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53화
“역시 그때 깨어 있었던 거죠? 설마 처음부터 깨어 있었습니까?”
“……중간에 깬 거예요. 아니, 그렇다고 청혼 도중에 일어날 순 없잖아요?”
청혼 도중에 일어나지 않은 걸 감사히 여겨라.
그런 의미를 담아 셀레네가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른 사람한테 말했습니까?”
“음…… 유리한테만요. 너무 걱정 마세요. 유리랑 저는 입이 무거운 편이거든요.”
“트로이센은 몰라도 공주의 입은 그렇게 무거워 보이지 않는데.”
칼바도스의 기억에 따르면, 그날 기절한 셀레네를 데리러 온 것은 율리안 트로이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율리안 트로이센이 우리를 의무실에서 내보냈지.’
그는 공주가 깨어 있었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그러니 의무실에 두 사람만이 남았을 때, 트로이센 공자에게 청혼 사실을 말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입 놀리기가 벌새의 날개 수준 아닌가?
공주는 청혼을 듣자마자 바로 트로이센 공자와 소식을 공유한 셈이었다. 그래 놓고 자기 입이 무겁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벌새 같은 공주 같으니…….’
칼바도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셀레네를 쳐다보자 셀레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 정말 입 무겁거든요. 유리 말고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큼, 그나저나 전하는 리베르트 공녀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신 거예요?”
대놓고 말을 돌리기 위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청혼 소문이 퍼졌다면 낮황밤영보다 먼저 퍼졌어야 했고, 시몬의 공주는 율리안 트로이센을 제외하면 외톨이였다. 또한 셀레네는 칼바도스와 비밀을 공유한 사이였으니, 칼바도스는 황공 비밀 회담 동지의 말을 믿기로 했다.
공주를 신뢰하기로 결론을 내린 그는, 추궁할 때와는 달리 여유로운 얼굴로 질문에 답했다.
“아무래도 나는 내가 부족한 부분을 가진 사람에게 끌리나 봅니다. 난 선량하니까. 표독한 사람에게 끌리는 거죠.”
제 입으로 저가 선량하다고 말하는 황태자가 이상했지만, 셀레네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쪽에 무게를 두었다.
“공녀가 표독하다고요? 조금 무서워 보이긴 하지만 친절한 사람 같던데요. 유리는 공녀가 재미있는 사람이라고도 말해 줬어요.”
이번에는 칼바도스가 다른 쪽에 무게를 두었다.
엘렌시아가 율리안 트로이센과 친한 사이였나?
칼바도스는 살짝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공주에게 그 사실을 캐묻는 것은 너무 구차해 보여서 캐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 엘렌시아의 표독함을 알려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2황자가 일찍이 황위 계승을 포기한 건 알고 있습니까?”
“그럼요.”
셀레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로운 제국의 상황이 왕위 계승으로 피바람이 부는 왕국과는 너무 달라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나이에 황위 계승을 포기한 내 동생은, 대공위마저 거절한 채 거리로 나가 평민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죠. 그런 내 동생이 황제 폐하를 조금도 닮지 않고 황후 마마만을 닮았으니, 어떤 소문이 뒤따랐을지는 예상하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공녀와 무슨 상관이지?’
공녀의 표독함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2황자 이야기를 꺼내 드는 영문을 몰라 셀레네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리숙한 내 동생이 모욕을 당하고 할 수 있는 말은 황족의 권위를 들먹이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공자가 ‘정말 황족인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지요?’라며 면전에서 출생을 모독하니, 놀란 내 동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 녀석은 좀처럼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그래서요?”
“마침 근처에서 대화를 들은 엘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내 동생을 모욕한 공자를 걷어차고 뺨을 내리쳤습니다. 얼마나 세게 때린 것인지, 뺨을 맞은 공자가 휘청였다는군요.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공자의 뺨에 피가 흐르고 멍이 들 때까지, 그리고 그 공자가 두 발로 서 있지 못할 때까지 내리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건 황후와 칼바도스가 루카스의 생일 연회를 최대한 크고 화려하게 열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루카스는 기겁했지만, 알 바 아니었다.
“아, 어느 자선 파티에서는 오라비인 카인 리베르트가 저주받았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공자의 멱살을 쥐었습니다. 그대로 테라스로 끌고 나가 떨어뜨리려고 했지요.”
엘렌시아는 남자의 얼굴에 와인을 뿌리는 대신, 와인잔으로 머리를 내리칠 생각이었다.
화 많은 친구가 사고 치는 걸 막기 위해 칼바도스는 냉큼 와인잔을 빼앗았다.
와인잔을 빼앗기자 엘렌시아는 와인 병을 들었다. 그리고 병으로 남자의 머리를 내리치려 들었다. 칼바도스는 서둘러 병도 빼앗았다.
더 이상 손에 들 게 없어지니 엘렌시아는 남자의 멱살과 타이를 쥐었다. 그 상태로 타이를 목줄처럼 쥔 채, 남자가 숨이 막혀 캑캑거리는 걸 무시하고 테라스로 끌고 간 것이었다.
금주령이라 열받았는데 옆에서 오빠 욕을 하니 분노가 두 배였다.
그 소란스러운 날을 떠올리며, 칼바도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때요. 정말 표독스럽지 않습니까?”
그렇게 욕하는 척하더니 결국엔 칭찬을 하고 있었다.
“공녀는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 독을 차는 거군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럼 리베르트 공녀가 전하를 위해서 독하게 행동한 적도 있나요? 예를 들어…… 전하의 험담을 한 누군가의 혀를 자른다거나요.”
그 말에 칼바도스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없어야 하고요. 그 애라고 해서 매번 그렇게 굴고 싶겠습니까. 아주 많이 의지하고 싶지만, 내 앞가림은 내가 스스로 해야지요.”
루카스를 모욕한 귀족의 뺨을 내리친 이야기를 할 때, 엘렌시아는 자책하는 표정을 했다.
좀처럼 보기 드문 표정이었기에 칼바도스는 그 표정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루카스가 계승을 포기한 게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
그 애는 그저 루카스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루카스와 함께 의원을 불러와 그의 친구를 살렸을 뿐이었다.
그녀가 계승 포기 선언을 부추긴 것도 아니었으며, 의원이 되라고 꼬드긴 적도 없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칼바도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칼바도스는 친구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 친구의 표정을 다시 떠올린 칼바도스가 그날과 같은 생각을 했다.
“전하께선 공녀를 정말 많이 좋아하시는군요.”
“……네. 슬프게도요.”
칼바도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 칼바도스를 바라보던 셀레네가 대뜸 물었다.
“고백하실 거예요?”
“고민 중입니다. 나는 보기와는 다르게 겁이 아주 많아서요. 대신 공주의 고백은 응원하죠. 성공하면 후기 좀 남겨요. 따라 해 보게. 아, 차여도 남겨요. 절대 그렇게 안 하게.”
특유의 재수 없는 얼굴에 셀레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느 순간부터 입맛이 뚝 떨어진 칼바도스는 나이프를 쥐는 대신,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두드릴 뿐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더욱 숙연해지자, 셀레네가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아 참! 저희 동아리에서 문집을 내거든요? 거기에 실릴 글을 써야 하는데, 저는 유리에 대한 마음을 단편 소설로 쓸 예정이에요. 제 고민 상담을 들어 주는 친구로 전하를 등장시켜도 되나요?”
“트로이센 공자에게 들키면 어쩌려고.”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셀레네는 다시 오른쪽 위로 눈알을 굴렸다.
도르르 굴러가는 눈알 소리를 들으며 칼바도스는 셀레네의 답을 기다렸다.
생각을 마친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칼바도스를 향했다.
“이름이랑 외부 사정을 바꿔서 쓸 거라서 괜찮을 거예요.”
“내 이름은 뭘로 바꿀 생각입니까?”
“글쎄요, 잭……? 책이 나오면 황공 비밀 회담의 동지인 전하께도 한 권 드릴게요.”
“사인도 해 줍니까?”
“당연하죠!”
셀레네가 주먹을 불끈 쥐고 열정적으로 답했다.
그 모습에 칼바도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잭이라는 친구가 눈이 멀 정도로 잘생겼다는 설명을 꼭 넣길 바랍니다.”
“……어우,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나중에 까먹었다고 해야겠다.’
남주인공은 율리안을 두고, 고민을 들어 주는 친구가 눈이 멀 정도로 잘생겼다는 말을 넣고 싶지 않았다.
그런 셀레네를 바라보며 칼바도스는 생각했다.
‘지금 눈알을 굴리고 있는 걸 보아하니, 나중에 까먹었다고 하겠군.’
두 사람은 그리 편하지 않은 상대와의 대화를 통해 편안함을 느꼈다.
그렇게 황공 1차 비밀 회담은, 칼바도스가 셀레네의 고백을 응원해 주며 끝이 났다. 남자주인공이 서브남주를 향한 여자주인공의 고백을 부추기고 응원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엘렌시아가 알면 다시 한번 뒷목을 잡고 쓰러질 일이었지만, 칼바도스가 알 리 없는 일이었다.
*
내가 기나긴 낮잠 후 눈을 떴을 땐, 새벽이었다.
‘……낮잠을 너무 오래 잤어.’
며칠 동안 부족했던 수면을 한 번에 몰아서 채운 것 같았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린 내가 잠든 피오나를 발견했다.
내일 시험이라면서. 이렇게 자도 괜찮은 건가. 몸을 일으킨 내가 피오나를 툭툭 건드려 깨웠다.
“……피오나.”
잠에 빠진 피오나가 눈을 뜨지도 못한 채로 느리게 답했다.
“네에…….”
“시험공부 해야 한다며. 일어나.”
시험공부라는 단어를 들은 피오나가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저 정말 못하겠어요……. 눈 뜨면 토할 것 같아요. 저 그냥 잘…….”
저 그냥 잘게요.
말을 잇지 못하고 잠든 피오나가 그렇게 입을 뻐끔거렸다.
‘자겠다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어차피 지금 깨워 봤자 제대로 집중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피오나를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 내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신의 아들이 빠져 죽은 호수를 찾는 것.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왜인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지도를 펼치기 위해 책꽂이를 더듬던 그때, 책들 틈에서 수많은 편지 봉투들이 만져졌다. 이틀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탓이다.
‘호수를 찾기 전에 급한 답장부터 처리해 볼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리온에게서 온 편지였다.
‘리온이 왜 나한테 편지를 했지?’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편지를 확인했다.
[아가씨만 괜찮으시다면 4월 17일 오후 8시에 등나무 산책로 입구로 나와 주세요.
와 주실 거죠? 안 오시면…… 별수 없고요. 그리움만 키우다 가지요, 뭐.]
편지는 궁색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17일 오후 8시?’
“이런 미친……!”
나는 황급히 시계로 눈을 돌렸다.
현재 시각은 리온이 말한 시간으로부터 6시간 32분이 지난, 18일 오전 2시 32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