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52화
칼바도스의 시험이 끝났다.
역사학부의 귀족 자제들이 저녁 모임에 초청했지만, 편안한 분위기를 원한 칼바도스는 이를 거절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오랜 친구였다.
함께 있으면 심장이 불안정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함께 있으면 기쁠 것 같았다.
하지만 하루에 시험 세 과목을 치른 그의 친구는 기숙사에 가자마자 잘 게 뻔했다.
그다음으로 떠오른 사람은 레이델이었다.
‘하지만 레이델 그 녀석과는 단둘이 있으면 어색하고.’
돌아가서 잠이나 잘까 하던 칼바도스를 붙잡은 것은 어느 여자의 목소리였다.
“저기요, 전하.”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제비꽃처럼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시몬의 공주를 볼 수 있었다.
초췌한 얼굴을 한 그녀가 물었다.
“시험은 다 끝나셨나요?”
“다 끝났습니다. 공주는요?”
공주의 시험 일정은 딱히 궁금하지 않았으나, 우호국의 공주였기에 예의상 그렇게 물었다.
“저도 오늘이 마지막 시험이었어요.”
“그렇군요. 더 할 말이 있으십니까?”
무언가 할 말이 더 있었나 보다. 칼바도스의 말에, 셀레네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오늘 시간 있으세요?”
“있으면, 아껴 쓰라는 말을 하려고요?”
그 말이 우스웠는지 셀레네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없으면 저랑 저녁 식사는 어떠신지 여쭤보려던 참이었죠.”
“우리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까?”
접점도 없어서 딱히 없는 것 같은데…….
가늠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녀의 속을 헤아리려 들던 때, 셀레네가 말했다.
“오랜 친구에게 두근거림을 느낀 동지끼리 저녁을 곁들인 이야기 좀 하자고요.”
아.
“그거 좋지요.”
눈앞의 공주는 편한 상대가 아니었지만,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았다.
경계를 거둔 칼바도스가 냉큼 태세를 전환했다.
편하지 않은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이 든 친구처럼, 칼바도스는 그리 편하지 않은 상대와의 편안한 식사 제안을 수락했다.
*
칼바도스가 셀레네를 데리고 간 곳은 낮황밤영이라는 소문을 듣고 분노의 칼질을 한 식당이었다.
같은 연극을 보고 오랜 친우를 향한 감정을 깨달은 두 사람은, 작은 방 안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주, 지금부터 우리가 이 자리에서 나눌 대화는 절대 유출되어선 안 됩니다. 알겠지요?”
“당연하죠! ‘황공 1차 비밀 회담’이잖아요.”
황공 1차 비밀 회담?
칼바도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설마, 황공의 뜻이 황태자와 공주입니까?”
“……네. 별로예요?”
“모임 이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오간 말이 더 중요하지.”
“헤헤, 그렇죠?”
언제 눈치를 봤냐는 듯, 셀레네는 생글생글 웃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전, 셀레네가 물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면 저렇게 물을 들이켜는 건지. 칼바도스는 황공 비밀 회담 동지의 이야기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이전번에 전하께서, 유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감정을 정의하라고 조언해 주셨잖아요.”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조언할 처지는 아니었죠.”
공주와 나눈 대화를 떠올린 칼바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조언대로 유리와 시간을 보낸 결과, 저는 제 감정을 제대로 깨달았답니다.”
“드디어 트로이센 공자를 향한 감정에 이름을 붙인 겁니까?”
깊게 숨을 들이마신 셀레네가 후련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 제가 유리를 좋아해요.”
감정에 이름을 붙인 셀레네는 곧 원망스러운 눈으로 칼바도스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유리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까 계속 의식하게 되더라고요. 이게 다 전하께서 저한테 선물한 연극 티켓 때문이에요.”
자기와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칼바도스는 얄미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황태자의 머리를 쥐어박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셀레네는 짧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연극을 보고 난 뒤엔, 특별한 일이 많이 생겼어요. 아니, 이전까지는 유리와 함께한 평범한 일상이 특별하게 다가온 거였어요. 함께 말을 타니 등 뒤의 유리가 신경 쓰이고, 거리를 걸을 때 아무 의미 없이 살짝 스치는 손을 의식하게 되고, 나를 보며 짓는 유리의 미소가 계속되길 바랐어요.”
셀레네는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인정했다. 익숙함을 특별하게 느끼면서, 특별한 존재를 더욱 특별하게 여기게 되면서.
셀레네의 말을 들은 칼바도스는,
‘나는 왜 말을 잘 타지?’
말을 탈 줄 몰랐으면 엘렌시아가 가엾게 여겨서라도 태워 줬을 텐데.
‘조금만 모자랄걸. 난 왜 이렇게 잘나서…….’
그런 생각을 했다.
칼바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셀레네가 계속 떠들기 시작했다.
“‘공주님 안기’라는 말은 도대체 누가 만든 걸까요? 저는 공주인데 그렇게 안겨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 도서관 계단에서 넘어져 발목을 다쳤는데 유리가 저를 그렇게 안아 들었어요. 정말 부끄러웠는데,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반대쪽 발목은 언제쯤 다쳐야 하나…… 이 생각을 했다니까요, 글쎄.”
재잘거리는 셀레네를 보며 칼바도스가 말없이 웃었다. 역시 남의 사랑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그렇게 웃던 칼바도스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나도 언제 한번 발목을 다쳐야 하나? 아주 살짝만 삐끗하면 될 것 같은데.’
업는 게 힘들면 부축이라도 해 주지 않을까.
엘렌시아가 다치기를 바랄 수는 없으니, 자신이 다치는 것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제 몸을 끔찍하게 아끼는 칼바도스는 아주 조금만 다치고 싶었다.
“아무튼 전하의 말씀대로,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축제 구경을 갔거든요? 같이 불꽃놀이를 구경하는데, 불꽃이 너무 빨리 사라지는 게 아쉬웠어요. 불꽃이 피었다가 지는 내내, 유리는 제 옆에 있었죠. 그때 생각했어요. 유리가 앞으로도 계속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같은 날, 같은 하늘을 본 칼바도스 역시 셀레네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저는 제 마음을 전하기로 했어요.”
같은 하늘을 봤지만, 셀레네는 칼바도스와 다른 결정을 했다.
“……차이면 어쩌려고.”
“차여도 상관없어요. 이런 마음을 속에 간직하고 살다간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예전 같은 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 해도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칼바도스는 공감할 수 없었다.
예전 같은 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니.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그는 친구와 함께한 예전이 너무도 소중했다.
“전하는 어떠세요? 전하께서도 공녀를 향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셨나요?”
“그놈의 불꽃은 뭔데 자꾸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걸까요. 나도 그날 불꽃놀이를 보며 무언가를 깨달았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칼바도스는 컵을 가득 채운 물을 들이켰다.
목이 말라서가 아니었다.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 없는 이야기를 매끄럽게 꺼내기 위해서였다.
그제야 그는 조금 전 공주가 물을 들이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칼바도스는 셀레네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보라색 눈이었다.
“어렸을 적 나는 모종의 사건으로 보라색을 싫어하게 됐는데, 어느 순간부터 보라색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불쾌하기 짝이 없던 보라색을 가장 좋아하게 된 건 전부 엘 때문이에요.”
엘?
황태자는 공녀를 그렇게 부르는 건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셀레네는 굳이 묻지 않았다.
“공녀가 뭘 했는데요?”
“아무것도요.”
그 애는 그저…….
“그저 내 옆에 있었을 뿐입니다. 특별한 건 없었죠. 그냥…… 엘이 입은 보라색 재킷이 꽤 잘 어울렸거든요. 보라색도 꽤 나쁘지 않구나, 그런 생각을 한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녀석이 들고 있던 히아신스 꽃다발이 아름다워서, 언젠가 그 꽃다발을 한 아름 안겨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축제 날, 하늘에 수를 놓은 보랏빛 불꽃을 보면서 나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보라색뿐만 아니라, 엘과 함께한 순간까지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함께한 시간을 떠올린 칼바도스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끔찍하게 싫어하던 것마저 사랑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 단어의 무게에 셀레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반응을 눈치챈 그가 셀레네의 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의 칼바도스는 몰랐다. 과거엔 저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여자를 사랑해서, 세상의 모든 보라색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공녀와의 관계에 진전은 좀 있으셨나요?”
“내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데, 우리 둘 사이는 여전합니다.”
칼바도스는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걘 대체 날 뭘로 보는 건지……. 내가 헐벗고 있으면 소리를 지르거나 당황하는 대신, 훑어보고 50년은 놀려먹을 녀석입니다. 아주 악독하죠. 농담 삼아 황태자비가 되는 건 어떠냐고 청혼한 적이 있는데, 대차게 거절하더군요.”
아, 그때 그 청혼을 말하는 거구나!
‘이대로 소문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냥 네가 황태자비 할래?’
‘미친놈…… 너 제정신이야?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지, 어떻게 그런 말을……!’
아는 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난 셀레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아요. 그랬죠.”
아, 맞아요. 그랬죠……? 공주의 반응에 이상함을 느낀 칼바도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칼바도스가 청혼 같지도 않은 청혼을 한 곳은 의무실이었다.
‘그때 공주는 엘렌시아가 떨어뜨린 법전에 머리를 맞아 쓰러져 있었는데.’
칼바도스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공주, 내가 청혼한 일을 공주가 어떻게 압니까?”
아.
나 그때 기절한 척하고 있었지.
제 실수를 깨달은 셀레네가 적당한 답을 떠올리며 눈동자를 위쪽으로 굴렸다.
“어…… 그게요, 그게 그러니까…….”
“눈알 굴리지 마시죠. 굴러가는 소리 다 들립니다.”
“안 들리시잖아요오…….”
칼바도스의 말에 눈알 굴리기를 포기한 셀레네가 울상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