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50화
감기에 걸렸기 때문일까?
반짝이던 연회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몽롱하게 꺼져 있었다. 마치 눈동자가 정전된 것 같았다.
나는 열이 오른 레이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밥 먹었어?”
“……아뇨. 아직입니다.”
“그럼 너는 나을 자격이 없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의무실 한구석에 자리한 테이블 위에 칼바도스와 함께 사 온 수프들을 올려 두었다.
“내가 직접 음식을 사 와서 차려 놓기까지 했는데. 계속 이불 안에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밥을 먹어야 약을 먹고, 약을 먹어야 감기가 낫는다.
그러니 레이델은 밥을 먹어야 했다.
곧 하얀 이불이 꿈틀거리더니, 화염 같은 붉은 머리의 영웅이 자신의 병약한 모습을 이불 밖으로 드러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수프들을 보던 레이델이 입을 열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오셨습니까……?”
내가 사 온 것은 당근 수프와 양송이 수프, 버섯 수프, 단호박 수프였다.
여러 가지를 사 온 이유는 간단했다.
“혹시 입에 안 맞아서 안 넘어갈까 봐. 그리고 나는 네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샀어. 한 입씩 먹어 보고 가장 맛있는 걸로 골라서 먹어.”
아픈 나를 위해 온갖 종류의 죽을 사 온 친구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레이델은 내 말대로 한 입씩 먹어 보고 수프를 고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단호박 수프와 당근 수프를 먹겠다고 말하며 나에게 양송이 수프와 감자 수프를 권했다.
그렇게 나와 레이델은 각자의 앞에 놓인 수프를 해치웠고, 레이델은 알약을 삼켰다.
덩치가 저렇게 큰데, 작은 알약 하나가 무서운지 알약을 삼킬 때마다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쥐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약을 삼킨 레이델이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약 기운 탓에 졸음이 몰려오는 것인지 그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아파서, 그리고 약 기운이 돌아서…… 자꾸만 헛소리가 나올 것 같습니다.”
“해 봐. 난 헛소리 잘 들어.”
9년 동안 칼바도스와 헛소리를 주고받은 사이였다. 더하면 더했지 레이델보다 덜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레이델의 입 밖으로 나올 말들은 헛소리가 아닐 것이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약해진다. 헛소리가 아니라, 마음이 약해져서 꾹꾹 누르고 있던 속마음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것이다.
반쯤 감긴 눈을 한 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공녀님.”
“응.”
“제가 형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공녀님은 저를 구하지 않으셨겠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린 날, 레이델은 물었다.
‘……그럼 질문을 바꿀게요. 왜 저를 구하셨어요? 저는 아무 쓸모 없는데.’
어린 레이델은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델과 달리, 소설을 읽은 나는 그의 쓸모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구했다.
남자주인공의 최측근과 친분을 다지고, 레이몬드가 죽는 미래를 막아 메릴가의 내부 고발을 진행하기 위해서. 너는 그런 역할이었다.
웰링턴에서 오랜 시간을 지낸 레이델은 내가 그를 구한 이유를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제가 형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공녀님은 저를 구하지 않으셨겠죠?’
그것은 웰링턴에 살던 레이델이 스스로의 질문에 내린 답이었으며, 정답이기도 했다.
나는 카인과 후작저에 쳐들어가 레이델을 구해 왔고, 레이몬드에게 내부 고발을 권했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후작저로 돌아가 고발을 준비하는 조건으로 나에게 레이델의 안위를 맡겼다. 나는 레이몬드와의 그 암묵적인 거래 하에 레이델을 보호한 거고.
‘레이델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단순히 착한 마음으로 어린 그를 구한 것이 아니라, 다른 마음을 가지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레이델이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는 마당에,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깊게 들이마신 숨을 내뱉으며 솔직하게 답했다.
“그래. 구하지 않았겠지.”
레이델이 소설에서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면 구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정말로 선한 사람이었다면, 너 하나를 구하기 위해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 빈민가의 아이들부터 후원했을 거다. 내가 너를 구한 건 네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네가 누군가에게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야.”
그 ‘누군가’는 레이몬드뿐만이 아니라 남주인공인 칼바도스까지도 포함했다.
“……빈말이라도 좀 해 주시지. 받아들일 준비는 내내 하고 있었지만, 막상 들으니 섭섭합니다.”
그는 섭섭하다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을 마친 레이델이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그 슬픈 눈이 버거워, 나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고 할 말을 골랐다.
그리고 그때, 이 관계를 재정립할 방법 하나가 떠올라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금부터 너랑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줄까? 선택은 네 자유야.”
“뭡니까, 그게?”
조금 전까지 정전된 것 같았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어질 말이 궁금해서 눈을 반짝이는 건지, 그의 눈에 살짝 고인 눈물 때문에 눈이 반짝이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우리가 우리의 관계에 각자가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게 지금의 너와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여쭈어봐도 됩니까?”
“네가 너로 태어나고, 내가 나로 태어나, 우리가 우리로 만날 수 있는 곳은 지금 이 세상뿐이니까.”
소설에서 엘렌시아와 레이델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만약 내가 빙의하지 않았다면…… 이번 생에서도 나와 이놈은 서로를 못 물어뜯어서 안달이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왔기 때문에 우리는 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순수하지 못했던 우리의 시작에 슬퍼해선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관계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레이델은 한참 동안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얼굴을 한 그가, 곧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혹시 방금 하신 말씀이, 빈말이라도 좋으니 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제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뱉으신 빈말입니까?”
그럴 리가.
나는 빈말을 잘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순간에서까지 빈말을 할 정도로 능한 사람이 못되었다.
“나는 진심이었어. 하지만 빈말처럼 들렸으면 빈말로 받아들여도 돼.”
조금 전 나는, 이 관계에 있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줌과 동시에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그러니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레이델의 몫이었다.
반쯤 감긴 눈을 한 채 레이델이 살짝 웃었다.
“공녀님께서 진심이라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빈말로 듣겠습니까.”
“그럼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네.”
“제가 공녀님과의 관계에 최선을 다한다면, 저 역시 공녀님의 최선을 바라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메릴을 재건하는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나는 이 관계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럼 제가 할 일은 정해졌군요.”
말을 마친 레이델이 만족한 얼굴로 눈을 감았고, 나는 큰소리가 나지 않게 살짝 문을 닫으며 의무실을 떠났다.
*
며칠 뒤, 시험이 끝났다.
마지막 날 시험 3과목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몸과 정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시험이 끝난 뒤 함께 놀러 가자는 칼바도스와 레이델의 제안을 거절한 채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에서는 시험이 아직 한 과목이 남은 피오나가 침대에 엎드려 공부를 하고 있었다.
찌든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샤워를 마치고, 대충 실내에서 입는 셔츠를 걸쳤다. 물기가 덜 마른 머리카락 때문에 셔츠가 젖어 등이 비쳤다.
내 인기척에 책에서 눈을 뗀 피오나가 등 쪽에 자리한 흉터를 보더니 물었다.
“설마 흉턴가요? 다치셨어요?”
“아, 예전에.”
어렸을 적, 카인의 마나 폭주가 있었던 날 생긴 흉터였다.
“어쩌다가 다치신 거예요? 아, 죄송해요. 흉터가 너무 커서…….”
자꾸 뭘 묻는 걸 보니 공부하기가 어지간히 싫은가 보다.
“그냥 어렸을 때 놀다가 다친 거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카인과 놀다가 마나 폭주에 휘말린 거니까.
‘그나저나 그렇게 큰 흉터는 아닌 것 같은데.’
기껏해야 사람 손바닥 크기인데다가, 예전에 비하면 색도 많이 옅어져서 별거 아닌 걸로 치부한 지 오래였다. 후유증도 없고.
사고에 휘말려 죽거나 다친 고용인들에 비하면 내 몸에 남은 흉은 솜털 수준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이었다.
내 흉터는 리베르트의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기폭제였다. 카인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버튼이기도 했다.
공작저에선 내 흉터를 별거 아닌 걸로 여기지 않았고, 아무도 흉터와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래도…… 드레스를 입을 땐 신경 쓰이실 텐데요.”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별로 신경 안 쓰여. 그리고 어차피 나는 등 파인 드레스를 자주 입는 편도 아니라 크게 상관없어.”
평상시 내 복장을 떠올린 피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 복장과 칼바도스의 복장의 구성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이제 그만 공부해. 내 몸은 그만 쳐다보고.”
대화가 끝나자 피오나가 아쉽다는 듯 책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책을 덮고 드러누웠다. 그런 피오나를 지켜보던 나 역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시험이 끝나면 해야겠다고 미뤄 둔 일이 계시처럼 떠올랐다.
‘신의 아들이 빠져 죽은 호수를 찾아야 하는데.’
찾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의 계시를 받은 자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 호수를 찾아내라는 신호를 보내는 느낌이었다.
일단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잠시 뒤, 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기숙사 침대 위에서 아주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