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56화
레이델이 이렇게 무서워할 줄 알았으면 물어보지 말고 나중에 피오나와 둘이 갈걸 그랬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칼바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놈은 당연히 안가겠지.’
시큰둥한 얼굴로 ‘그런 쓸데없는 데에 신경 쓸 여유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뻥이다.
칼바도스는 사실 귀신을 무서워한다. 황궁 복도에 귀신이 나온다고 장난을 쳤더니 황자궁 침실에 요강을 둔 놈이었다. 실제로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지만, 그건 모를 일이다.
‘물어볼 필요도 없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입꼬리를 올리자 칼바도스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간다.”
“너도 간다고? 왜?”
“방금 네가 무슨 과거를 회상했는지 알 것 같아서.”
“내가 뭘 회상했을 줄 알고.”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는 듯 칼바도스가 나를 노려보았다. 흠, 자기도 부끄럽긴 한 모양이지?
나를 노려보는 칼바도스의 시선은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기에,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그게 같잖다는 듯이 웃었다.
“두고 봐. 나는 오늘 그 수치스러운 과거를 청산할 거니까.”
그렇게 말한 칼바도스는 신화 속에 등장할 법한 영웅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용맹스러운 모습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황자궁의 황금 요강은 이미 내 기억에 각인된 지 오래였다. 어떤 새로운 기억이 덧칠해진다 해도, 쉽게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새벽, 우리 세 사람은 술 냄새를 풍기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새벽의 도서관은 생각보다 훨씬 고요하고 무서운 곳이라는 거다.
막상 도서관 앞에 다다르니, 호기심 아래 숨어 있던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술이 깼다.
그래도 겁먹어서 못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음…… 겁을 먹었다기보단 긴장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바로 알아챈 칼바도스가 재수 없게 웃으며 물었다.
“엘.”
“왜.”
“너 겁먹었지? 돌아가고 싶지?”
엄청까진 아니고 조금.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말했다간 이번 내 생일 선물로 칼바도스가 황금 요강을 선물할지도 모른다. 조롱의 의미로 말이다.
“전혀. 도스 너야말로 무서워서 돌아가고 싶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우린 윗사람인 네 뜻을 따를 테니까.”
평소엔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따라 줄 의향이 있었다.
“넌 이럴 때만 날 윗사람 취급하지? 난 하나도 안 무서워.”
“나도 하나도 안 무서워. 그리고 난 충분히 널 윗사람으로 대우하고 있어.”
“충분히? 예절 교육 다시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리베르트 가정 교육 무시하냐?”
쯧.
자존심 때문에 먼저 돌아가자는 말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짜증이 난 건지, 칼바도스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레이델은 메두사의 얼굴을 본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을 의식한 칼바도스가 당당하게 도서관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럼 들어가자.”
우리 셋은 말없이 1층을 지난 뒤, 2층과 3층 계단을 지났다.
이윽고 4층에 도착했을 때, 계단에서 앞장을 서던 칼바도스가 내 옆에 서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혼자 앞장서기 무서웠나 보다.
레이델은 아까 전 말이 농담이 아니었는지 정말로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가만, 공포 영화에선 가장 뒤에 있는 사람부터 사라지지 않나?’
나는 살짝 고개를 돌리자, 뒤쪽에서 레이델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에녹, 귀신은 가장 뒤에 있는 사람부터 잡아가는 거 알지?”
“……진짭니까?”
“이리 와.”
옆으로 다가온 레이델은 자기도 모르게 덜덜 떠는 손으로 내 팔을 꽉 붙잡았다. 조금 아팠지만 티 내지 않았다.
‘괴물을 썰어 죽인 애도 귀신은 무서워하는구나.’
하긴. 사람이나 괴물은 썰려도 귀신은 썰리지 않으니까.
왼쪽에 있는 레이델과 오른쪽에 있는 칼바도스의 존재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나보다 덜덜 떨고 있는 이 녀석들이 든든해서가 아니었다.
‘오른쪽엔 칼바도스가 있고 왼쪽엔 레이델이 있으니, 그나마 내가 가운데인 내가 가장 안전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레이델을 챙기는 척했지만 사실 레이델을 옆으로 부른 건 나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원래 공포 영화에선 끝에 있는 사람부터 사라지니까, 내가 가장 안전할 것이다.
왼쪽에는 영웅, 오른쪽에는 황태자.
낮황밤영이 아니라 좌영 우황이었다.
두 사람이 내 팔을 꽉 붙잡은 탓에 양쪽 팔이 뜯겨 나갈 것 같았지만, 귀신에게 잡혀가는 것보단 나았다.
만약 귀신이 있다면 오른쪽에 있는 칼바도스가 먼저 사라질까 왼쪽에 있는 레이델이 먼저 사라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칼바도스가 나를 자기 쪽으로 휙 끌어당겼다.
“나는 황태자고, 너희는 황족을 지킬 의무가 있어. 이 사실을 유념하길 바란다.”
그리고 나와 레이델은 가볍게 무시했다.
“……나 황족 맞지?”
“무서워서 실성했어? 당연한 걸 묻고 있어.”
“황족 맞으십니다.”
“너희는 그 사실을 참 잘 아는데…… 왜 너희는 내가 황족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굴지?”
그럼 황족 구실을 좀 하든가.
라고 답하려던 그때,
“쉬이이잇…….”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꼭 뱀의 소리 같았다.
그 기괴한 소리에 얼어붙은 우리 세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긴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하얀 옷을 입은 무언가가 책장을 스쳐 지나갔다.
귀신이 걸친 하얀 옷만큼이나 얼굴이 하얗게 질린 레이델이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방금, 있었죠.”
“……응. 있었지.”
지금은 없지만 말이다.
“칼바도스 너도 봤지?”
내 물음에, 칼바도스는 꽉 붙잡고 있던 내 팔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화장실 좀 가야겠다.”
“뭐?”
어딜 간다고?
내 물음에 칼바도스는 태연하게 질문을 이었다.
“너도 같이 갈래?”
“미쳤어? 내가 왜 너랑 화장실을 같이 가?”
“그건 그렇네. 그럼 나중에 보자. 내가 좀 급해서.”
그렇게 칼바도스는 냅다 출구 쪽으로 달렸다.
발이 굳어 움직이지 못한 건 나와 레이델뿐이었다.
저 망할 놈이 나와 레이델을 제물로 바친 것이다.
그냥 친구를 두고 도망친 파렴치한 놈 아닌가?
나는 멀어져 가는 칼바도스를 보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야! 네가 그러고도 황태자냐?!”
애가 애민정신이 없어! 조만간 끌어내려 주마!
칼바도스가 사라지자, 조금 전까지 칼바도스가 붙잡고 있던 오른팔에 한기가 돌았다.
“황족 대우 안 해 준다고 징징거리기 전에 황족 같은 짓을 하든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내빼?
소설 속 낭만적인 남주인공인 칼바도스가 할 행동이 아니다. 그런 녀석한테 뒤통수를 맞으니 배신감이 몰려왔다.
“안 그래, 에녹?”
나는 황족답지 못한 칼바도스의 행동에 동의를 구하며 레이델을 툭쳤다.
하지만 다시 한번 건너편에서 들려온 쉬이잇 소리에,
쿵―
“……에녹?”
레이델이 눈을 뒤집고 기절하고 말았다.
“야…….”
너까지 나한테 왜 이래.
몇 번이고 레이델의 오른뺨을 내리쳤지만 레이델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동자에 흰자만 있는 사람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칼바도스가 붙잡고 있던 오른팔에 이어 왼팔마저 휑해지자, 싸늘함이 느껴졌다.
아주 예전에, 친구와 함께 귀신이 나오는 드라마와 영화를 보던 나는, 귀신이 있을 리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로 지금, 나는 그 말을 취소해야 했다.
‘……귀신이 정말로 있구나.’
내 믿음과 관계없이 제국에는 신도 있고, 귀신도 있다.
‘나는 왜 하필 이딴 세계관에 빙의를 해서!’
호기심은 발견과 발전을 불러오지만, 죽음을 앞당기기도 하는구나.
오늘따라 깨닫는 것이 많았다.
어느 순간, 저벅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어쩌지?’
고민을 해 봤자 머릿속에 떠오른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튀자.’
칼바도스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그대로 도망가자니 기절한 레이델이 걸렸고, 칼바도스랑 똑같은 인간이 되기 싫었다.
여기서 도망치면 조금 전의 칼바도스와 다를 것이 없다. 칼바도스를 욕하고 비난할 자격이 사라지는 것이다. 레이델에겐 미안하지만, 전자보단 후자의 이유 때문에 발을 뗄 수 없었다.
“진짜…… 빌어먹을 칼바도스!”
나 혼자 이 덩치 큰 놈을 옮길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바로 등 뒤에서 저벅 소리가 멈췄다.
“저어어…….”
가까이 다가온 그것이 인간의 말을 흉내 내듯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내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그리고, 손톱이 목 끝을 스쳤을 때,
“아아아악!”
더 이상 공포심을 억누를 수 없었던 내 입 안에서 목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리베-”
“아아아아악!”
그렇게 나는 책장을 더듬다가 대뜸 손에 집힌 책을 꺼내 들어 귀신의 머리로 추정되는 부분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이미! 죽었으면! 또! 죽어!”
“저승사자! 염라대왕! 하데스! 타나토스! 아무나 와서, 잡아가라고!”
그렇게 외친 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완벽히 제압한 걸까?
저항이 느껴지지 않아 살짝 눈을 떠보니, 바닥에 널브러진 귀신의 새하얀 손이 애원하듯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법학부 학생 하나는 다리가 부러졌대.’
그러고 보니 다리가 부러진 학생이 있다고 했지.
그 학생도 이렇게 부러진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뿌리치려던 때, 나는 내 발목을 감싼 귀신의 손이 따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신 손은 차가워야 하지 않나?’
귀신이 발목을 잡으면 한기가 돌아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온기가 돌고 있었다.
‘……그럼 이게 귀신이 아니라는 건데.’
나는 공격적으로 귀신을 내리치던 책을 바닥에 내려두고, 바닥에 쓰러진 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얼굴을 가린 검은 머리카락을 들춘 순간,
“하아아아…….”
얼굴을 확인한 내가 절망하며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나 진짜 이러냐…….”
나는 나를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내가 조금 싫어지고 말았다.
‘셀레네.’
내가 떨어뜨린 법전에 머리를 맞아 기절했던 여주인공이, 이번엔 나에게 얻어맞아 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