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54화
리온이 여기에 와 있다.
아니,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기다리다 돌아갔을지도 모르니까.
가 봐야 하나?
‘그래도 6시간이나 지났는데. 공작저로 돌아갔겠지?’
하지만 내가 아는 리온이라면……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많이 늦었지만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편지도 아닌 리온의 편지였으니까.
중앙 광장이라면 얼마 전 사라진 레이델을 찾기 위해 간 곳이다. 멀지는 않다.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뒤, 리온이 선물한 검 하나를 챙겼다.
*
정신없이 달려간 산책로 입구에는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고요하게 달빛에 젖은 그 모습이 그림처럼 신비로웠다. 옅은 새벽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나는 그 광경이 그림이 아닌 현실이란 것을 자각했다.
내 기척을 느낀 리온이 고개를 돌렸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달처럼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내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경, 제정신이야?”
“제정신이니까 아가씨 얼굴을 보러 왔죠.”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계속 여기서 기다려? 적당히 기다리다 돌아갔어야지!”
평소엔 얍삽한 놈이 이런 데서 답답하게 군다.
속도 없이 실실 웃는 모습을 보니 괜히 속이 상해서 그를 몇 대 두들겨 팼다. 그럼에도 리온은 계속 웃었다.
“내가 편지를 못 봐서 여기 못 왔으면 어쩔 뻔했어.”
“봤으면 무조건 온다는 말로 들려서 기쁜데요.”
“쓸데없이 이상한 데서 미련해.”
미련한 모습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자 그가 교태를 부리듯 내 어깨를 살살 쓸며 말했다.
“그래도 제 기다림은 쓸데없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만났으니까요. 제가 떠났다면 뒤늦게 편지를 보고 오신 아가씨가 잠시나마 여기 혼자 서 계셨을 텐데……. 그건 굉장히 내키지 않거든요. 역시, 계속 기다리기 잘했죠?”
“……그래. 잘 기다렸어.”
이렇게 만났으니 제 미련함을 탓하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말하는 리온의 모습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애첩에게 홀린 폭군의 이야기가 도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기사단 일은 어쩌고 여기 있어?”
“오늘 하루 휴가 냈습니다.”
리온이 휴가를 냈다고?
“드디어 냈구나! 잘했어.”
공작저에서 나만 졸졸 따라다니던 리온이 9년 만에 휴가를 냈다.
그동안 휴가 좀 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내내 공작저 바닥에 붙어 있던 그였기에, 칭찬받아 마땅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칭찬받으니까 기분이 좋네요.”
“그나저나 휴가면 다른 곳도 놀러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하루 종일 여기에만 있어서 어떡해.”
“뭐, 제가 달리 갈 곳이 있나요. 아가씨 계시는 곳이 제가 있을 곳이지.”
저는 아가씨의 호위잖아요.
그렇게 덧붙이며 리온이 웃었다. 그 미소를 보며 나는, 앞으로는 모든 연락을 오는 대로 바로 확인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휴가인데.”
“아시잖습니까, 저 고아인 거. 딱히 만나러 갈 사람도 없어서 공작저가 가장 편합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본 적 없고, 그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 강의 건너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거리에서 구르다 열두 살의 나이에 리베르트 기사단에 들어온 그는, 본 적 없는 아버지보단 기사단을 가족처럼 여겼다. 리온은 그렇게 담담하게 제 사정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더니, 내 얼굴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주무시고 계셨어요?”
“……어. 자국 났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이렇게. 선이 그려져 있네요.”
얼굴 위에 그려진 선을 따라 리온이 엄지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쓸었다.
그 손길이 간지러워서 내가 그의 손을 쳐 냈다.
“침 안 흘리고 나왔으면 됐지.”
어떤 귀족이 그런 짤막한 편지를 보고 이 새벽에 호위를 만나기 위해 뛰어나오니. 나는 지금 생색을 내는 중이었다.
내 말이 다 맞다는 듯이 리온이 웃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내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머리에…….”
“머리도 난장판이야? 뛰어와서 그런가.”
“아뇨. 머리에 꽃잎이 붙었습니다.”
아.
나무에서 떨어진 연보랏빛 꽃잎을 집어 든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경 머리에도 붙었어.”
“제 머리가 꽃 같아서 착각하신 거 아니고요?”
“경이야말로. 대가리 꽃밭이라는 말이랑 착각한 거 아니고?”
그 말을 들은 리온의 눈이 커졌다.
얘가 어릴 때 거리 생활을 해서 그런가, 그는 대가리 꽃밭이라는 말이 반갑다는 듯 웃었다. 하여간 이상한 놈.
꽃잎이 붙었단 말에 리온이 제 머리를 살살 털었다. 하지만 꽃잎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꽃잎이 붙어 있다는 내 말에 리온이 나를 바라봤다.
“제가 도움을 청해도 될까요?”
“내가 털어 주길 바라면 머리를 숙여야지.”
손을 까딱이자 리온이 고개를 숙였고, 나는 리온의 머리에 붙은 꽃잎 한 장을 떼어 냈다.
바람에 날리던 꽃잎들이 얼마 안 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산책로 입구에 있는 태양신의 동상에 달라붙었다.
‘그러고 보니 나 호수를 찾고 있었지.’
신의 모습을 담은 동상을 유심히 바라보자 리온이 물었다.
“신을 믿으십니까?”
이 세계에 신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나. 아마 없을 거다. 이곳의 신은 인간과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기도 하니까. 그 자식들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였다.
그러니 이곳에선 신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존재를 믿어. 하지만 신뢰하진 않아.”
“저도 못 믿어요, 태양신 같은 거.”
태양신 같은 거라니.
지금 나와 리온의 대화를 신전 사람이 들었다면, 우리 두 사람에겐 죽을 때까지 신전 출입 금지 명령이 내려졌을 것이다.
“혹시 시 같은 거 잘 알아?”
“아가씨만큼 꿰고 있는 편은 아니지만 대중적인 것 몇 개는 압니다.”
“그럼 태양 마차를 몰다 죽은 신의 아들 이야기도 들어 봤겠네?”
“그럼요. 동생의 죽음에 슬퍼하던 누이들이 나무로 변했지요.”
동생은 호수에 빠져 죽었고, 근처에서 눈물을 흘리던 누이들은 포플러 나무가 되어 숲을 이뤘다.
그 숲이 어디에 있는지까지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 있던 리온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 숲이 동쪽 끝 어딘가에 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
“뭐? 동쪽 끝?”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에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가 공작저에 들어오기 전, 거리 생활을 하면서 주워들은 이야깁니다.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한 이야기는 아니고요.”
거리 생활이라…….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대화 주제가 무거워질 것 같아서 묻지 않기로 했다.
‘동쪽 끝이라…….’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라 그런 이야기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리온도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는 거고.
동쪽 끝에 있는 숲에 대해 알아본 다음, 그중에서 포플러 나무가 있는 곳을 알아보면 되려나.
눈앞에 있는 사람보다 눈앞에 없는 것에 정신이 팔린 때였다.
“그런데…… 제 근황보단 호수가 궁금하신 모양입니다?”
옆에 있던 리온이 대놓고 섭섭한 티를 내고 있었다.
“……우리 리온 경, 내 기사. 요즘 뭐 하고 지냈어? 우리 좀 걸으면서 이야기할까? 응?”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까치발을 든 채 리온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공작 부부를 닮은 덕에 키가 큰 편이었으나, 그럼에도 리온과 함께 있으면 내 쪽이 훨씬 작게 느껴졌다. 결국에는 리온이 몸을 낮춘 채 산책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회전 초밥집에서 돌아가는 초밥들처럼 같은 길을 몇 번이고 다시 걸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갑자기 나를 보러 여기 온 이유는?”
“그냥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저택에 있을 때 낮황밤영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낮황밤영이라니. 그 소문은 이미 칼바도스가 공식적으로 해명한 지 오래였다. 나랑 엮였다는 사실보다는 세컨드로 밀려난 게 어지간히 불쾌했는지 그는 아카데미 신문부를 직접 찾아가 기사를 요구했다.
성스러운 영웅으로 알려진 레이델의 이미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칼바도스는 낮황밤영을 완전히 부정해야 했다.
“그 소문이 아카데미에서만 퍼진 줄 알았는데, 공작저까지 퍼졌어?”
“공작저에서 보낸 편지가 있을 텐데 아직 확인 안 하셨어요? 마님께서 아가씨한테 답장이 안 온다고 난리가 나셨어요.”
“바빠서 요 며칠 확인 못 했다니까…….”
나는 공작 부인의 편지보다 리온의 편지를 먼저 발견했고, 리온의 편지를 보자마자 바로 여기로 달려온 참이었다.
그나저나 헛소문은 더럽게 빨리 퍼지더니. 아니라고 해명한 건 널리 퍼지지도 않았다.
진실보다 헛소문이 더 맛있었나 본데, 좀 뱉어 줬으면 좋겠다.
“리온. 어머니께 내 걱정은 말라고 전해 드려. 따로 편지 하기 귀찮아.”
물론 공작 부인에게도 따로 편지를 할 예정이다.
하지만 오늘 나를 만나고서 공작 부부에게 내 상황을 보고하면 이건 휴가가 아니라 업무가 된다.
‘휴가로 처리하지 말고 출장으로 처리하라고 해야겠다.’
이번 여름엔 강제로라도 리온을 휴양지로 보내 버릴까, 그런 생각을 했다. 나의 계획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리온이 괜히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완벽한 보고를 위해 추가적으로 여쭤볼게요. 혹시 아카데미에서 교제하시는 분 계십니까?”
“난 아직 누구 만날 생각 없어.”
“어째서요?”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내가 너무 좋거든. 가족을 제외한 사람 중에,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걸?”
“만약에…… 당신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요? 가족 말고 완벽한 타인 중에서요.”
“글쎄.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할까. 하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기 바빠서 그 사람이 섭섭해할 거야.”
“그 사람이 상관없다고 하면요? 아주 조금만 사랑받아도 좋으니까,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고 하면?”
“음…… 아니, 일단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해?”
자꾸만 있지도 않은 상황을 가정하니 황당했다.
그런 내 물음에 리온은 언제나처럼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
“있을 겁니다. 당신의 사랑 한 줌이 간절한 사람이 세상 어딘가엔 있겠죠.”
만약 그렇다면 내가 아니라 리베르트의 배경을 사랑하는 거겠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다. 말조차도 쌍방으로 대등한 걸 주고받기를 원하면서, 사랑은 주는 것보다 적게 받아도 상관없다니. 말도 안 된다.
“있으면 한번 데리고 와 봐. 직접 보고 판단하게.”
그냥 호구 아닌가. 아주 조금만 사랑받아도 좋으니 사랑하게 해 달라니.
그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