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55화
잠시 뒤, 해가 뜨기 시작했다. 리온과 산책을 하다 기숙사 밖에서 밤을 새우고 만 것이다.
‘한 것도 없는데 벌써 해가 떴어.’
허탈함도 잠시, 리온은 나를 기숙사 근처까지 바래다주었다.
내가 작별 인사를 하려던 때, 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아, 그러고 보니 아가씨와 제가 함께 새벽을 보낸 지도 벌써 두 번째네요.”
“여기서 그렇게 말하면 큰일나.”
말 한 번 이상하게 했다가 황태자와 영웅과 끔찍하게 얽혀 버린 나였다. 공작저 사람들이면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낮에는 황태자, 밤에는 영웅, 이제 새벽에는 호위 기사를 만난다는 말이 추가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만 가 보라는 듯 리온의 등을 밀었고, 리온은 순순히 밀려났다.
그리고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이어서 우편을 확인했다. 공작 부인과 공작에게서 온 편지가 있었다. 조금 전 리온과의 대화를 통해 내용을 예상할 수 있었다.
[엘리야이게대체무슨일이냐!!!네가황태자와에녹헤르트와그렇고그런사이라는소문이도는데우리는사실이아니라는걸안다괜찮니???……]
“어우…….”
편지가 시끄러웠다. 공작과 공작 부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아 나는 빨리 내용을 확인한 후 편지를 접어 버렸다.
그다음은 배우 라티아에게서 온 편지였다. 연분홍색 편지 봉투에서 라티아의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시몬 왕국 관광을 마친 언니 벨라가 돌아왔다는 이야기와 벨라가 내 선물을 사 왔다는 이야기, 벨라의 차기작 구상, 라티아의 근황 등…… 그 내용이 우스워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두 사람 다 공작저로 초대할까.’
조만간 두 사람과 식사 약속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바로 펜을 들어 라티아에게 답장을 썼다. 학기가 끝나면 벨라와 함께 식사나 하자는 이야기였다.
라티아는 내 극단의 간판 배우였고 흥행 보증 수표나 다름없다. 벨라 역시 뛰어난 작가였으니 두 사람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라티아에게 답장을 쓴 나는 그대로 펜을 내려둘까 하다가, 공작저에 바로 답장을 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오늘도 건강하시죠?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던데. 제가 그 말을 증명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오빠는 소식이 잦은 편이지만 대부분이 청구서였지, 희소식은 아니었잖아요?]
그러니 너무 내 걱정은 마시라고. 리온의 휴가는 출장으로 처리하게 지시해 달라고. 그런 내용을 덧붙이며 편지의 끝을 맺었다.
‘답장은 다 했고…….’
이제 뭘 해야 하나. 그렇게 고민하며 방 안을 둘러보자 단잠에 빠진 피오나가 보였다. 시험 범위를 한 번도 못 훑은 것 같은데, 이제 정말로 깨울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피오나의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피오나, 이제 진짜 일어나야 해. 지금 못 일어나면 0회독으로 시험 보는 거야.”
그 말에 눈을 뜬 피오나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조금 쉰 목소리로 물었다.
“……몇 시예요?”
“7시 10분.”
“오후 7시죠?”
“아니. 오전.”
“네???”
그 순간 피오나의 눈이 번뜩 떠졌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방 안의 시계와 창밖을 번갈아 살폈다. 해가 지고 있는 게 아니라, 뜨고 있다는 것을 안 피오나가 절규했다.
“아악!! 시험까지 2시간도 안 남았네!”
그렇게 피오나는 몇 번이고 머리를 내리치더니 깨워 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헐레벌떡 책상에 앉았다.
나도 신의 아들이 잠긴 호수를 찾아야 했기 때문에 피오나를 따라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커다란 제국 지도를 펼쳤다.
호수는 숲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그 숲에는 포플러 나무가 있어야 하고.
‘여태 발견되지 않았으니 접근하기 힘든 곳일 확률이 높아.’
동쪽 지역, 포플러 나무가 자라고, 접근이 어려워서 알려진 정보가 적은 곳.
이 정보만으로는 혼자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사람을 시켜서 알아봐야 하나?’
하지만, 꺼림직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런 호수가 있다면 신에 미친 제국인 중 누군가가 벌써 찾았어야 정상이다.
‘왜 아직도 찾지 못했지?’
설령 찾지 못했다 해도, 찾아 나선 사람의 이야기가 하나 정도는 들려와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호수를 찾아나선 사람의 기록은 없다.
‘탐험에 실패했다는 기록조차 없어.’
신의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누이들의 시가 책에 실려 있고, 어린 아들이 태양 마차를 모는 그림이 있고, 이야기를 담은 노래와 연극이 있다.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아무도 호수를 찾아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니. 이상한 일이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찾을 생각을 아예 할 수 없었던 건가?’
호수에 잠겨 죽은 그 아들의 이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저 ‘신의 아들’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신의 아들은 실존했다. 단순히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한 인간은 신탁을 들으러 신전에 향한다. 신전의 사제들은 신의 음성을 듣고, 이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이 세계엔 신이 존재한다.
모습을 드러낸 신이 황제에게 직접 아들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신의 모습을 본 사람 역시 존재한다.
그러니 이 이야기 속 신의 아들 역시 실존 인물일 터.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왜지? 왜 사람들은 신의 아들을 찾지 않는 거지?
찾지 않는 게 아니라 찾을 수 없는 거라면?
처음부터 신의 아들을 찾을 수 없게 세상이 설계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혼란도 잠시, 곧 결론이 나왔다.
‘태양신의 개입이라면 가능해.’
그밖에는 해석의 여지가 없었다.
포플러 나무로 둘러싸인 그 호수는 무덤과도 같다. 아들의 무덤을 찾을 수 없도록, 신이 세상에서 감추었을 확률이 높았다.
‘아들의 안식을 위해서인가.’
신이 제 아들의 안식을 위해 감춘 숲이라면, 찾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신의 뜻을 거역해서 좋을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찾지 말자.’
그렇게 단념한 내가 지도를 접으려던 그때였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지도가 이상하다.
동쪽 끝의 한 부분이 일그러지더니, 새로운 땅이 생겨나고 있었다.
아니, 땅이 새롭게 생겼다는 말은 틀렸다. 신에 의해 감춰져 있었던 땅이 이제야 드러난 것이다.
“……말도 안 돼.”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일에, 나는 미친 사람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진 지도에 없었는데.
숨겨져 있던 땅이 드러났고, 지도에는 숲 하나가 나타났다.
숲을 찾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니, 숲의 위치가 드러난 것이다.
“……미쳤나 봐, 진짜.”
나도 모르게 남의 무덤을 파헤친 기분이었다.
나는 눈을 몇 번이고 비빈 뒤, 차분한 마음으로 지도를 살폈다.
제국에서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에 숲이 하나 생겼다. 이 숲 안에 신의 아들이 죽은 호수가 있을 것이다.
혹시 나에게만 보이는 건가 싶어 나는 피오나에게 지도를 보여 주었다.
“피오나. 여기 동쪽 끝에 있는 땅, 보여?”
“네? 네. 보이는데요?”
“원래 동쪽 끝이 이 정도로 툭 튀어나와 있었나? 땅이 새로 생겨난 것 같지 않아?”
“튀어나오다니요? 거긴 땅이 아니라 바다잖아요?”
나는 미치지 않았고,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동쪽 땅이 꿈틀거리며 길어지는 모습을. 동쪽 땅은 눈에 띄게 길어졌다.
하지만 피오나는 새로운 땅을 보지 못했다. 본래 지도에 표시되어 있던 땅만을 알아볼 뿐이었다.
‘세뇌 같은 건가?’
내가 이 세계의 이방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신의 세뇌가 먹히지 않아서 숲을 볼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제외한 이곳의 사람들은, 이야기 속 신의 아들이 빠져 죽은 호수를 찾아 나설 생각을 할 수 없는 거고.
그게 아니라면, 호수를 찾아도 좋다는 ‘신의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신의 허락이라니. 나도 여기 사람 다 됐구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나저나 이곳은 공작 부인의 영지에 속한다.
앱솔룬 백작 영지의 동단에서, 지도를 무시한 채 계속 동쪽으로 향하면 이 미지의 땅이 나타나는 건가?
여름에 동부 지역에서 휴양도 할 겸, 어머니의 땅에 다녀와야겠다. 휴양지에서 쉴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
“새벽 4시마다 도서관 4층에서 귀신이 나온다며?”
“법학부 학생 하나는 다리가 부러졌대.”
‘4층?’
칼바도스와 레이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옆 테이블 학생들의 흥미로운 대화에 씹는 것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카페에서 나와 칼바도스의 대화를 듣고 낮황밤영이란 말을 만든 학생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남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도서관 4층에서 귀신이 나온다고?’
아카데미 도서관 1층에는 스터디룸이 있고, 2층에는 책들이, 3층에는 열람실이 있다.
‘4층은 연구원들이 많이 쓰지.’
학생들의 출입도 가능했지만, 학생의 4층 출입은 밤 10시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니 힘없이 걷는 연구원을 귀신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컸다.
다리를 다친 건 그냥 혼자 놀라서 자빠진 걸 테고.
‘귀신이라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나는 신을 믿지 않았고, 귀신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내 세상에는 신이 없었고, 내 세상에는 귀신 역시 없었다.
하지만 내 믿음과 관련 없이 이곳에는 신이 존재한다.
‘그럼 귀신도 있으려나?’
내가 신을 믿지 않아도 신이 존재한다면, 내가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아도 귀신이 존재해야 한다.
‘막상 귀신이 있으면 무서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궁금하단 말이지.’
귀신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두려움을 넘어서고 있었다.
레이델 역시 씹던 것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옆 테이블 학생들의 대화를 엿듣는 중이었다.
갑자기 넘쳐날 정도로 샘솟은 호기심에 잠식된 내가 레이델에게 물었다.
“우리도 한번 가 볼래?”
그러자 레이델이 꿀꺽, 음식을 넘기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답했다.
“……예. 저도. 참. 궁금합니다.”
“무서우면 같이 안 가도 돼.”
“그럴, 리가요. 공녀님께서 가시는 길을 뒤따르겠다고 맹세했잖습니까.”
제법 멋스러운 말이었지만, 결국 무서우니 뒤에서 따라오겠다는 소리였다.
“혹시나 싶어 묻는 건데, 앞장서진 않을 거지?”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그렇게 말한 레이델의 기가 축 처져 있었다. 누군가가 꾹꾹 눌러 밟고 간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