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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59)화 (59/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59화

다음 날, 검술 이론 수업이 끝나고 대련장으로 향하려던 나를 붙잡은 것은 율리안 트로이센의 무거운 목소리였다.

“잠시 시간 괜찮습니까, 공녀?”

그가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레이델을 먼저 대련장으로 보냈다.

길 한가운데에 나를 세워 둔 채 율리안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공녀, 저번 금요일에 셀레네가 황태자 전하와 식사한 거 알고 있었어요?”

‘금요일?’

저번 금요일이라면, 시험이 끝나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서 긴 낮잠을 잔 날이었다.

그날 칼바도스와 셀레네가 만났다고?

그 말을 듣자 어제 새벽, 두 사람이 의무실에서 키득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드디어 관계에 진전이 있는 건가?’

그나저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나한테 가장 먼저 말해 줄 줄 알았는데.

바로 말해 주지 않은 것을 보니, 아직은 호감 단계인가?

‘칼바도스 이 녀석, 언제쯤 나한테 연애 고민을 털어놓으려나.’

조만간 나한테 셀레네를 소개해 주겠지.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그린 내가 실실 웃으며 되물었다.

“두 분이 따로 만남을 가지셨다고요?”

하지만 율리안은 그런 내 미소가 굉장히 찝찝한 모양이었다.

“……공녀. 왜 그렇게 웃어요?”

“그냥, 오늘따라 날씨가 좋아서요. 그래서 웃습니다.”

봄이구나, 봄.

내 친구의 마음에 봄이 왔어.

그는 계속 웃고 있는 나를 미친 여자처럼 바라보더니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혹시 눈이 나쁩니까? 오늘 먹구름 꼈습니다.”

“그래요?”

‘먹구름이 낀 건 네 마음이겠지!’

나는 속으로 율리안을 실컷 비웃어 주었다.

서브남주인 율리안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율리안은 셀레네보다 리오스 왕자의 명령을 더 우선으로 하잖아? 리오스의 명으로 셀레네를 감시하고, 감시를 들키자 ‘너보다 왕자님 명령이 중요해!’라는 발언으로 셀레네에게 상처를 준 서브남주보단 칼바도스가 나았다.

물론! 마지막엔 왕자님 명령이고 나발이고 셀레네를 구하러 뛰어오지만 말이다.

나는 느긋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율리안의 말대로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지만 내 마음만큼은 아주 맑았다.

‘칼바도스가 원작대로 셀레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정말 다행이야.’

드디어 로맨스 소설의 본질을 회복하는구나!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던 로맨스의 씨앗이 뿌려졌으니 조만간 싹이 나고 꽃이 필 것이다.

정말 봄이다, 봄!

실제로는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전개가 조금 느리지만 다 알아서 진행되고 있었던 거야.’

지난 금요일, 나는 시험이 끝났으니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칼바도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잠들었다.

내가 칼바도스의 제안을 거절하니, 칼바도스와 셀레네가 만났다.

‘설마 내가 없어야 칼바도스가 자연스럽게 셀레네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건가.’

그러니까 그동안 셀레네를 만나야 할 시간에 나랑 헛소리를 주고받으며 깔깔거리고 있었던 거다.

‘어젯밤에도 칼바도스가 나와 레이델을 만나지 않았다면, 셀레네와 도서관에서 다른 방식으로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어떤 방식이든, 책으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보단 낭만적인 방식으로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만의 엔딩을 냈겠지.

소설에서 칼바도스와 사랑을 확인한 셀레네는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제국에 남아 황태자비가 되었다.

만약, 이대로 칼바도스와 아무 진전 없이 셀레네가 왕국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백 퍼센트 목 잘린다.’

결말부에 가면, 시몬 왕국과 제국은 매우 시끄러워지는데, 메릴 후작가와 칼린 2왕자의 밀거래가 밝혀져 칼린과 왕비는 왕국에서 처형당한다.

그간 왕비의 손에 자란 셀레네는 2왕자파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니, 왕위에 오른 리오스는 온갖 죄목을 갖다 붙여 셀레네를 죽일 것이다. 셀레네에게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뭐, 왕비 때문이 아니더라도, 리오스는 셀레네를 죽이고 싶어 하고.

레토가 죽은 뒤 어린 셀레네에게 독을 보낸 것도 리오스라고 나와 있었으니, 확실하다.

그러나 이부동생인 셀레네를 증오하는 마음과 달리, 소설에서 리오스는 셀레네를 죽이지 못했는데, 그건 셀레네가 황태자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칼바도스와 셀레네의 상황을 보니…….

음, 지금 셀레네의 목에 밧줄이 걸려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나는 주인공들의 해피엔딩에 끼고 싶었던 것이지, 주인공의 행복을 빼앗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일단 칼바도스를 좀 멀리해야겠어.’

칼바도스가 나랑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셀레네와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 테니까.

*

오후에 있던 문학 수업이 끝나자 칼바도스가 물었다.

“너 오늘 저녁에 뭐 해?”

“리스네 영애랑 저녁 약속.”

“내일은?”

“피오나랑 전시회 구경.”

“내일모레는?”

“휘스발트 영애가 여는 티 파티 참석.”

“……네가 원래 이렇게 바쁜 사람이었냐?”

“몰랐어? 그럼 난 약속이 있어서 이만.”

나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칼바도스를 무시하고 기숙사로 돌아가 식사 자리에 나갈 준비를 했다.

그 후로도 한동안 바쁘게 살았다.

사람을 모아 사냥을 나가기도 하고, 슈바를 만나 함께 대본을 맞춰 보기도 했고, 조별 과제를 해치우기도 했다.

물론 칼바도스와 레이델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도 했지만,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칼바도스와 필요 이상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며칠 뒤 저녁, 나는 피오나와 함께 독서 모임에 나갔다. 그리고 다신 그 모임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피오나와 독서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던 내가 피오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오시미우스를 싫어할 수 있지?”

다음 시간까지 영웅 오시미우스에 대한 책을 읽어 오자는 피오나의 말에, 모임 사람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꾀돌이 영웅이 뭐 볼 거 있냐는 투였다.

꾀돌이라서 좋아하는 거거든!

피오나와 내가 오시미우스 좋아하는 걸 몰랐나 보다.

알았으면 내 앞에서 그 말 못 했다. 아니면 모르는 척 일부러 한 말이거나. 어느 쪽이든 기분 더러웠다.

“다음 주엔 나가지 말자.”

“그게 좋겠어요. 하여간 맛도 모르는 인간들 같으니…….”

야식을 먹으며 퍼즐을 맞추기 위해 신난 발걸음으로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그때,

“리베르트 공녀, 이야기 좀 하지.”

정문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나보다 먼저 칼바도스를 발견한 피오나가 고개를 숙였다.

평소처럼 반듯한 차림의 칼바도스는 오늘따라 뭔가 아니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오나, 먼저 들어가 있어. 금방 갈게.”

칼바도스 역시 그게 좋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피오나의 모습이 멀어지고 칼바도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칼바도스가 다섯 살 먹은 애처럼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칼바도스가 물었다.

“너…… 요즘 왜 나랑 안 놀아줘?”

이 자식은 대체 뭐가 문제지?

할 말은 없었으나 황당했던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칼바도스를 바라보자, 오히려 그런 내 눈빛에 울컥한 칼바도스가 다시 물었다.

“이제 나랑 노는 게 재미없어졌어?”

이건 또 무슨 헛소린지 모르겠다.

‘자기가 무슨 초등학생이야?’

여덟 살 때도 안 하던 짓을 성인이 되어서 하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얘 친구 나밖에 없지.’

교류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친한 친구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친구 없는 칼바도스가 불쌍해졌다.

같이 노는 게 재미없냐니. 그럴 리가.

칼바도스와 함께 노는 것은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소득을 계산할 필요 없이, 아무 생각 없이 헛소리만을 주고받는 시간은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한테 잘못한 게 있나? 그게 아니고선 네가 나를 만나 주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그렇게 말하는 칼바도스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고민은 짧았다.

‘지금도 내가 싫어?’

나는 칼바도스의 모습에서 어린 날의 나를 찾았다.

비슷한 질문을 하는 칼바도스의 마음을 알 수 있었기에 나는 바로 부정했다.

“네가 싫어서 널 피한 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취미를 가져 보려던 참이었지.”

“……아직 나랑 노는 건 재미있지?”

“어.”

마지못해 답하자 칼바도스가 안도했다.

“그런데 네가 그런 생각도 해? 내가 너랑 안 놀아 줄 걸 걱정하고 살 줄은 몰랐는데.”

다들 칼바도스랑 친해지고 싶어 안달이라, 칼바도스가 그런 걱정을 할 줄 몰랐다.

내 말에 칼바도스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칼바도스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나는 너와 친구가 된 순간부터 몇 번이고 이런 생각을 했다고. 네가 꽤 오랫동안 나를 보러 오지 않으면, 나랑 노는 게 재미없어졌나 걱정을 했지. 그래서 언제 다시 올 거냐고, 영영 오지 않을 거냐고, 혹시 내가 재미없냐고, 내가 뭔가 잘못했냐고. 몇 번이고 그렇게 묻는 편지를 썼어.”

나는 어렸을 때 일부러 칼바도스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너무 자주 가면 칼바도스가 나의 소중함을 잊는다는 이유였다. 하도 티를 안 내서 그 작전이 먹혔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편지를 썼다니?’

“한 장도 안 왔는데?”

몇 번이고 편지를 썼다는 칼바도스의 말과 달리, 난 그런 편지를 받아 본 기억이 없었다.

“당연히 못 받았겠지. 쓰고 버렸으니까.”

“뭐? 그걸 왜 버려? 오타 나서?”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칼바도스는 편지를 썼다고 했지, 보냈다고 말하지 않았다.

기껏 쓴 걸 왜 버린 거지?

“자존심 상하게 그런 걸 어떻게 물어봐. 내가 너무 찌질해 보이잖아.”

“그럼 지금은?”

자존심이 상해서 편지를 버렸다더니, 지금은 잘도 물어보고 있었다.

과거에 편지를 쓰고 버렸다는 사실까지 낱낱이 불면서 말이다.

“……반의반 정도만 버렸지. 반의반만 버린 지금도 이렇게 구차한데, 여기서 더 버리면 얼마나 구차해질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네 발밑에 깔려 있을지도 몰라.”

“그건 별로 안 내키는데…….”

“마찬가지야. 차라리 카펫을 하나 사 주고 말지.”

“그럼 좀 사 줘 봐. 방에 깔아두게 비싼 걸로.”

“돈도 많은 애가 왜 이래?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공작가가 파산했어?”

하나 사 주고 말겠다더니 바로 말을 뒤집는다. 웃기는 놈.

기어이 카펫 하나를 뜯어내려고 했는데 칼바도스가 물었다.

“내 자존심 반의반이면 정말 많이 버린 건데. 이제 나랑도 좀 놀아 주면 안 되나?”

나 너 없으면 친구 없잖아.

그는 그렇게 덧붙였다.

눈치를 보며 비굴하게 웃는 모습이 정말 안 어울려서 소름이 돋았다.

놀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도, 눈치를 보는 것도 칼바도스인데, 괜히 내 쪽이 더 찝찝해지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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