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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44)화 (44/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44화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저녁, 나는 레이델이 예약한 6번 대련장에 쭈그려 앉아 레이델을 기다렸다.

“공녀님!”

“에녹?”

뒤를 돌아보자 레이델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 모습이 개 같다고 생각할 뻔한 것도 잠시,

‘……저게 뭐야.’

오늘따라 레이델의 손에 들린 노란 것이 많아서, 나도 모르게 앉은 채로 뒷걸음질 칠 뻔했다.

“간식을 사 왔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레이델이 생글생글 웃으며 망고 바구니와 말린 망고가 들어 있는 단지를 건넸다.

망고 특유의 달달한 향이 코를 찔러서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사 와.”

“근처에 망고 디저트 전문점이 생겼습니다.”

망해라.

그 가게가 망하지 않는 한 레이델은 계속해서 망고를 사 올 것이다.

한참을 속으로 저주하다가 머릿속에 칼바도스의 조언이 떠올랐고, 나는 솔직하게 답하기로 결심했다.

선물을 건넨 레이델이 무안하지 않게, 나는 할 말을 고르고 또 골라냈다.

그리고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아주 오랜만에 그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저기, 레이델. 앞으로는 이런 거 선물할 필요 없어.”

“어째서입니까?”

“어…… 사실 내가 망고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서.”

‘말했다. 드디어!’

나는 해방감이 불러일으킨 미소를 미뤄 두고 레이델의 반응을 살폈다.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주인에게 혼이 나서 꼬리가 축 처진 개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짓을 했군요.”

며칠 연속으로 나에게 망고를 쥐여 준 것을 떠올린 레이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야. 내가 처음부터 싫어한다고 말을 했어야 하는데, 뭔가 말하기 미안해서…….”

그래서 이 꼴이 난 거다.

‘불편해도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할걸.’

불편한 상황을 피하려다 더 불편한 상황에 직면했다. 불편한 상황 탓에 나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고요한 대련장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이델이었다.

“저는 공녀님께 계속 뭔가를 드리고 싶고, 공녀님이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공녀님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는 오래 떨어져 있었으니까.”

“압니다. 저는 공녀님과 오래 떨어져 있었고, 공녀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요. 그래서 그게 속상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내 눈치를 보던 레이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도록, 공녀님에 대한 것을 하나씩 알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 대신 너무 자주 선물하면 안 돼.”

떨어져 지낸 시간은 길지만, 지금부터 하나씩 알아 가면 될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검술 대련을 때려치웠다.

검술 대련을 목적으로 1시간 동안 대련장을 예약한 주제에, 나와 레이델은 구석에 주저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아주 조금의 양심이 남아 있었던지라, 우리 둘 다 손에 목검을 쥔 채였다.

“목걸이를 싫어하신다고요?”

망고에 이어 2차 충격을 받은 레이델의 목소리가 대련장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시무룩해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정말, 공녀님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군요.”

“두 번 감아서 팔찌처럼 차면 돼. 그나저나 메이가 너한테 내 얘기는 안 해 줬나 봐?”

“네. 모시는 주인의 정보를 함부로 넘길 순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납득했습니다.”

“직접 물어봐. 뭐든지 대답해 줄게.”

내가 손을 까딱이자 레이델이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시작했다.

“공녀님께선 무슨 색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파란색.”

“생신은요?”

“7월 21일.”

“기억해 두겠습니다. 좋아하는 꽃은요?”

“민들레.”

“좋아하는 음식은요?”

“떡볶- 아니, 그냥…… 고기.”

마지막으로 떡볶이를 먹은 지 벌써 9년이 지났음에도 반사적으로 떡볶이라 답할 뻔했다.

주방장의 요리는 훌륭했지만, 한국 음식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떡볶이 먹고 싶다. 설렁탕이랑 깍두기도.’

하지만 그리움에서 비롯된 회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서운 속도로 이어지는 레이델의 질문에 답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음식은요? 파프리카와 망고 말고 또 있습니까?”

“어…… 생선 눈알? 지금은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

“목걸이는 왜 싫어하십니까?”

“답답해서. 목을 감싸는 건 대부분 안 좋아해. 내 호위인 리온 경이 그랬는데 전생에 못된 짓을 많이 해서 교수형을 당했을지도 모른대.”

농담이었는데. 레이델이 슬픈 얼굴로 부정했다.

“공녀님께서 그러셨을 리 없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고우신데요.”

절대로 내가 그랬을 리 없다고. 레이델은 확신하고 있었다.

‘네가 네 전생을 알면 절대 이런 말은 못 하겠지.’

살기 가득한 눈으로 엘렌시아를 바라보며 언젠가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그리고 우습게도, 이번 생에선 내가 그에게 좋은 사람인 모양이다.

그 사실이 위로처럼 다가온 나머지, 내가 먼저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또 뭐가 궁금해? 물어보면 다 답해 줄게.”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었는지, 레이델이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상형은요?”

이상형?

‘진짜 물어볼 게 없었나 보네…….’

하지만 괜히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뻔뻔하게 물었다.

“너 나 좋아해? 왜 그런 걸 물어봐?”

“……네? 아, 저는 그…….”

당황한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이 자리에 있는 게 칼바도스였다면 드디어 미친 거냐고, 헛소리하지 말라며 날뛰었을 텐데.

당황한 레이델의 반응은 제법 신선했다.

두 사람의 반응 차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제가 공녀님을 싫어할 리 없잖습니까.”

나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싫어할 리 없다는 말로 답했다.

칼바도스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으나, 질문에 대한 답은 칼바도스와 같았다.

싫지 않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 답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한다는 말에 담긴 의미는 너무 깊고 넓어서, 나를 좋아한다는 애매모호한 답보다는, 내가 싫지 않다는 뚜렷한 답이 좋았다. 그 편안함에 잠식되려던 때, 레이델이 답을 채근했다.

“아직 제 질문에 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상형이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고민 섞인 신음은 곧 탄성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바로 내뱉었다.

“일단 나는…… 얼굴이 잘났으면 좋겠어. 화가 치밀다가도 얼굴을 보고 화가 풀릴 정도면 더할 나위 없지. 몸은 숭하면 좋고. 당연한 말이지만 스스로를 가꿀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내가 작위를 물려받을 확률이 높으니 내조를 잘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꼭 이런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다짐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저는 어떤 얼굴입니까?”

그렇게 묻는 레이델은 몹시 불안해 보였다.

어떤 얼굴이냐니…….

‘거울 좀 봐. 제발.’

자존감이 썩 높지 않은 건 알겠는데…… 이쯤 되면 순진한 척하면서 나에게 미인계를 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다.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얼굴이지.”

그 답에 레이델이 안도하듯 웃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마음, 절대 변하시면 안 됩니다.”

잘생기든 못생기든 레이델은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니 곁에 두고 싶다는 내 마음이 변할 일은 없었다.

*

다음 날, 문학 강의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칼바도스가 내 손에 들린 아몬드 초콜릿 병을 가리켰다.

“그 녀석이 준 거야?”

“응. 너도 먹을래?”

칼바도스에게 견과류 알레르기가 없다는 것을 떠올린 후, 하나를 권했다.

초콜릿을 입에 넣기 전, 칼바도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망고 초콜릿은 아니지?”

“아몬드거든.”

“드디어 벗어났네.”

내 말에 칼바도스가 픽 웃으며 초콜릿 한 알을 입에 털듯 집어넣었다.

“이제 망고 선물은 안 한대?”

“어. 다음에 선물할 땐 실수하지 않겠다고 내 정보를 탈탈 털어 갔지.”

후련하게 말하는 나와 달리, 칼바도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거 완전 여우 같은데.”

“여우라니. 넌 에녹이 여우 같아? 여우보다는 곰이지, 곰.”

순하고 둔하고.

레이델을 여우로 몰아가는 칼바도스의 헛소리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 녀석이 어제 뭘 물어봤어?”

“어…… 그냥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음식이랑, 생일. 그리고…… 좋아하는 색깔이랑 이상형. 대충 그렇게 물어보던데.”

“여우 맞네.”

“아니래도.”

칼바도스 쪽을 향해 있던 고개를 돌리자, 책상 위에 올려 둔 초콜릿 병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 받기만 하니까 좀 그런데.’

이제 내 쪽에서도 답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선물에 대한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레이델이 귀를 뚫겠다고 했었지?’

머지않아 귀에 구멍을 내겠다는 레이델의 말이 떠오른 탓이다.

웰링턴에 살던 학생이 선물로 준 휘황찬란한 귀걸이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처음부터 크고 무거운 걸 착용하는 것보다는, 작은 걸로 먼저 뚫고 나중에 교체하는 게 낫겠지.’

내 쪽에서 작은 귀걸이를 하나 사 주면 썩 괜찮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귀걸이 생각을 하다 보니 축제 때 산 피어싱이 떠올랐다. 구입했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 서랍 속에 묵혀 두고 있었다.

‘그 피어싱…… 나보다는 레이델한테 더 잘 어울리겠는데.’

피어싱에 박힌 연회색 원석은 레이델과 레이몬드의 눈동자를 닮았으니까.

그리고 그날 오후, 레이델의 앞에 성큼 다가간 나는 다짜고짜 그의 손에 피어싱을 쥐여 주었다.

“이거 받아.”

“이게 뭡니까?”

“피어싱. 원래는 내가 하려고 샀는데, 나보다는 너한테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너랑 네 형님의 눈동자를 닮았잖아?”

“……제가 정말 이걸 받아도 됩니까?”

“당연하지.”

선물의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감동한 얼굴이었다.

선물을 받는 입장도 아니고, 선물을 주는 입장에서 부담스러움을 느끼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레이델이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죽을 때까지 몸에서 떼어 놓지 않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죽을 때까지 차고 다닐 기세였다. 그래서 나는 급하게 한마디를 덧붙여야 했다.

“때 되면 바꿔. 알겠지?”

“……예.”

대답 꽤 늦었으나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레이델은 칼바도스와 달리 시키는 대로 잘하는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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