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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48)화 (48/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48화

하지만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레이델이 납치당할 리 없지.’

웰링턴에 나타난 괴물을 썰어 죽인 녀석인데, 사람을 못 썰까 싶었다.

애초에 누가 레이델을 납치할 엄두를 내겠는가?

납치에 대한 의심을 거두려던 때, 그와 같은 연회색 눈을 가진 중년 남자의 서늘한 얼굴이 머릿속을 메웠다.

‘아, 설마.’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걸음을 멈췄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설마 후작가에서 에녹이 레이델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건가?’

바다 근처 작은 마을에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나타났고, 평범한 시골 남자가 괴물을 물리쳤다.

오랜 시간 신의 자녀가 나타나지 않은 제국에, 잘생긴 영웅의 등장은 제국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 충분했다.

‘영웅 에녹 헤르트는 눈에 띌 수밖에 없어.’

귀족이든 평민이든. 예외는 없었다.

만약 후작가에서 에녹을 보고 레이델을 떠올린다면, 9년 전 레이델의 죽음에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럼 에녹이라는 남자가 언제부터 웰링턴에 거주했는지 그 주변을 조사했겠지.

레이델과 메이가 신분을 숨긴 채 웰링턴에 살기 시작한 것은, 9년 전 건국제 이후였다.

‘레이델의 장례식도 9년 전 건국제 이후였어.’

납치당한 것이 맞다면, 최악의 경우엔 레이몬드의 내부 고발이 들통나고 외부 협력자인 내 쪽에서 꼬리를 밟힌다.

‘레이델과 레이몬드가 둘 다 죽는다면, 메릴의 재건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해.’

정말로 납치당했나?

생각하고 싶지 않을 일이라 속으로 여러 번 가능성을 물었다.

‘아니. 내가 너무 나쁜 쪽으로 생각하는 걸지도 몰라.’

무려 9년이다. 지금의 레이델을 보고, 9년 전 레이델의 모습을 떠올리긴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아이 얼굴은 일곱 번도 더 변한다지 않는가.

레이델은 더할 것이다. 과거의 그는 깔끔하고 듬직한 모습의 지금과는 다르게, 지하실 바닥을 구르던 비실비실한 어린아이였으니까.

‘제국에서 붉은 머리는 꽤 흔한 편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불규칙한 호흡이 규칙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크게 호들갑 떨지 않아도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레이델은 종종 내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한다. 소설에선 죽이지 않았던 괴물을 죽이고, 다래끼를 가리기 위해 안대를 쓰고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갑자기 모습을 감췄지.’

레이델과 관련된 생각을 하면 늘 생각이 최악의 방향으로 치닫고 만다.

그가 안대를 쓰고 돌아온 날도 오늘처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불안해했다.

‘그래도 그땐 리온이 옆에 있었는데.’

하지만 슬프게도 지금은 나 혼자였다.

공작저에서 한가롭게 지내고 있을 리온을 생각하니 괜히 울적해진 그때,

투둑― 툭.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에이씨…… 가뜩이나 기분 더러운데 날씨까지 사람 열받게 하네.’

빗방울이 빗줄기가 되어 화살처럼 땅을 겨누자 사람들이 급한 걸음으로 광장을 떠났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는 비를 피하지 않고 내 뒤에 서 있었다.

‘레이델이구나.’

나는 비를 피하는 대신 그 자리에 서 있는 쪽을 택했다.

“왜 비를 피하시지 않으십니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성큼 다가온 레이델이 내 어깨에 짙은 녹색 로브를 둘러 주었고, 나는 고개를 돌려 붉은 머리의 영웅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러고 있으면 네가 말을 걸 것 같아서.”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너는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이니까.”

소설이 아니라,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본 레이델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자 레이델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착하지 않다고?

“그럼 이건 뭔데?”

나는 레이델이 둘러 준 로브를 가리켰다. 내게 로브를 건넨 탓에 레이델은 비에 쫄딱 젖은 채였다.

“공녀님이 감기에 걸리시면 안 되니까요.”

착하지 않긴 무슨.

“고마워. 하지만 나는 튼튼해서 감기 같은 거 잘 안 걸리니까, 이건 네가 두르는 게 좋겠다.”

로브를 돌려주려 하자 레이델은 벗지 말라는 듯 꼼꼼하게 매듭을 지었다.

매듭을 다 지으면, 다시 사라지려나? 매듭을 완성한 레이델이 손을 거두려 하자 내가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어디 갔었어?”

다급하게 잡은 것치곤 덤덤하게 물었고, 레이델은 답하지 않았다.

“너는 참 나를 불안하게 해.”

“그럼 저는 이제 내쳐지는 겁니까?”

나는 들인 적도 없는데, 어떻게 너를 내치겠는가.

그런데 레이델은 마치 언제든 버려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답했다.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없애는 길을 택해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협력관계인 레이델을 없앨 수는 없었다.

그러니,

“아니. 그래서 더 곁에 둬야겠다고 생각했어.”

더 가까이 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답인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레이델이 물었다.

“……그래도 됩니까?”

“그럴 수밖에 없잖아. 네가 자꾸 멋대로 행동하니까. 나는 레이몬드 님과의 약속대로 너를 잘 데리고 있어야 해.”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질 않나, 갑자기 사라지질 않나.

허튼짓을 못 하게 아니, 허튼짓을 해도 내 앞에서 허락을 받고 하는 게 나았다.

“줄곧 바라던 바입니다.”

곁에 두겠다는 말을 들은 레이델이 어깨에 맺힌 빗방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잠시 뒤, 떨림이 멎고 제법 영웅다운 숭고하고 굳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형이 지어 준 레이델이라는 이름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께 받은 메릴이라는 성을 떠올리면 당신 앞에 서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무게를 잡냐.

비에 젖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레이델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 맹세에, 황제께서 친히 하사하신 자랑스러운 성 헤르트를 메릴 대신 사용하려 합니다.”

“아니 갑자기 맹세는 왜……?”

“당신은 어린 날의 악몽에서 저를 깨워 주시고, 두렵기만 하던 열 번째 밤을 지켜 주셨으니까요.”

이 미친놈,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해야 결론이 이렇게 나지?

갑자기 돌아서 가출을 하더니, 엉뚱한 데 꽂혀 눈이 뒤집힌 게 틀림없다.

“야, 그건-”

“나 레이델 헤르트는, 나의 영웅인 당신을 나의 주군으로 섬기고자 합니다. 부디 나를 당신의 승리를 위한 패로 삼아 이용하시고, 내가 승리한 당신의 뒤에 서 있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

빗줄기를 뚫고 나직한 맹세가 울려 퍼졌고, 나는 고민 끝에 레이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레이델이 굳이 나에게 맹세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손해는 아니니까 일단은 잠자코 받아 주자. 일이 꼬여서 문제가 생기면 그때 잘라내도 되겠지.

*

나와 레이델은 상가 건물 아래에서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레이델의 안전을 확인한 내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무 상자에 걸터앉았다.

“자, 그럼 이제 왜 숨어다녔는지 이야기해 봐.”

“…….”

답을 피하는 동시에 눈까지 피했다.

“나는 네 주군이라며?”

레이델에게 있어 ‘주군’ 발언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속 열려라 참깨와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주군이라는 말에, 무거운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입이 열렸다.

“……공녀님께 폐가 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폐?

“도대체 언제 폐가 됐는데?”

“저 때문에 공녀님이 괜한 소문에 얽히셨잖습니까. 제 입으로 말하긴 정말 싫지만, 공녀님께서 양다리라는 소문보다는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라는 소문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숨어 있었다고?”

“……예. 제가 공녀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그래서 소문이 사라졌을 때쯤 돌아오려 했습니다.”

레이델은 멘탈이 유리로 되어 있나? 이건 뭐, 레이델의 단순 가출을 납치로 오해한 나보다 걱정이 심했다.

“저는 저의 존재가 공녀님이 이용할 수 있는 패가 되기를 바란 것이지, 폐가 되기를 바란 것이 아닙니다.”

사라진 이유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여태 걱정을 한 내가 우스울 정도로 심각하지 않은 이유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 때문에 난 소문이 아니야. 내가 입을 잘못 놀린 탓이니 사과를 해야 하는 건 내 쪽이지. 그리고 너는 폐가 되지 않아. 제국의 영웅이니 자랑이라면 모를까.”

“…….”

내 말을 가슴에 새기듯이 묵묵히 듣던 레이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녀님, 왜 제가 그 괴물을 죽였는지 아십니까?”

비는 지상의 모든 것을 씻어 낸다. 사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비를 쫄딱 맞은 레이델은 투명하게 제 속을 드러내고자 했다.

“글쎄. 사람들이 다치는 걸 보기 싫어서?”

소설에서 후작가 사람들은 레이델이 도망친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을 위장한 지금, 후작가 쪽은 레이델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즉, 소설과 달리 레이델의 마음에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과는 달라진 상황에서 비롯된 ‘약간의 여유’와,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결과라고 이미 결론을 지어 둔 터였다.

하지만 레이델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고? 그럼 뭔데?”

“제가 먼저 말을 꺼내 놓고도 우습지만, 공녀님께서 실망을 하실까 봐 말씀드리기 두렵습니다.”

‘혹시 명예와 부를 원한 건가?’

속물적인 모습에 내가 실망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100억 골드를 주면 칼바도스와 엮일 준비가 되어 있는 나다. 누구보다 돈을 사랑하는 내가 고작 그런 것을 가지고 실망할 리 없었다.

“실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러니까 말해 봐.”

이미 답을 예상했기에 놀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레이델은 뜻밖의 답을 꺼냈다.

“9년 전 그날, 제게 빚을 갚으라고 하셨지요.”

빚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지난날의 대화가 넘치듯 밀려왔다.

‘저를 왜 구하셨는지 모르겠어요.’

‘빚이야.’

‘빚이요?’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말고 갚아. 그거면 돼.’

열 번째 밤, 나는 레이델에게 레이몬드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고 레이델은,

‘만약 그 약속을 지켜 주신다면, 저는 모든 순간에 걸쳐 당신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게요.’

라고 말했다.

“그랬지.”

“당신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서, 당신께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 빚을 갚고자 했습니다.”

9년 전과 같은 눈을 한 레이델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괴물을 본 순간, 어느 생각 하나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저 괴물을 죽이고 사람들을 구하면, 나의 쓸모와 가치를 증명할 수 있겠구나. 그 생각 하나만으로 검을 들고 달려 나갔지요.”

뭐?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저는 공녀님의 자랑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괴물을 죽인 겁니다.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쓸모와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

레이델이 괴물을 죽인 이유는, 마을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선한 마음 때문도 아니었으며, 명예와 부를 탐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나에게 쓸모 있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거 진짜 미친놈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내 표정을 놓치지 않은 레이델이 스스로를 비웃듯이 말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마음이 여리지 않고 착한 사람도 되지 못한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경고등을 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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