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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45)화 (45/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45화

밤 10시 45분, 나는 레이델과의 검술 대련을 위해 예약해 둔 4번 대련장으로 향했다.

지난 시간, 대련이라는 본래 목적을 잊고 레이델과 수다만 잔뜩 떨어 댔기 때문이다.

낡은 철문을 밀자, 철문이 돌로 된 바닥에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흉악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이전 시간대에 대련장을 이용한 학생들이 생각보다 일찍 대련장을 나선 것인지 대련장은 텅 비어 있었다.

‘내가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지겨워 일찍 출발한데다가, 밤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구석에서 목검 하나를 챙긴 뒤 바닥에 쭈그려 앉아 레이델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딱히 혼자서 할 만한 것이 없었기에, 나는 주머니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문학 시험 대비를 위해 준비한 요약본 중 한 페이지였다.

그렇게 외운 내용을 혼자 중얼거리던 나를 붙잡은 것은, 어린 남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시였다.

아주 오래전, 태양신은 태양 마차를 몰고 싶다는 아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마차를 모는 데 능숙하지 못했던 어린 아들은 태양 마차에서 떨어져 호수에 잠겨 죽었다.

‘그런데 그 호수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네.’

문득, 그 호수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호수의 위치가 언급되긴 했지만, 정확한 위치는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숲에 둘러싸여 있다고 한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죄 많은 머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툭툭 쳤으나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일단 시험이 끝나면 알아보자.’

지도를 보면 바로 정확한 위치가 떠오를 것도 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던 그때, 다시 한번 소름 끼치는 문소리가 들렸다.

대련을 위해 간편한 옷을 입은 레이델이 문에서 난 기분 나쁜 소리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와 눈이 마주친 레이델이 밝게 웃었다.

“공녀님! 언제 오셨습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나도 방금 왔어.”

‘그나저나 뭐가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아.’

“그새 귀를 뚫었어? 빨라도 내일 뚫을 줄 알았는데.”

레이델의 양쪽 귓불에 작은 회색 원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탐내시는 것 같아서 오늘 뚫었습니다.”

“설마.”

귀한 것만 좋아하는 칼바도스가 노점에서 파는 피어싱을 탐낼 리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레이델의 귀를 살폈다.

가까이서 보니 귀 끝이 살짝 붉었다.

“아파?”

“아니요. 하나도 안 아픕니다.”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당분간 옆으로 누워서 자는 건 포기해야겠네.”

“공녀님께서 주신 선물이니 그 정도는 기꺼이 감수해야지요.”

그렇게 말한 레이델이 미소 지었다.

눈꺼풀 사이로 살짝 드러난 그의 연회색빛 눈동자와 귓가의 회색 원석이 제법 잘 어울려서, 레이델에게 선물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검술학부의 실기 시험 방식은 간단했다.

습격을 하는 이와 반격하는 이를 정한 뒤, 서로 역할을 바꿔 가며 수업 시간에 배운 동작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묵직한 소리만이 대련장 안에 울려 퍼졌다.

내가 목검으로 레이델을 공격하기 위해 빠르게 다가가자, 레이델은 내 검을 반대쪽으로 쳐 내고 팔꿈치로 내 목을 치는 동시에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목검의 끝이 아슬아슬하게 목에 닿았다.

팔을 제압당한 내가 바닥에 뭉개진 채 레이델을 올려다보자, 그는 슬픈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연습이라지만, 공녀님을 팔꿈치로 쳐서 넘어뜨릴 때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어차피 역할을 바꿔 가면서 하는 거니까 마음 쓸 필요 없어.”

이제 레이델이 내 팔꿈치로 얻어맞을 차례였다.

내가 보란 듯 한쪽 팔꿈치를 가리키자, 레이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팔꿈치가 너무 뾰족하신 거 아닙니까?”

“오늘을 위해 어제 제대로 갈고 왔지.”

나는 조금 전 레이델이 그랬듯 그의 검을 쳐 낸 뒤, 팔꿈치로 그의 목을 가격하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 밖에도 나와 레이델은 창을 쳐 낸 뒤 검으로 상대의 목을 겨누는 동작, 창을 밟아 상대가 공격할 수 없게 만든 뒤 반격하는 동작, 그리고 검을 쥔 상대방의 팔을 자신의 팔 사이에 끼운 뒤 반격하는 동작 등을 연습했다.

그렇게 시험에 필요한 연습을 마치고, 목검을 원래 있던 곳에 두려던 때였다.

“공녀님, 저를 상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와 달리 여전히 검을 손에 꼭 쥔 레이델이 정중하게 물었다.

‘상대해 달라고?’

“우리 여태까지 서로를 상대하지 않았나?”

“저와 대련해 주신 적은 없는 것 같아서요.”

“……아.”

다른 학생들과 달리 나는 레이델과 대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해 봤자 시험 연습이었지, 승패를 가르는 대련을 해 본 적이 없다.

‘내키지 않는데.’

소설 속 엘렌시아는 레이델보다 강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싸움에서 레이델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리고 팔이 잘려 나갔지.’

레이델과의 대련이 내키지 않는 이유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패배할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지면…… 지면 어떡하지?’

어쩌긴 뭘 어쩌나.

레이델과 대립하지 말고 친하게 지내야지!

대련에서 패배하면, 강자와 우호관계를 취하라는 삶의 자세를 깨달을 수 있다.

반대로 내가 승리한다면, 나는 이 보이지 않는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겨도 져도 내게 나쁠 건 없었다.

그러니 더 이상 레이델과의 대련을 피할 이유 또한 없었다.

“저를 상대해 주시겠습니까?”

“좋아.”

대답과 동시에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고, 바로 검과 검이 맞부딪혔다.

동시에 서로의 시선 역시 부딪쳤다.

‘그 거대한 괴물을 어떻게 죽였는지 알 것 같네.’

검으로 괴물의 발뒤꿈치를 도려내 괴물을 넘어뜨리고, 메이가 던져 준 도끼로 괴물의 머리를 내리쳤다고 들었다.

괴물을 쓰러뜨린 영웅의 검은 제법 묵직했다.

‘바람이 불면 넘어질 것 같던 녀석이.’

웰링턴에서의 지난 9년이 헛된 시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몇 번이고 서로 검을 주고받다가, 레이델의 검 끝을 밀어내는 동시에 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먼저 검을 거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졌습니다.”

말없이 숨소리와 검이 부딪히는 소리만 가득하던 대련장에 레이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왜 웃어.”

이긴 쪽은 나인데, 웃는 쪽은 레이델이었다.

그 미소에 담긴 뜻을 알기 어려워, 나는 좀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저는 졌지만, 공녀님이 이기신 게 좋아서 웃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나는 리온에게 수도 없이 졌지만, 리온이 이긴 게 좋아서 웃어 본 적은 없었다.

‘분해서 욕하고 땅만 내리쳤지.’

레이델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처음엔 꼭 제가 이겨서 멋진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막상 승리하신 공녀님 모습을 보니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자꾸 웃음이 나옵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잊고 있었던 승리의 기쁨이 내재된 불안감을 녹여 없앴다.

그제야 나 역시 레이델처럼 웃을 수 있었다.

내가 해방감을 느끼고 있던 때, 시계를 확인한 레이델이 무언가를 굳게 다짐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는 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간에 돌아가서 공부를 하는 것보단 대련이 나았다.

지금 상황에서 불안해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련에 응했다. 하지만 레이델의 연이은 대련 신청 끝에,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걸 후회했다.

*

시몬의 리오스 왕자는 그의 충직한 수하인 율리안이 보낸 편지를 보며 웃었다.

그러자 이를 꺼림직하게 여긴 왕자의 친구가 물었다.

“왜 자꾸 웃어?”

“내 누이 머리에 구멍이 났다는데. 웃을 수밖에.”

“설마, 공주님이 돌아가신 거야?”

아무리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라지만…… 동생이 죽었는데 저렇게 웃는다고?

정말 제정신이 아닌 놈이었다.

“그건 아니고. 몇 바늘 꿰맸다는군.”

“놀랐잖아! 대체 왜 말을 그렇게 해?”

리오스는 친구 로펨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한번 편지의 내용을 눈에 담았다.

공주가 다친 것을 빼면 딱히 큰 문제가 없었다.

‘정말 별거 없군.’

별거 없다는 말로는 성이 차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아예 제국에 뼈를 묻게 할까…….”

누이가 왕국에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리오스가 불쾌한 얼굴로 편지 봉투를 툭툭 두드렸다. 얼마 전 왕비와 2왕자가 그의 심기를 어지럽힌 탓이다.

현재 시몬의 정세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외부에서는 성지 정복을 목적으로 란도르 왕국이 공격해 오고 있으며, 내부에서는 1왕자 리오스를 왕으로 추대하는 1왕자파와, 2왕자 칼린을 왕으로 추대하는 2왕자파가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다.

칼린의 어머니인 힐다 왕비는 2왕자파의 수장이었고, 왕비의 손에 자란 공주 셀레네는 본의와는 관계없이 2왕자파로 여겨졌다.

공주가 1왕자 리오스와 같은 배에서 태어났지만, 두 사람의 어머니가 공주를 낳고 세상을 떠난 탓이었다.

공주는 자신을 키워 준 힐다 왕비의 뜻을 쉽게 거절하지 못했고, 왕비는 칼린의 지지 세력을 얻기 위해 공주를 이용했다. 왕국의 레오폴트 공작이 공주를 원했고, 왕비는 공작과 공주의 결혼을 약속한 것이다. 공주의 뜻은 무시당했다.

그러자 공주와 1왕자의 외할머니인 프리아모스 자작은, 그녀에게 아카데미 유학을 권했다.

그 덕분에 제국 아카데미로 도망친 리오스의 누이는, 제국 땅에서 아주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잠시 뒤, 편지를 쥔 리오스의 손에서 불꽃이 일었다.

불타 사라지는 편지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대로 죽어 버렸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래 준다면 내 손으로 너를 죽이지 않아도 되니까.

리오스는 셀레네가 죽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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