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58화
나는 아주 간절히, 셀레네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내 기대는 박살 났다.
“아, 기억났어요! 공녀가 나를 마구 내리치던 중 의식을 잃고 쓰러졌죠!”
기억이 돌아와 신이 난 셀레네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엿 먹이는 건가?’
하지만 표정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내게 눈치를 주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셀레네는 정말 기억이 났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셀레네가 환하게 웃을수록, 저 아담한 사람을 때렸다는 죄책감이 몰려와 마음이 고통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그렇게 폭력적인 사람이 아닌데-”
“그나저나 공주는 왜 이 시간에 혼자 4층에 있던 겁니까? 10시 이후 학생은 출입 금지잖아요.”
미안한 마음에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칼바도스가 침대를 가린 커튼을 걷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지난번에 말씀드린 글을 구상하느라요. 혼자 있어야 글이 잘 써지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서 따로 허가를 구했죠. 아시다시피 거긴 사람이 잘 안 오잖아요.”
칼바도스는 셀레네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커튼 안에서, 셀레네가 말한 ‘지난번에 말씀드린 글’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건 나뿐이었다.
셀레네가 글을 쓴다고?
‘글이라니, 갑자기 무슨 글을…… 아.’
셀레네가 가입한 동아리에서 부원들이 익명으로 단편 소설을 쓰고 문집을 제작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문집에서 셀레네의 소설을 알아본 칼바도스가 셀레네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편이었지.’
칼바도스와 셀레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의 어머니 모두, 그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미움이 무관심으로 변해 가는 것을 느끼며 자란 셀레네와 다르게, 유년 시절의 칼바도스는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랐다.
문집에 실린 소설의 제목은,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셀레네는 자신의 이야기로 소설을 썼다.
비교적 밝은 분위기로 어머니께 아카데미의 소식을 전하는 초반부와 달리, 후반부에선 어머니를 향한 셀레네의 죄책감이 드러난다.
셀레네는 ‘엔디미온’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는데, 칼바도스는 ‘잭’, 율리안은 ‘안테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등장시켰다.
하지만 이름을 감추려는 셀레네의 뜻과 다르게, 칼바도스는 그녀가 작가 엔디미온이며, 자신이 ‘잭’이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지, 칼바도스와 셀레네가 함께 한 이야기가 재구성되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문집 에피소드는 셀레네의 상처를 알게 된 칼바도스가 그녀를 위로하고, 둘이 관계가 깊어지는 도구였다.
‘원래 셀레네는 도서관에서 소설을 쓰지 않았어.’
수석으로 입학한 셀레네에겐 수석 자습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셀레네의 성적은 뚝 떨어졌고, 이번 학기 수석 자습실은 내가 차지했다.
‘그래서 셀레네가 도서관에 간 거야.’
혼자 글을 쓸 수 있는 조용한 장소를 찾아서 말이다.
“그럼 공주님의 물건이 아직 도서관에 있는 거죠? 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가져올게요.”
“어, 음…… 빨간색 수첩이랑 펜 한 자루가 있어요. 미안하지만 부탁할게요.”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쉬이이-’ 소리를 내다가 봉변을 당한 셀레네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다.
내가 의무실을 나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자, 칼바도스가 침대를 둘러싼 분홍 커튼을 걷어 주었다.
그러자 눈을 가느다랗게 뜬 셀레네가 누운 채로 칼바도스를 흘겨보며 말했다.
“전하, 그 어두컴컴한 도서관에 공녀를 혼자 보낼 생각은 아니시겠죠?”
“물론, 함께 가야지요.”
마치 큰 선물을 받아 감사를 표하는 것 같았지만 중요한 건 아니라 무시했다.
나와 칼바도스가 도서관으로 향하려던 때, 반대쪽 침대에서 정신을 차린 레이델이 몸을 일으켰다.
“저도, 저도 공녀님을 따라가겠-”
“에, 에녹 경, 혼자 있으면 제가 외롭잖아요! 어떻게 괴물을 잡았는지 이야기 좀 해 주세요!”
혼자 있기 싫었던 걸까?
급히 몸을 일으킨 셀레네가 커튼을 걷고 급박한 목소리로 레이델을 붙잡았다.
레이델은 황당한 얼굴로 셀레네를 바라봤지만 셀레네는 눈을 피해 버렸다.
‘그러고 보니 레이델도 기절했었지.’
기절했던 녀석을 다시 도서관으로 데리고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레이델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너는 여기 남아 있어. 금방 올 테니까.”
“경이 또 기절할까 봐 걱정이 되는군. 편히 쉬고 있게.”
그렇게 말한 칼바도스가 레이델을 조롱하듯 콧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나를 내던지고 도망친 놈보다, 옆에서 기절한 놈이 믿을 만했다.
이건 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꼴이었다.
*
나는 칼바도스와 다시 4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귀신의 정체를 확인한 뒤였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칼바도스 역시 조금 전보다 훨씬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칼바도스의 반짝이는 뒤통수를 보며 말했다.
“나, 내년 네 생일에 줄 선물을 정했어.”
“벌써? 뭔데?”
“요강.”
“야, 너……!”
4층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리를 지른 칼바도스가 다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제 수치스러운 과거가 드러날까 염려하고 있었다.
한 계단 위에 서 있던 칼바도스가 걸음을 멈춘 채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눈빛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말했다.
“뚜껑 손잡이에는 네 눈동자 같은 사파이어를 박을 거야. 앞으로 도서관 갈 때 들고 다니면 기쁠 것 같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대꾸하려던 칼바도스는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 말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내가.”
없어야지, 그럼.
하지만 정말 칼바도스에게 열 개의 입이 있었다면 열 개의 입이 각자 다른 변명을 떠들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계단을 올라 4층에 들어섰고, 칼바도스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번이 두 번째네. 네가 공주를 쓰러뜨린 게.”
마치 용사가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투였다.
하지만 마왕을 쓰러뜨리고 자부심이 넘치는 용사와 달리, 공주를 쓰러뜨린 나는 한숨을 쉴 뿐이었다. 자부심 대신 죄책감만 남았다.
내 한숨 소리를 들은 칼바도스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뭘 잘했다고 웃어?
그렇게 따지려다가, 말싸움할 기운도 없어서 관뒀다.
열두 개의 책장을 스치듯 지나치자 안쪽 구석에 허름한 책상들이 놓여 있었다. 용케도 이런 어두침침한 곳에서 글을 썼네.
“아, 여기 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붉은 수첩과 펜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원래 이 시기에 셀레네랑 칼바도스는 서로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하는데.’
하지만 호칭은 공주와 황태자 전하에 머물러 있었고, 둘은 여전히 존대를 사용했다.
셀레네와 칼바도스의 관계에 좀처럼 진전이 없는 이 상황에서, 셀레네의 소설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그냥 몰래 볼까?’
궁금한 마음에 수첩을 훔쳐보고 싶었지만, 수첩을 향한 칼바도스의 집요한 시선 탓에 차마 수첩을 펼칠 수 없었다.
*
의무실에 도착한 나와 칼바도스는 셀레네에게 수첩과 펜을 돌려주었다. 내가 레이델의 상태를 살필 때, 셀레네는 칼바도스와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난리를 쳤다.
“축하합니다, 공주.”
“감사해요. 전하도 좋은 소식 있길 바랄게요.”
“……난 가망이 없어 보여요.”
왜 저러지?
칼바도스가 뭔가를 축하해 주고 있었고 셀레네는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내가 다가가자마자 대화를 중단했다.
둘 사이에서 뭔가가 진행되는 것 같아서 나는 기꺼이 모른 척해 줬다.
슬슬 피곤해진 내가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하자, 셀레네는 함께 돌아가자며 내 손목을 붙잡았다. 의원은 돌아가도 된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란히 기숙사로 걸어가게 되었다.
“어지럽진 않으세요? 제가 공주님을 다치게 한 것도 벌써 두 번째네요.”
셀레네와 함께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걱정스러운 내 목소리에 셀레네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뭐든 두 번은 처음보다 익숙한 법이니까요.”
밤하늘을 비추는 달이 현신한 것 같은 그녀의 밝음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다치는 것에 익숙해져서 좋을 것이 뭐가 있다고 저렇게 밝은지 모르겠다.
눈치 주는 건가 싶었지만, 역시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예 아프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사고였던 처음과 달리, 두 번째는 죽일 생각으로 때렸기 때문에 훨씬 더 아플 것이다.
‘사죄의 뜻으로 뭔가를 주고 싶은데…….’
뭐가 있을까.
‘아. 그게 있었지.’
지금의 셀레네에게 필요한 것이 딱 나에게 있었다.
셀레네의 것이어야 했지만 내가 차지한 것.
“공주님.”
옆에서 걷던 내가 걸음을 멈추자, 셀레네 역시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왜요?”
“혼자서 글을 쓸 장소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그랬죠.”
“공주님께서 제 수석 자습실을 사용하시는 건 어떨까요?”
수석 입학생이 한 학기 동안 사용하는 자습실.
다행히 그곳은 개인간 양도가 가능했다. 내 소유니 내 마음이다. 내부를 훼손하거나, 음주 흡연 같은 행동만 안 하면 된다.
나는 그곳에서 졸았지만, 셀레네는 그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그러니 내가 아니라 셀레네가 사용하는 편이 나았다.
“정말요? 하지만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한데…….”
“두 번씩이나 공주님 머리를 내리친 저보다 죄송할까요?”
잠시 눈동자를 오른쪽 위로 굴려 고민하던 셀레네가 입을 열었다.
“음…… 공녀가 더 미안하겠네요.”
“네. 그러니 편하게 사용하세요.”
처음부터 그곳은 내가 빼앗은 당신만의 공간이니까.
“고마워요. 공녀는 정말 친절한 사람이군요.”
천만에요. 공주님이야말로, 정말 호구 같은 사람이군요.
그렇게 얻어맞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미소를 지어 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셀레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왜 역사학부가 아니라 문예창작학부에 지망한 건지. 왜 시험 성적이 그 모양인지.
왜 아직도 칼바도스를 황태자 전하라고 부르는 건지.
하지만 친구가 아닌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로 물어볼 수는 없는 질문이었다.
‘조금 친해진 다음에 물어봐야겠다.’
빨리 여주인공이랑 친해져야지.
자습실을 대여해 줬으니, 셀레네가 어느 정도 나를 좋게 봐 주지 않을까.
그렇게 그날 새벽, 나는 셀레네에게 자습실 열쇠를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