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49화
“실망하셨습니까.”
실망하셨군요.
나에겐 그 질문이 그렇게 들렸다.
실망했다는 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한 사람의 어조였다.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었으나, 앉아 있는 내가 두드리기에 레이델의 어깨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깨를 두드리는 대신, 한 손으로 그의 손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레이델의 손등을 토닥였다.
“아니. 실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진심이었다. 내가 레이델에게 실망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예상치 못한 이유에 조금 당황했을 뿐이다.
‘실망할 리가 없지. 이유가 뭐가 되었든, 사람을 구한 거잖아?’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영웅이 된 레이델을 내세워 메릴의 이미지 쇄신을 계획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마땅히 칭찬받아야 할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가 레이델에게 너무 큰 존재가 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됐지?
레이델은 나의 쓸모를 갈구하며 나를 주군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손을 놓는 것도 잊은 채 나는 고개를 돌려 레이델을 바라보았다. 실망하지 않았다는 내 말에, 그는 조금 안도한 것 같았다.
‘조금은 나와 비슷한가?’
레이델을 바라보는 것은 작게 쪼개진 거울 조각을 보는 것과 같았다.
나는 그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레이델은 착한 마음 때문에 사람을 구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성스럽고 용맹한 영웅이라 칭송을 받았다.
나 역시 타고난 착한 마음 때문에 레이델을 구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를 구한 이유는, 그가 이 소설의 중요한 등장인물이라, 레이몬드의 죽음을 막는 동시에 레이델을 먼저 보호하여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레이델은 나를 다정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어.’
슈아와 슈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들이 가엽다는 이유만으로 공작저로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루카스가 황위를 바라보는 계기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남매를 저택으로 들이자, 나는 마음씨 곱고 따스한 공녀가 되었다.
우리는 착한 마음을 가지고 행동을 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칭찬한다.
그 점에서 나는 레이델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나는 나의 조각인 레이델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약 레이델이 칼바도스의 최측근이 아니었다면, 나는 레이델을 구했을까?’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내부 고발을 할 레이몬드에게 레이델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너를 구했을까?’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구할 가치가 없으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너는 알까.’
거센 빗물에 숭고한 영웅의 가면이 벗겨졌고, 레이델은 그의 진심을 밝혔다.
하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레이델이 건넨 로브로 나를 더욱 꽁꽁 감출 뿐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말할 수 없을 거야.’
내가 못돼먹었다는 것을 잘 아는 칼바도스와 달리, 나를 다정하다고만 생각하는 레이델에게 이 사실을 들키기 무서웠으니까.
깨끗하지 못한 내 마음에 자꾸만 먹이 드는 가운데, 하늘을 뒤덮었던 먹구름이 서서히 사라지고 햇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비가 그쳤군요. 그치지 않았으면 했는데.”
“비를 좋아하나 봐?”
그러자 레이델이 약간의 원망을 실은 눈으로 나를 보며 답했다.
“……그런가 봅니다.”
그 시선을 무시한 채 나는 손으로 옷을 탁탁 털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자, 아카데미로.”
“예, 공녀님.”
짧게 답한 그가 원망스러운 시선을 거두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뒤를 따랐다.
*
“에녹!”
오늘 오전, 레이델을 발견한 내가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레이델은 얼굴을 가린 채 후다닥 도망쳤다. 그리고 그 뒤로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또 사라졌어, 또!’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레이델이 계속해서 나를 피해 다니고 있다.
룸메이트인 칼바도스는 자세한 사정을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칼바도스를 찾아갔다.
“혹시 에녹이 어디 갔는지 알아?”
“왜 나를 앞에 두고 그 녀석을 찾아?”
“너는 내 앞에 있지만 에녹은 내 앞에 없으니까. 당연한 걸 물어.”
그러자 칼바도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무실에 간다고 들었는데.”
“의무실엔 왜? 어디 아프대?”
하지만 그는 아니꼽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왜 그렇게 봐?”
“네가 너무 궁금해해서 알려 주기가 싫어졌어.”
내 친구의 인성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구나.
하지만 곧 칼바도스의 마음을 이해했다.
상대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내 손안에 있을 때, 갑자기 그것을 내어 주기 싫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빨리 말해. 난 에녹이 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쳐 버리거든.”
정말 미쳐 버리겠다는 듯 이마를 짚자, 칼바도스가 질색하며 냉큼 답했다.
“기침을 하던데. 아픈 것 같긴 했어.”
“아프다고?”
‘안 아플 것처럼 생겼는데.’
그도 그럴 것이, 레이델은 벼락을 맞아도 멀쩡하게 돌아다닐 것처럼 튼튼해 보였으니까.
‘비를 맞아서 그런가?’
나는 옆에 서 있던 칼바도스를 두고 계단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어디 가?”
황급히 나를 따라잡은 그가 물었다.
내 뒤에 서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칼바도스는 곧바로 계단을 한 칸 내려와 내 옆에 섰다.
채워진 옆자리에 안정감을 느낀 내가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프다며. 수프라도 사서 찾아가야지. 아플 때 혼자 있는 것만큼 서글픈 게 없어.”
레이델을 찾아가야 했다.
아플 땐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가 또 다른 약이 되기도 하니까.
“아플 때 혼자 있는 서글픔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칼바도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의문을 가질 만도 했다. 카인의 마나 폭주 이후로는 크게 다쳐 본 적도 없을뿐더러 앓아누운 적도 없다.
그럼에도 내가 그 서글픔과 옆 사람의 소중함을 아는 이유가 있다면, 본가를 떠나 혼자 살 때 아팠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의 서글픔은 오래가지 않았다. 근처에 살던 친구가 죽집을 털어 왔기 때문이다. 출장 뷔페처럼 죽집의 모든 죽을 종류별로 털어 왔다. 그 친구 덕분에 나는 서글픔과 소중함을 동시에 깨달았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나는 추억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칼바도스가 아는 엘렌시아에겐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대충 기억을 조작했다.
“……슈바가 알려 줬어.”
“너 방금 뜸 들였지. 슈바가 알려 준 거 아니지?”
이래서 눈치 빠른 녀석은 싫다니까.
한 사람을 오래 곁에 두었을 때 나타나는 익숙함을 좋아했지만, 서로를 잘 아는 것은 때때로 서로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슈바가 말한 거 맞아. 뜸을 들인 이유는 슈바가 말했는지 슈아가 말했는지 헷갈려서 그런거고.”
“그래?”
필요한 만큼 거짓말을 했으니 더 이상 말을 지어낼 필요가 없었다.
먼저 계단을 내려가던 내가 그를 살짝 돌아보며 물었다.
“같이 갈 거야, 말 거야?”
“……1시간 정도는 시간 있어.”
그렇게 말하며 성큼 계단을 내려온 그가 다시 내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
잠시 뒤, 나는 칼바도스와 수프를 사 들고 의무실을 찾았다.
하지만 나와 칼바도스를 발견한 레이델은 바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쓸 뿐이었다.
“너 대체 왜 이래?”
내가 짜증스럽게 이불을 빼앗으려 했지만 레이델은 이불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바로 그때, 이불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옮으면 안 되니까요.”
“……누구세요?”
이불 안에 레이델이 있는 걸 봤는데. 목소리는 다른 사람의 것이다. 걸걸한 목소리에 저절로 그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에녹입니다.”
“아, 너 감기 걸렸구나?”
“큼, 예. 공녀님께 옮으실까 봐 바로 여기로 왔습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레이델이 답하자 칼바도스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럼 나는? 어제 방에서 내내 기침하지 않았나?”
어처구니없다는 칼바도스의 말에 레이델이 숨을 내뱉듯 말했다.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니까…… 괜찮을 겁니다.”
“뭐라고? 기가 막혀서…….”
레이델은 칼바도스를 황족으로 대우하는 게 아니라 그냥 족같이 대우하고 있었다.
나는 레이델에게 달려들려는 칼바도스를 밀어냈다. 그리고 레이델이 누운 침대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전에 셀레네를 기절시킨 혐의로 한 차례 방문한 적이 있어 익숙한 곳이었다.
“나는 누구랑 달리 바보도 아니고, 감기에 잘 걸리지도 않으니 여기 있어도 되겠지.”
“영웅을 함락시킨 감기야. 우리도 걸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지.”
하여간 자기 몸 하나는 끔찍이 아끼는 녀석이었다.
옆에 있는 칼바도스가 괜히 레이델의 신경을 긁는 것 같아 나는 칼바도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넌 이제 가 봐야 하지 않아? 1시간밖에 시간 못 낸다며.”
그만 떠들고 이만 가지그래?
내 말뜻을 깨달은 칼바도스가 얼굴을 구기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네가 말 안 해도 가려던 참이었어.”
그렇게 속 좁은 칼바도스는 의무실을 나서는 순간까지 황족답지 못하게 툴툴거렸다.
칼바도스가 떠난 뒤 의무실은 조용해졌지만, 레이델은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으려고?”
“감기 옮습니다.”
“글쎄 난 그런 거 안 걸린대도.”
“…….”
레이델은 나에게 폐를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내가 감기에 걸리면 레이델은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는 튼튼했다.
이렇게 자주 사용할 생각은 없었건만, 어쩔 수 없이 나는 레이델을 움직일 수 있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내가 너의 ‘주군’이라 했지?”
“예…….”
“주군에게 얼굴도 보여 주지 않는 기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 서러워서 살겠나.”
하지만 너무 자주 사용하면 반발심이 생길 테니, 주군 찬스는 당분간 봉인해 둬야겠다.
경우도 없이 튀어나오는 주군 발언에, 레이델은 이불을 살짝 걷어내 연회색빛 눈동자만을 드러냈다. 그리고 열이 잔뜩 오른 얼굴로 달뜬 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보니 레이델의 열이 나에게까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