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51화
_레이델 외전
레이델은 화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좋아했다. 어머니의 것과 같았으니까.
그리고 어두운 밤, 달빛을 받은 구름과도 같은 연회색빛 눈동자를 좋아했다. 레이몬드의 것과 같았으니까.
후작의 아이를 가진 레이델의 어머니, 아리아는 돈을 받고 후작저를 떠나 작은 빵집을 차렸다.
아리아를 유독 좋아했던 어린 레이몬드는, 아리아가 후작저를 떠나는 날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엉엉 울었다. 적당히 나이가 차자, 레이몬드는 종종 후작저를 빠져나와 레이델과 아리아를 만나 시간을 보냈다.
레이몬드가 동화책을 읽어 주는 날은 레이델의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어머니가 굽는 빵 냄새는 고소하면서도 달콤했고, 책을 읽어주는 형의 목소리는 마시멜로처럼 부드러웠다.
레이델은 정말 그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하지만 영원한 삶을 사는 신의 사전에는 영원이라는 단어가 없었는지, 그의 어머니는 강도를 만나 죽었다.
장례 후, 렘브로 메릴이라는 셋째 형의 제안에 따라 레이델은 레이몬드의 손을 잡고 후작저에 발을 들였다.
“꼭 피에 젖은 것 같구나.”
후작저에 들어서자, 그토록 사랑했던 붉은 머리카락은 피를 나눈 렘브로에 의해 조롱당했다.
그리고 레이몬드와 같은 연회색빛 눈동자를 아버지라는 자 역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스스로의 눈을 뽑아 장님이 된 어느 남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후작저에서의 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렘브로는 대체 왜 이 녀석을 저택으로 들이자 한 걸까요?”
“모르지. 아버지의 그 잘난 셋째 아드님 뜻을 우리가 어찌 알겠느냐.”
셋째 렘브로 메릴.
첫째와 둘째는 동생인 렘브로를 싫어했다. 하지만 렘브로의 앞에서 티 내지는 못했다.
렘브로의 눈치를 보던 두 사람은, 렘브로가 레이델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형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깜짝 놀란 레이몬드가 달려와 두 사람을 막았지만 몸 약한 레이몬드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얻어맞았다.
레이델은 레이몬드를 걱정하며 울었고, 레이몬드는 레이델을 걱정하며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엉엉 울고 있을 때, 렘브로의 모습이 보였다.
우는 동생들의 모습을 초연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
“그 녀석에게 우리와 같은 음식을 줬다고?”
“죽기 직전까지 매질해라.”
레이델에게 형제들과 같은 음식을 가져다줬다는 이유로 하인들은 처벌받았다.
하지만 명령과 다르게, 매를 맞던 하인은 죽고 말았다. 그러자 매질을 하던 하인은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죽임당했다.
“궁금하잖아. 사람이 얼마나 배가 고프면 시체를 먹을지.”
라며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한 둘째 형은, 레이델의 방에 시체를 두었다.
시체와 함께 밤을 지새우던 레이델이 몸을 떨었다. 시체도 무서웠지만, 시체를 던진 형들이 더 무서웠다.
시간이 한참 지나 고약한 냄새가 방에 퍼질 때도,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레이델은 변함없이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가 몸을 떠는 이유는 두려움에서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레이몬드는 열 밤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지만, 이미 열 밤은 꽤 오래전에 지나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점이 있던 눈이 왼쪽이었는지 오른쪽이었는지. 형의 얼굴을 그리던 레이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살아 있는 형을 만날 수 없다면, 죽은 어머니라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아들의 마음과는 달랐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델은 새 이름과 새 생명을 얻었다.
시간이 흘러 페르데니아의 건국을 축하하는 날이 다가왔다.
황궁 연회에 참석할 형에게 맞아 피가 났고, 형의 옷에 피가 묻어 크게 혼이 났다.
그렇게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을 때,
“눈 좀 떠 봐. 레이델.”
어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그를 괴롭힐 새로운 누군가 나타난 걸까.
맞는 것은 아프고 싫어서 레이델은 몸을 구겼다.
누군가가 건넨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리자 붉은 눈을 가진 어느 여자애가 보였다.
투명 망토를 두르고 저를 만나러 온 그 애는,
“……신?”
마치 신의 현신과도 같아서, 이름 모를 여자를 그렇게 불렀다.
걱정과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레이델의 손을 잡은 그 애가 말했다.
“여기서 도망치자, 레이델.”
꿈일까. 꿈에서 깨어났을 때 다시 이 지하실이라면, 헛된 꿈을 꾼 스스로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이라도 좋아. 도망치게 해 줘.”
물에 빠져 익사 직전의 상황에 처한 레이델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타오르는 지하실을 눈에 담으며, 그는 어머니와 형과 함께 읽은 어느 이야기를 떠올렸다.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투구를 쓰고, 괴물의 목을 자른 어느 영웅의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당신이 신이 아닌 인간이라면.
당신은 틀림없이 나의 영웅이리라.
*
‘저는 새벽마다 공녀님 생각이 날 것 같아요.’
아득한 새벽하늘에는 항상 그 사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막 떠오르는 붉은빛 태양이 어두운 구름에 삼켜진 하늘의 색이 꼭 그 사람 같아서.
‘어디서부터 밤이고, 어디서부터 아침인지.’
새벽은 모호한 경계 사이에 있다. 그래서 새벽이 되면 그 사람 생각이 났다.
‘단순히 은인이라고 정의하기엔 아쉬운데.’
그 사람을 자신의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날이 많아졌다.
‘형은 잘 지내고 있을까.’
공녀와 레이몬드가 무엇을 계획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공녀는 지금의 메릴을 원치 않고, 레이몬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이 원하는 건 같았다.
후작저로 돌아간 레이몬드가 가문을 고발한 뒤, 후작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
그런데 이 계획의 어디를 봐도 레이델이 필요한 곳은 없었다.
‘공녀님께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레이몬드 형이야.’
그리고 레이몬드는 레이델을 아낀다.
‘공녀님은 형의 내부 고발을 조건으로 나를 보호하고 계신 거고.’
만약,
‘레이몬드 형에게 내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공녀님은 나를 구하셨을까?’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존재 자체는 공녀님께 쓸모가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원망하려던 때,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있어.’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다 파고들었다.
“모든 사람이 가치 있고 쓸모 있다고 하셨지. 하지만 나는…… 그분께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분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내 마음을 알아주실까.
그분께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다행히 레이델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
쿵―
쿵, 쿵―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귀가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괴물이야! 괴물이 나타났다고!”
“……엄, 엄마, 오빠가……!”
어머니는 아들의 시체를 뒤로한 채 딸을 안고 달렸고, 노인은 달리는 것을 포기한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가 병사들을 불러와!”
머리는 소에 몸은 사람인 거대한 괴물이 마을을 짓밟았다.
그 참담한 현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레이델이 검을 집어 들었다.
당신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당신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이름을 알리면 가문을 재건할 때 도움이 될 테고. 공녀님께서도 나를 필요로 해 주시겠지.’
그 생각 하나만으로 레이델은 괴물을 쓰러뜨렸다.
피범벅이 된 채 괴물의 시체 위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레이델을 보며 사람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레이델은 그 환호가 아주 기껍지는 않았다.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 황실에선 영웅의 공을 치하하겠다며 웰링턴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날, 그분께선 나를 보러 와 주실까.’
어렸을 때처럼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레이델은 숭고한 영웅의 가면을 쓰고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아카데미에 입학한 레이델의 눈은 언제나 공녀를 좇았다.
그리고 공녀의 옆에는 언제나 황태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자기 자신만큼이나 서로를 잘 알고 있다. 공녀와 황태자 사이엔 제3자가 끼어들 수 없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레이델은 그런 황태자가 부러웠고, 그 역시 공녀에게 신뢰받고 싶었다. 힘을 길러서 공녀가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녀가 믿고 이용할 수 있는 하나의 패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패가 되기는커녕, 삿된 소문으로 폐만 끼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레이델은 그런 스스로가 미워졌다.
하지만 공녀는 말했다.
“너는 폐가 되지 않아. 괴물을 죽인 제국의 영웅이니, 자랑이면 모를까.”
영웅.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마디.
“공녀님, 왜 제가 그 괴물을 죽였는지 아십니까?”
“글쎄. 사람들이 다치는 걸 보기 싫어서?”
그것은 아주 작은 충동이었다.
사실 내가, 당신이 아는 숭고한 뜻을 품은 영웅이 아니라 쓸모와 가치에 연연하는 한심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 당신은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볼까. 그게 궁금해서.
“저는 공녀님의 자랑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구한 겁니다. 그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쓸모와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실망했다는 답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뒤,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을 한 공녀에게 물었다.
“실망하셨습니까.”
하지만 혼란스러운 표정도 잠시,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굳건한 표정을 한 그녀는,
“아니. 실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라고 말했다.
비에 젖어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던 그때, 툭 던져진 공녀의 말에서 레이델은 온기를 느꼈다.
‘……약속이라.’
공녀는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다.
이미 그녀는 열 번째 밤에 레이몬드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켰으니까.
*
“아파서. 그리고 약 기운이 돌아서, 자꾸만 헛소리가 나올 것 같습니다.”
감기에 걸린 날, 레이델은 괜히 약 기운 탓을 했다.
그리고 줄곧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것을 꺼내 물었다.
“제가 형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공녀님은 저를 구하지 않으셨겠죠?”
함께 비를 맞은 날, 공녀는 그의 영웅 노릇에 실망하지 않았다.
하여 레이델은 공녀의 입에서 어떤 답이 나와도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너를 구했을 거라고 거짓말을 하신다면 그 거짓말을 기꺼이 믿을 것이고, 너를 구하지 않았을 거라고 솔직하게 말씀하신다면…….
“그래. 구하지 않았겠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내가 정말로 선한 사람이었다면, 너 하나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 게 아니라 빈민가의 아이들부터 후원했을 거다. 내가 너를 구한 건 네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네가 누군가에게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야.”
맞는 말로 뺨을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공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밀려나고, 밀려나던 레이델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잠시 뒤, 입가에 미소를 띤 공녀가 말했다.
“지금부터 너랑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줄까? 선택은 네 자유야.”
“뭡니까, 그게?”
“지금 우리가 우리의 관계에 각자가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게 지금의 너와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공녀는 말 한마디로 레이델을 매몰차게 절벽에서 밀어 버린 후, 다정하게 밧줄을 던져 주었다.
선택은 자유라더니.
처음부터 승낙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제가 공녀님과의 관계에 최선을 다한다면. 저 역시 공녀님의 최선을 바라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그럼 제가 할 일은 정해졌군요.”
우리가 우리로 만날 수 있는 지금 이 세상에서, 이 관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에도 온도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준 나의 영웅이자 주군인 당신을, 그 누구보다도 경애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델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