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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47)화 (47/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47화

“낮황밤영이요?”

“응. 낮황까진 대충 알겠는데 밤영은 도저히 모르겠네.”

“…….”

피오나가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왜 눈을 피해? 빨리 말해 봐.”

내 재촉에 머뭇거리던 피오나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공녀님께서 ‘낮’에는 ‘황’태자 전하를 애인으로 두고, ‘밤’에는 제국의 ‘영’웅을 애인으로 둔다는 뜻이래요.”

“어……?”

내가 뭘 한다고?

낮황밤영의 숨겨진 뜻에 사고가 정지한 나머지, 내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낮황밤영이 그 뜻이었어?’

낮에는 칼바도스를 애인으로, 밤에는 레이델을 애인으로 둔다고?

“그럴 리 없겠지만 아주 약간의 기대를 품고 물어볼게. 소문의 그 공녀가 나야?”

“달리 누가 있겠어요…….”

작은 기대는 확인 사살이 되어 돌아왔다.

“대체 왜 그런 말이 퍼진 거야?”

“에녹 경이 밤늦게까지 공녀님을 놓아주지 않아 몸이 아프다고, 공녀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누가 들었대요.”

나는 입을 틀어막았고, 피오나는 말을 이었다.

“그런 에녹 경을 질투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공녀님의 밤을 달라고-”

“이런 거지 같은!”

성질을 못 이겨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책상을 내리쳤다.

“미친 거 아니야? 어쩐지 나를 쓰레기 보듯 보더라!”

얼마 전부터 느껴진 기분 나쁜 시선의 이유를 깨달은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칼바도스와 레이델을 두고 양다리를 걸친 셈이잖아?

칼바도스는 기분 탓이라고 말했지만,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럼 칼바도스를 향한 안타까운 시선도 기분 탓이 아닌 건가?’

이제 생각해 보니 사람들이 칼바도스를 안타깝게 볼 만도 했다.

공녀에게 버림받은 제국의 황태자가 공녀의 애첩을 질투하는 처지로 전락했는데, 가엽게 볼 만도 했다.

서로의 명예에 큰 타격을 주지 않았던 칼바도스와의 약혼설과 달리, 이번 소문은 우리 세 사람의 명예를 나란히 깎아 먹고 있었다.

“10억 골드를 퍼부어 줘도 황태자랑 그렇게 엮일 일 없어!”

“그럼 100억 골드는요?”

“그땐 조금만 엮여 봐야지. 손이라도 한번 잡아 볼까? 어?”

100억 골드는 좀 혹했다. 하지만 100억 골드로 줘도 칼바도스와 깊게 엮일 생각은 없었다.

칼바도스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칼바도스와 합의 하에 얕게 엮인 다음, 50억 골드씩 나눠 가지겠지.

“……하.”

세상에서 가장 문란한 쓰레기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쓰레기가 되었으니 이제 이 방도 쓰레기통이다.

방 안에서 혼자 화를 내 봤자 해결될 일은 없었기에, 나는 나를 둘러싼 난잡한 소문에 체념하듯 웃었다.

“쓰레기통에 온 걸 환영해, 피오나.”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쓰레기통이네요.”

피오나가 위로를 가득 담은 미소 한 줄기를 건넸다. 그럼에도 축 처진 마음은 다시 펴질 줄 몰랐다.

아무래도 내일, 낮의 애인인 칼바도스와 밤의 애인인 레이델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았다.

*

레이델과 칼바도스를 만나 자세한 대화를 나누려던 내 계획은 틀어졌다.

레이델이 검술 수업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 간 거야, 대체?’

레이델은 한 번도 수업에 지각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검술학부 건물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는 성실하고 착한 녀석이었다.

그런 레이델이 말도 없이 수업을 빠지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요즘 레이델이 다른 학생들과 자주 어울렸지.’

나는 빠르게 강의실 내부를 훑었다. 레이델과 어울리던 학생 한두 명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나쁜 물이 들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레이델에게 다른 학생들과의 교류를 권장한 것은 나였다.

메릴 가문의 이미지 회복의 주인공이 될 레이델이, 주변으로부터 좋은 평을 들을수록 좋았으니까.

‘괜히 다른 학생들이랑 친하게 지내라고 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영웅 특유의 숭고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내세워서 거리를 두게 할 걸 그랬다.

‘다음에 레이델을 만나면 왜 수업을 빠졌냐고 물어봐야지.’

찝찝함과 걱정을 가득 안은 채, 나는 칼바도스와의 약속 장소로 옮겼다.

정문 분수대 앞에 칼바도스가 보였다. 기분 탓인가, 오늘따라 화려하게 챙겨입은 것 같았다.

내 기척을 느낀 칼바도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고, 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표정이 썩어 들어갔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칼바도스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썩은 걸 보니, 너도 들은 모양이지?”

“너 역시 들었을 테고.”

“그 이야기 좀 하자.”

“해야지. 안 할 수가 없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이야기를 나눌까 하다가, 나와 칼바도스는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소문을 생각하면 입맛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식사는 해야 했다.

우리는 식당의 2층에 위치한 작은 방으로 안내받았다.

음식이 나오자 나는 신경질적으로 고기를 썰었다.

“낮황밤영이라니……! 내가 살면서 들어 본 소문 중에 가장 문란한 소문이야!”

고기를 다 썬 후에도 분이 가시지 않아 한 손에는 포크를, 한 손에는 나이프를 쥔 채 테이블을 한번 내리쳤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민들레야. 일편단심이라고……! 그런데 밤낮을 나눠서 애인을 둔다는 소문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맞은편에 앉은 칼바도스 역시 거칠게 고기를 썰며 말했다.

“내가 살면서 들어 본 소문 중에 가장 문란하고 자존심 상하는 소문이기도 해. 낮황밤영이 뭐야? 낮황밤황도 아니고.”

낮황밤황?

“그러게. 차라리 그게 낫겠다.”

낮황밤황이건, 낮황밤영이건 둘 다 거지 같았지만 차악을 골라야 한다면 낮황밤황이다.

낮과 밤으로 애인을 따로 둔다는 소문보다는, 배동에서 시작한 소꿉친구 로맨스가 훨씬 건전한 이야기니까.

내가 칼바도스의 의견에 동의하자 그가 고기를 썰던 손을 멈추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선택받은 것이 좋은지 칼바도스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좀 기쁜데.”

“……감히 에녹까지 건드리다니.”

하지만 이어진 내 말에 칼바도스가 바로 미소를 거두었다.

“그 말은 엄청 별로고.”

‘낮황밤영’보다 ‘낮황밤황’이라는 소문이 낫다고 판단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에녹 때문이었다.

이 추문에 레이델이 엮여서는 안 되었다. 영웅 에녹은 고귀하고 성스러운 제국의 영웅으로 남아 있어야 했으니까.

정색도 잠시, 칼바도스가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우리 두 사람보다는 에녹에게 치명적인 소문이겠어.”

칼바도스가 계획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버지와 형들을 배신해 학대당하는 동생을 지킨 눈물겨운 형제애, 죽은 듯이 숨어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구하고자 검을 뽑아 든 숭고한 영웅. 그리고 황태자와의 진실된 우정. 그 녀석을 이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게 우리 계획이었지.”

“그래. 그런데 지금은 추문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고. 성스러운 영웅이란 이미지는 추락한 지 오래야.”

형제애와 영웅을 언급하며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도, 낮황밤영이라는 추문이 따라붙을 것이다.

“뭐, 다른 의미로 성스럽긴 해.”

“거기다 상스럽기까지 하고.”

그렇게 말한 내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성스러운 영웅이 상스러워지는 데엔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이래서 소문이 참 무섭다.

“장르가 제대로 바뀐 셈이야. 성장물에서 성인물로.”

지금 그런 농담을 할 때냐고 따지려 했지만, 정말 성장물에서 성인물로 장르가 바뀐 게 맞았다. 정확히는 성장물의 후속작이 성인물이 된 것이다. 성장형 판타지 소설 1, 2, 3권을 재밌게 읽던 중, 갑자기 4권에서 장르가 변하더니 19금 딱지가 붙은 상황이었다.

이상한 장르 농담을 하던 칼바도스는 계속 비어 있는 레이델의 자리가 신경 쓰였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에녹 그 녀석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어제도 방에 안 들어왔어.”

“어제도 안 들어왔다고?”

그럼 레이델은 대체 어딜 간 거지?

마치 물가에 수박을 내놓은 심정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그 수박이 떠내려갈까 봐 걱정하는 처지였고.

“……오늘 저녁엔 돌아오겠지. 너무 크게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나를 안심시키려는 칼바도스의 말과 달리,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레이델은 돌아오지 않았다.

*

레이델은 성실한 녀석이다.

나에게 통보도 없이 사흘 연속으로 수업을 빠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이상으로 수업을 빠지면 그는 최저 학점을 받게 될 것이다.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사람을 풀어서 행방을 알아봐야 하나?

하지만 이게 단순 가출이라면 괜히 사람을 푼 나와 레이델만 쪽팔릴 테니, 일단은 내가 직접 찾아 나서는 게 낫겠다.

“요즘 에녹 경이 안 보여서 그러는데, 혹시 어딜 간 건지 아나?”

“글쎄요……. 저희도 그런 건 잘 알지 못해서요……. 도움이 되지 못해 송구합니다.”

최근 레이델과 어울렸던 학생들에게 그의 행방을 물었지만 아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서 얻은 아주 적은 양의 정보를 가지고 레이델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레이델은 유명인이니까 누군가는 봤겠지.’

괴수를 죽인 영웅으로 황제가 친히 성을 하사했으니, 사람들이 쉽게 잊을 리 없었다. 레이델을 알아보고 가게에 사인을 걸어 두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곧 목격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레이델이 좋아하는 망고 디저트 전문점이었다,

“아! 에녹 헤르트라면 당연히 알죠!”

주홍색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뺨에 귀여운 주근깨가 있는 점원에게 에녹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레이델이 사라진 3일 동안 이 가게에 온 적이 있냐는 질문에 점원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망고 냄새를 맡고 싶지 않아 대화 내내 숨을 계속 참고 있었던지라, 나는 숨을 들이쉬기 위해 급히 가게를 나섰다.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레이델이 방문한 적이 있다는 술집과 식당이었다.

주인들 모두 영웅 에녹 헤르트를 안다고 답했으나, 최근 사흘 동안 가게에 방문한 적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미치겠네. 대체 어디로…… 아니, 애초에 대체 왜 사라진 거지?’

무심코 발을 뻗은 곳은 시계 탑이 있는 중앙 광장이었다.

활기차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멈춰 선 채 생각했다.

‘……설마 납치라도 당했나?’

그게 아니고서야 갑자기 사라질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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