가 쓴 단편 소설의 내용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자신의 짝사랑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아주 열정적으로!
심지어 짝사랑 대상은 칼바도스가 아니다.
셀레네는 칼바도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서브남주 율리안 트로이센이고, 칼바도스는 셀레네의 상담 친구로 등장한다.
소설에서도 셀레네가 칼바도스를 ‘잭’이라는 바꾸어 등장시켰기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분명 셀레네는 율리안을 친구로만 봤는데.
나는 아니꼬운 눈으로 칼바도스를 노려보았다.
‘칼바도스가 왜 갑자기 셀레네의 상담 친구가 됐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하지만 칼바도스에게 자세한 상황을 물어볼 틈도 없었다.
저 아래에서, 셀레네와 율리안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왜 둘이 손잡고 다녀?’
그리고 모퉁이에서 다른 사람이 튀어나오자, 두 사람은 손을 풀었다.
2층 테라스에 앉아 있던 우리 셋 모두 그 광경을 목격했다.
“방금…… 공주님이랑 트로이센 공자가 손을 잡은 것 같은데. 내가 제대로 본 거 맞지?”
“……잘못 본 거 아니야? 난 못 봤어.”
칼바도스가 뻔뻔하게 모른 척을 했다.
현실 부정인가? 하지만 현실 부정보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숨기기에 급급해 보였다.
“에녹.”
“저도 똑똑히 봤습니다. 무려 손깍지를 끼고 계셨습니다.”
나는 냉큼 칼바도스의 손등을 내리쳤다.
“칼바도스 너도 봤으면서 왜 못 본 척이야. 방금 공주님이랑 트로이센 공자 둘이 손잡았잖아!”
“……에스코트겠지. 공주는 몸이 약하잖아.”
“너 나 에스코트할 때 손깍지 낀 적 있어? 없잖아! 두 사람 손을 봐, 깍지 꼈다고!”
나는 미친 듯이 셀레네와 율리안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맞은편에 있던 칼바도스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쓸었다.
“……아니, 비밀 연애 한다더니, 저 둘은 뭐 저렇게 티를 내냐? 내가 뭘 감춰 줄 수가 없네!”
비밀 연애라고?
‘왜 네가 아니라 저 둘이 사귀는데?’
러브라인이 엇갈렸다.
“공주님과 트로이센 공자님이 사귀는 사입니까?”
혼란에 빠진 나 대신 칼바도스에게 사실 확인을 한 것은 레이델이었다.
“그래. 비밀이라니까 어디 가서 말하지 말고. 뭐, 저러고 다니면 얼마 안 가서 다 들키겠지만.”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게. 정말 전혀 몰랐다.
“언제부터 사귄 거래?”
“네가 도서관에서 공주 머리를 내리친 날.”
그래서 그때 의무실에서 칼바도스가 셀레네한테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구나.
이제야 두 사람의 흐릿한 대화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기분이 좋아진 칼바도스가 입을 열었다.
“크흠, 저 둘을 이어 준 일등공신이 누군지 알아?”
“누굽니까?”
“누군데?”
그 일등공신 찾아서 죽이게. 자꾸 주먹에 힘이 들어가서 나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칼바도스는 해맑게 말했다.
“나야. 깜짝 놀랐지?”
방금 전 나는 두 눈을 의심케 한 광경을 목도했고, 지금은 두 귀를 의심하고 있다.
이제 나는 내 눈과 귀 모두를 믿지 못할 처지에 나앉았고 말았다.
“칼바도스 네가 이어 줬다고……?”
그런데 뭘 뿌듯해하고 자빠졌어?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다른 질문이 먼저였다.
“네가 어떻게 두 사람을 이어 줬는데?”
“너랑 데이트 과제를 하려고 티켓을 구했는데, 네가 더 좋은 자리를 잡았길래 공주한테 선물했지. 네가 공주 머리를 깼으니까 사과의 의미로. 그런데 그 연극을 보고 공주가 트로이센을 향한 마음을 자각한 모양이야.”
‘이런 거지 같은!’
칼바도스가 공주에게 베푼 호의의 이유는, 나의 실수 때문이었다.
“그 뒤엔 공주가 트로이센에게 고백을 한다길래 응원도 해 줬지.”
정말 모든 이야기가 엉망진창이 됐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 남주인공이 여주인공과 서브남주를 밀어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찬찬히 되짚어 보려던 나는, 곧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칼바도스에게 그의 겉옷을 내놓으라고 손을 내밀었다.
“네 겉옷 좀 벗어 줘 봐.”
“넌 더위도 많이 타는 애가 왜.”
“추위도 더위만큼 많이 타니까 내놔. 나 추워.”
자리에서 일어난 칼바도스가 내 뒤로 다가오더니, 내 어깨에 재킷을 걸쳐 주었다. 그리고 칼바도스가 서 있는 틈을 타 재빨리 외쳤다.
“에녹, 얘 좀 붙잡아. 빨리!”
“예!”
“뭐, 뭐 하는 거야!”
레이델이 칼바도스를 뒤에서 꽉 붙잡았고, 나는 칼바도스의 머리에 그의 재킷을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소매 부분을 묶어 머리를 재킷으로 꽁꽁 싸맸다.
나는 칼바도스의 오금을 냅다 발로 찼고, 신음과 함께 그의 무릎이 무너졌다.
“이 화상아! 네가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너 때문에 내 속이 말이 아니야!”
나는 그렇게 칼바도스를 두들겨 팬 뒤, 레이델과 사이좋게 달아났다.
뒤에서 칼바도스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뛰느라 정신이 없어서 듣지 못했다.
그리고 1층에 도착했을 때, 난간에 몸을 반쯤 걸친 칼바도스가 우리를 손가락질하며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야! 너희 이거 황족 폭행이야, 알아? 이건 진짜 처벌할 거야! 내가 맨날 말로만 처벌한다고 하니까 우습게 보나 본데, 진짜 처벌할 거라고!”
1층에 있던 나와 레이델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머리 위로 크게 하트를 그려 줬다. 약이 오른 칼바도스가 신경질적으로 난간을 내리쳤지만, 우리는 1층에 있어서 안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