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57화
이쯤 되면 나는 여주인공의 머리를 내리치려고 이 소설 속에 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설마 죽진 않았겠지?
얼마 전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고, 그날과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셀레네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가자, 옅은 숨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살아는 있네.’
레이델 역시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걸 보니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살아 있는 건 다행이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나 혼자 둘을 옮기는 건 무리야.’
사람을 불러와야 하나?
성스러운 제국의 영웅이 귀신 때문에 기절한 모습을 보여 주긴 그랬지만, 쓰러진 녀석을 방치할 순 없었다.
1층으로 향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때, 도서관에 어울리지 않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어느 배신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잘…… 있었어?”
산발이 된 머리를 자랑하며 한 손에는 장검을 든 칼바도스가, 숨을 헐떡이며 나의 생사를 확인했다.
“참 일찍도 온다.”
칼바도스가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내가 셀레네를 죽일 듯 패는 것을 막아 주지 않았을까?
도망친 것이 멋쩍은지 칼바도스는 내 눈을 피했다.
그러더니 기절한 셀레네를 가리키며 물었다.
“……넌 이제 귀신도 잡아? 사람만 잡는 줄 알았는데.”
“차라리 진짜 귀신을 잡은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대체 뭔데?”
나는 대답을 피하며 한쪽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가까이 다가온 칼바도스가 하얀 잠옷 원피스를 입고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공주?”
“그렇게 내리쳤는데 얼굴은 멀쩡한가 보다. 다행이야.”
내가 셀레네의 정수리를 먼저 내리치고, 그 충격으로 고개를 숙인 셀레네의 뒤통수를 연이어 내리친 게 틀림없었다.
“하나만 더 묻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바도스가 흰자를 보이며 쓰러진 레이델을 가리켰다.
“이 녀석도 네가 쓰러뜨린 거야?”
“걘 그냥 혼자 놀라서 기절한 거야.”
그나저나,
‘하나만 더 묻자고?’
조금 전 칼바도스의 입에서 나온 ‘묻자’라는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묻어?’
나는 셀레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레이델을 쿡쿡 찌르는 칼바도스를 불렀다.
“칼바도스.”
“응?”
“그냥 이대로 뒷산에 확 묻어 버릴까.”
깨어나 봤자 여주인공이 날 싫어할 것 같았다.
누가 자길 기절 직전까지 후려친 사람을 좋아하겠는가.
‘여주인공에게 미움받을 바엔 여주인공이 없는 게 낫지 않나?’
차라리 여주인공을 없애 버리고, 칼바도스가 노총각으로 늙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호국의 공주를 묻어 버리자니.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나는 나도 모르게 실실 웃고 말았다.
나는 이 소설의 악녀답게 남주인공에게 여주인공의 생매장을 제안하고 있었고,
“그럼 이 녀석도 같이 묻어 버리자.”
정의로운 남주인공은 공주의 생매장을 수락했을 뿐만 아니라, 기특하게도 제 최측근의 생매장까지 제안하고 있었다.
“아쉽지만 에녹이란 영웅을 묻어 버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겠지.”
“공주님을 묻어 버린 걸 들키면 왕국과 문제가 생길 테고.”
농담 삼아 한 말이 아니었나?
칼바도스는 레이델을 묻지 못해서 진심으로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단 깨워야겠네. 성스러운 제국의 영웅이 있지도 않은 귀신 때문에 놀라 기절한 게 알려지면 꼴사나울 테니까.”
“어떻게 깨우려고?”
칼바도스는 내 말에 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서 레이델의 머리 쪽으로 몸을 옮겼다.
뺨을 때려도 안 일어나던 녀석을 무슨 수로 깨운다는 건지…… 물이라도 끼얹을 생각인가?
그때, 칼바도스에 손에 들린 검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자식, 설마 칼로 찌르려고?
하지만 그런 내 걱정과 다르게, 가까이 다가간 칼바도스는 망설임 없이 레이델의 코를 움켜쥐었다.
“흡……!”
흰자위만이 가득하던 레이델의 눈에 구슬 같은 회색 눈동자가 뚝 떨어지듯이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깨우려고.”
나와 눈이 마주친 칼바도스가 못된 장난을 친 소년처럼 웃었다.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기엔 이른 새벽인데, 칼바도스는 태양처럼 웃었다.
*
잠시 뒤, 나는 의무실 침대에 누운 셀레네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게다가 두 번째라 그런지 처음 셀레네가 쓰러진 걸 봤을 때보단 충격이 덜했다.
‘이런 거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하얀 베개 위에 줄을 긋듯이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은 정말 밤하늘을 오려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사이로 흰머리 두 가닥이 보였다.
올해 성인이 된 공주님 머리에 흰머리라니. 왕국에서 스트레스가 심했나 보다.
‘나는 흰머리 생겨도 티 안 나려나.’
이미 머리가 하얗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셀레네의 흰머리를 뽑아 주었다.
그리고 커튼 너머에 있는 칼바도스의 손에 흰머리 두 가닥을 건네주며, 쓰레기통에 버리고 오라고 시켰다. 머리카락을 받아 든 칼바도스는 나에게 욕을 했지만, 곧 내가 시키는 대로 버리러 갔다.
‘열일곱에 흰머리라.’
하긴, 왕국에서 그렇게 살았으니 흰 머리가 날 만도 하다.
시몬의 공주, 셀레네.
왕이 없는 곳에서, 왕국인들은 셀레네가 요부의 딸이라며 손가락질했다. 어머니가 죽자 왕은 그녀를 외면했다.
1왕자 리오스는 셀레네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왕비와 2왕자 칼린은 셀레네에게 그녀의 아버지 뻘인 레오폴드 공작과의 결혼을 권했다.
한마디로 율리안을 제외하면 여기저기서 치이는 삶이었던 거다.
‘현재 시몬의 상황이 워낙 개판이기도 하고.’
개판이 된 이유를 알아보자면 선대로 거슬러 가야 한다.
그래, 선대인 임피케르 왕 때부터 이 모든 개판의 밑밥이 깔렸다.
달의 여신을 섬겨 온 시몬 왕국의 임피케르 왕은 두 아들 중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다.
결국 왕은 쌍둥이 아들에게 나라를 물려주었다. 우유부단한 왕의 성격 탓도 있었지만 두 아들이 왕위를 두고 다투지 않기를 원한 것도 있었다.
하여, 홀수년에는 형인 크레탄이, 짝수년에는 동생인 렉시온이 왕국을 다스렸다.
첫째 크레탄 시몬이 레토 프리아모스와 결혼했고, 얼마 뒤 리오스 1왕자가 태어났다.
그렇게 쌍둥이 형제가 1년씩 번갈아 통치를 하던 중,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 크레탄의 아내인 레토가, 동생 렉시온을 유혹한 것이다. 렉시온은 형을 죽이고 사랑하는 레토와 홀수년을 차지했다. 그리고 렉시온은 레토와 형의 아들인 리오스가 사실은 자신과 레토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레토는 렉시온의 아이인 셀레네를 낳았다.
렉시온은 매일 술과 레토를 찾았고, 렉시온의 아내였던 현숙한 왕비 힐다는 주색에 빠진 남편 대신 나라를 돌보았다. 그리고 레토가 죽자 셀레네를 거둔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그래, 여기까지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완전히 왜곡된 내용이야.’
레토는 남편인 크레탄을 사랑했다. 그녀는 렉시온을 유혹하지 않았다.
레토를 향한 렉시온의 마음을 눈치챈 힐다가 그를 부추긴 것이다.
그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당시 크레탄과 렉시온을 비교하는 백성들의 목소리도 커진 것 역시 한몫했다.
‘렉시온은 형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리오스가 렉시온과 레토의 간통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것 역시 거짓이다.
남편의 죽음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 레토가 아들인 리오스를 살려 달라 간청했기 때문이다. 렉시온은 레토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이들의 앞에서 리오스는 형의 아들이 아닌 자신의 아들이었다고 밝히며, 리오스를 살려 두었다. 그렇게 레토는 요부가 되었다.
레토의 아들인 리오스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영혼을 파괴한 렉시온과, 무너진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난 렉시온의 딸 셀레네를 혐오하고 죽이고 싶어 한다.
그에게 셀레네는 어머니의 딸이 아닌, 원수의 딸에 불과하니까.
셀레네는 그런 리오스를 무서워했다.
셀레네를 낳은 레토는 숨을 거두었고, 힐다 왕비는 셀레네를 거두었다. 그녀는 셀레네를 정성스럽게 키웠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칼린 2왕자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패로 삼았다.
시몬의 레오폴드 공작은 셀레네를 원했다. 그는 셀레네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리오스가 아닌 칼린을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셀레네는 레토 대신 자신을 키워 준 힐다의 뜻을 잘 거절하지 못했고, 힐다는 셀레네를 혼인 동맹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 상황을 보다 못한 레토의 어머니, 즉 리오스와 셀레네의 외할머니인 프리아모스 자작은 셀레네에게 아카데미 유학을 권했다. 기꺼이 그녀의 후견인이 되어서 말이다. 그렇게 유학을 명분으로 셀레네에겐 3년의 유예가 생겼다.
그리고 그 유예 기간 중 하루를…… 보다시피 침대에서 기절한 채 보내는 중이다.
‘이거 왕족 시해 미수라고 하면 어떡하지?’
툭하면 황족 시해 미수를 들먹이는 우리나라 황태자도 있는데. 옆나라 공주가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에이씨…….”
그러게 누가 그 시간에 거기 있으래?
이상한 소리는 또 왜 낸 거고?
시간이 지나서 미안한 마음이 가셨는지, 나는 피해자 탓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침대에 누운 작고 가녀린 공주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나는 천천히 얼굴을 쓸다가 셀레네를 살폈다. 머리 말고 다친 곳이 있으면 안 되니까.
작고 하얀 손이 보였다. 검을 쥔 덕에 굳은살이 박인 내 손과 달리 고운 손이었다.
‘나는 이렇게 작고 약한 사람을……!’
그렇게 남 탓에서 벗어난 내가 자괴감에 빠져 있던 때, 셀레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이 드세요?”
“……리베르트 공녀?”
셀레네는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와 이불을 살폈다. 침대를 둘러싼 분홍색 천을 본 그녀는 자신이 의무실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머리가 아팠는지 셀레네가 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내가 왜 ‘또’ 여기에 누워 있는 거죠?”
“혹시…… 기억이 안 나세요?”
희망이 보인다.
차라리 기억하지 마라.
제발. 기억하지 마. 다 잊어버려. 제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셀레네가 아픈 머리를 붙잡은 채 끙끙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