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46화
주말 아침, 나는 레이델과의 대련으로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칼바도스와 만나기로 한 카페로 향했다.
힘없이 음료를 받아 온 내가 쓰러지듯 자리에 앉아 팔을 주물렀다.
‘이렇게 검을 부딪친 게 얼마 만인지.’
리온과 칼바도스를 제외하고, 이렇게 땀을 흘리며 다음 날 몸이 쑤실 정도로 대련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디 아프냐?”
“온몸이 쑤셔.”
어느새 다가와 옆자리에 앉은 칼바도스가 나를 살폈다.
“에녹 때문에?”
“어. 어젯밤에 나를 놓아주질 않더라고. 진짜…… 괴물 같은 놈.”
초반에는 호기롭게 대련을 수락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검을 집어던지고 도망치고 싶었다.
레이델 역시 나처럼 지쳐 있었으나, 그는 대련장 대여 시간을 꽉 채우고도 아쉬운 얼굴을 했다.
“내일 밤에도 만나기로 했는데, 그땐 진짜 힘들어서 죽을지도 몰라.”
팔을 주무르라는 의미로 장난스레 팔을 내밀자, 칼바도스는 군말 없이 팔을 주물렀다.
하지만 귀하게 자라 마사지에 서투른 이 망할 황태자는, 가장 아픈 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꽉 눌러 버리는 실수를 범할 뿐이었다.
“악! 미쳤어!”
갑작스러운 통증에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팔을 빼자, 칼바도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미안. 일부러 그랬다.”
칼바도스는 내가 따지기도 전에 반대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엉덩이를 들어 소파의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나와 거리를 벌린 칼바도스는 가지고 온 책을 무릎 위에 펼쳤다.
‘저 자식이?’
평소처럼 장난을 치나 했는데, 장난을 건 것치고는 표정이 굳어 있었다.
‘저거 삐졌네.’
딱 보니 알겠다.
“왜 혼자 삐지고 난리야.”
답하기 싫은지 입술을 꾹꾹 누르던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내일 밤에도 에녹을 만나기로 했다며.”
“지금 혼자 삐져 있는 이유가 그거야?”
“나 안 삐졌거든.”
“나랑 에녹이 너를 빼놓고 만나서 삐진 거네. 맞지?”
사실 단순히 삐졌다기보다는 소외감을 느낀 것 같았다.
레이델이 공작저에서 지낼 적, 칼바도스는 나와 레이델이 있는 검술학부로 전과를 하겠노라 선언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거 아니거든.”
나는 여전히 꽁해 있는 칼바도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대신 낮에는 너랑 더 오래 있잖아.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 아쉽겠지만 그걸로 만족하지그래?”
너무 질투하지는 말고.
그렇게 덧붙이자 칼바도스가 질색하는가 싶더니, 곧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보다 훨씬 나아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낮은 내가 차지하고, 네 밤은 그 녀석이 차지하네.”
“아니지. 내가 내 낮의 일부를 친히 너에게 할애해 준 거고, 에녹에게 내 밤의 일부를 할애해 준 거지.”
“다음번에는 나도 상대해 줘. 네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네 밤의 일부를 나한테도 할애해 달라고.”
역사학부에서 혼자 외로웠는지 칼바도스가 질척거렸다. 나는 고개를 치켜든 채 거만하게 굴기로 했다.
“더 간절하게 부탁해 봐.”
“너무 비싸게 구는 거 아니야?”
“도스 네가 잊고 사나 본데…… 난 원래 비싸게 굴어도 되는 사람이야. 나랑 약속 잡으려면 한 달 전에는 미리 서신을 보내야 한다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긴 한데. 지금 매달려야 하는 건 내 쪽이니 굳이 언급하지 않겠어.”
이미 언급했으면서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심보가 궁금하다.
그나저나, 칼바도스를 상대한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실기 시험이 끝나면 대련장을 이용하는 학생이 줄어서 예약도 지금보다 여유롭겠지.’
시험이 끝나고 대련장이 한가해지면 그때 대련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대충 시험이 끝나는 날짜를 짐작한 내가 질척이는 칼바도스의 제안을 수락했다.
*
카페에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학생들은 어느 순간부터 입을 여는 대신 귀를 열어야 했다.
공녀와 황태자의 대화 때문이었다.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공녀가 제 팔을 주무르며 말했다.
“어젯밤에 나를 놓아주질 않더라고. 정말…… 괴물 같은 놈.”
이 말을 시작으로, 카페 안의 모두가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에녹 경이 공녀님을 놓아주지 않았다고?’
‘공녀님과 에녹 경이 그런 사이였구나!’
‘에녹 헤르트는 밤이 되면 괴물이 되는구나!’
‘하지만 공녀님은 황태자 전하와 약혼할 거라고 들었는데? 왜 이 이야기를 전하께 하는 거지? 설마 공녀님은 전하께 마음이 없으신 건가?’
황태자는 내일 밤에도 에녹을 만나는 거냐며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제국민들이 아는 평상시의 당당한 황태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생각했다.
‘아…… 어쩌면 좋아. 황태자 전하의 짝사랑이구나.’
‘에녹 경을 질투하고 계신 거야.’
황태자를 향한 공녀의 마음이 식은 게 틀림없었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지 않은가.
황태자가 오랜 친우이자 약혼자가 될 공녀에게 영웅 에녹 헤르트의 거처를 맡겼다. 에녹 헤르트가 공작저에 머무는 사이 공녀의 마음이 변했고, 황태자는 지금 공녀와 에녹 헤르트의 사이를 질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는 지금까지의 흐름을 뒤바꿔 놓았다.
“대신 낮에는 너랑 더 오래 있잖아.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 아쉽겠지만 그걸로 만족하지그래?”
“네 낮은 내가 차지하고, 네 밤은 그 녀석이 차지하네.”
‘………?’
‘……저게 무슨 뜻이지?’
‘낮에는 황태자 전하가 공녀님의 애인이 되고, 밤에는 에녹 경이 공녀님의 애인이 되는 거구나!’
‘낮과 밤으로 쪼개서 만나는 거였어?’
‘그럼 공녀님이 전하를 버린 게 아니라, 전하와 에녹 경 두 사람을 차지하신 건가?’
이 남자도 저 남자도 포기하지 않는 공녀와, 공녀를 포기하지 못한 두 남자가 낮과 밤으로 나눠 시간을 보내는 것에 합의한 것이 틀림없었다.
혼란에 휩싸인 사람들이 셋의 관계를 정의하던 중, 황태자가 말했다.
“다음번에는 나도 상대해 줘. 네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네 밤의 일부를 내게 할애해 달라고.”
‘전하께서 이제는 밤까지 넘보시는구나!’
낮에만 공녀를 차지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 황태자가 밤까지 욕심내고 있었다.
‘전하, 너무 구차해요!’
차마 소리쳐 외칠 수 없었기에 속으로만 외칠 뿐이었다.
공녀와 황태자가 카페를 떠난 뒤, 한 학생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읊조렸다.
“결국 이 모든 건 공녀님의 하렘이었구나.”
낮에는 황태자와, 밤에는 제국의 영웅과.
그 말이 도화선이 되어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공녀님이 황태자 전하와 에녹 경을 낮과 밤으로 쪼개서 만나시는 거지?”
“내가 듣기론 그랬어.”
“황태자 전하라면 원하는 것은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구나.”
“그러게. 공녀님의 밤은 에녹 경의 것이니까.”
낮을 차지하던 황태자가 공녀의 밤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절박해질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지친 시험 기간, 자극적인 소문은 단비가 되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
“요즘 사람들이 나를 안타깝게 보는 것 같지 않아? 기분 탓인가?”
며칠 뒤, 함께 산책을 하던 칼바도스가 물었다.
잘난 칼바도스를 아니꼽게 보는 사람은 있어도, 안타깝게 볼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기분 탓이겠지. 그보다 요즘 사람들이 나를 쓰레기처럼 보는데, 기분 탓인가?”
“기분 탓이겠지.”
비슷한 내 질문에 칼바도스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렇게 산책을 마치고 칼바도스와 헤어진 뒤, 나는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 1층 휴게실에서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들렸다.
“낮황밤영이라고 들어 봤어요?”
“당연하죠. 요즘 누가 그걸 몰라요?”
‘난 모르는데…….’
하지만 딱히 대화를 엿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걸음을 옮겼다.
‘낮황밤영?’
쉽게 자리를 떠난 것과 달리, 그 단어 하나가 귀에 박혀 떨어지질 않았다.
‘그게 뭐지? 줄임말 같은데.’
낮과 밤을 제외하고는 바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천천히 기숙사 계단을 오르며, 나는 내 나름대로 줄임말을 풀이하려 애썼다.
‘황’은 황족을 말하는 건가?
아카데미에 황족은 칼바도스뿐이니 칼바도스를 지칭할 확률이 높다.
남은 건 밤과 영인데…….
‘영이 의미하는 건 대체 뭐지?’
방에 도착한 나는 침대에 드러눕는 대신,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렸다. 공작의 보좌관인 세오 경이 보면 지적할 자세였다.
머리에 힘을 주고 영의 의미를 추측하던 그때, 문이 열리고 나의 룸메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오나? 엄청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피곤에 찌든 피오나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저야 요즘 예술학부 건물에서 살다시피 하니까요.”
예술학부 건물은 기숙사와 멀었고, 건물은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새벽에 기숙사로 돌아와서 다시 새벽에 언덕을 넘어 작업실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하다 지친 피오나는 며칠 치 짐을 싸 들고 언덕 위의 예술학부 건물로 떠나 버렸다.
“짐 가지러 온 거야?”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려고요.”
“덕분에 오늘 밤은 외롭지 않겠어.”
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다시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다시 피오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집요한 나의 시선을 눈치챈 피오나가 물었고, 나는 질문으로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피오나, 낮황밤영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