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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43)화 (43/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43화

축제가 끝나고 시험 기간이 성큼 다가왔다. 축제의 분위기는 내 안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빠르게 증발했다. 이제 나는 꼬치가 아닌 펜을 들어야 했다.

마법 역사 과목 시험이 가장 먼저였기에 그 과목부터 훑어보기로 했다.

나는 역사책 사이에 끼워 놓은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수업 중 적어 둔 필기였다.

[마탑 설립, 마탑은 황실에 귀속되지 않는다. 가장 강한 마법사가 탑의 주인이 된다.]

[마탑의 황금기, 신의 사랑을 받는 마탑주 캐롤리나의 지배 아래, 마탑은 황금기를 누렸다.]

[마탑의 쇠퇴, 마탑주 로이드가 황위 다툼에 개입하여 6황녀를 지지하였으나 3황녀를 지지한 황실 마법단에 패배하여 힘을 잃었다.]

[흑마법을 사용한 마탑주 로이드가 처형당했다.]

흑마법.

막힘 없이 글을 읽던 내가 그 짧은 단어 앞에 우뚝 멈췄다.

글자만으로 긴장을 한 것인지, 좀처럼 시원하게 숨을 쉬기 어려웠다.

‘소설에선 카인이 흑마법사였지.’

카인 리베르트가 흑마법이란 금기를 범한 이유는, 그의 동생인 엘렌시아가 흑마법을 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흑마법에 관심이 없다. 그러니 카인이 금기를 범할 일은 없다. 어렸을 적부터 카인에게 흑마법에는 눈길도 주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둔 바도 있고.

하지만…… 호기심 많은 카인이 흑마법에 손을 대면 어쩌지?

‘원래 하지 말라는 건 더 하고 싶어지는데.’

흑마법에 관한 건은 카인의 선택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소설 속 악역 남매의 최후를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마침 펼친 페이지에도 흑마법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물론 학생들이 흑마법에 관심을 가져서 좋을 게 없었으므로, 좋지 않은 내용만이 가득했다. 금기를 범한 자의 최후처럼 겁주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금기를 범한 자들은 마법의 정상에 오른 자들로, 최후에는 힘을 통제하지 못해 죽었다는.

그나저나, 마법의 정상에 오른 자만이 흑마법을 접할 수 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개나 소나 흑마법을 건드릴까 봐 걱정됐나 보네.’

다룰 수 있는 마나가 아주 미약한 마법사여도, 제물을 바치면 흑마법을 쓸 수 있었다.

물론 제물의 조건은 아주 까다로웠다.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열망하는 자. 때 묻지 않은 순수하고 고결한 영혼을 가진 성인만이 제물이 될 수 있다. 그 제물을 바친 마법사는 흑마법을 접할 수 있는 거고.

세간에 알려져 있지 않은 정보이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그랬다.

‘그런데 이게 소설에 나온 설명이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떠오른 기억이었다.

아무래도 소설 속 엘렌시아의 기억이 희미할 정도로 조금 넘어온 것 같았다.

‘넘어올 거면 다 넘어오지.’

역시 여덟 살 이전의 엘렌시아가 가진 기억보다는 소설 속 엘렌시아의 기억이 탐났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후작가와 손을 잡았으니 후작가의 비리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을 테고.’

그러다 짧게 숨을 내쉬었다. 흑마법을 계속 떠올렸더니 자꾸 생각도 어두워지고 마음도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안 되겠다. 잠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야지.’

정신이 맑아지면 공부도 잘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

“레…… 에녹?”

자주 다니는 산책로에서 레이델을 마주치자, 반가운 마음에 무심코 레이델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를 뻔했다.

“아, 공녀님!”

나와 눈이 마주친 레이델이 눈가가 휘어지게 웃으면서 내 쪽으로 달려왔다.

레이델의 등 뒤로 꼬리가 보이는 것 같은데, 환상인가?

레이델의 모습은, 마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뛰어오는 개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꾸 웃음이 나와서, 나는 웃음을 꾹 삼킨 채 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다른 학생들과 대련을 했는데…… 몸을 식히려고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지 뭡니까. 그런데 우연히 공녀님을 만나니 기분이 좋습니다.”

참는다고 참았는데, 새어 나오는 웃음까지 막을 수는 없었나 보다.

입꼬리를 실룩거리는 내가 이상했는지 레이델이 물었다.

“그런데 왜 자꾸 웃으십니까?”

왜긴 왜야.

“네가 개 같아서.”

“예……?”

당황한 레이델을 본 내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왜 저러지?’

설마 지금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말한 건가……? 속으로 말한 게 아니라?

만약 그렇다면 큰일이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금 내가 한 말 들었어?”

“원하신다면 못 들은 척할 수 있습니다.”

들었구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갑작스러운 말실수에 레이델만큼이나 당황한 내가 분위기를 수습하려 애썼다.

“아니, 나는 나쁜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네가 내 쪽으로 뛰어오는 게 귀엽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기분 나빴으면 미안.”

그러자 레이델이 조금 전의 나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습니다. 하나도 기분 안 나빴습니다, 저는. 오히려 기분 좋았습니다.”

“왜 기분이 좋아……?”

면전에서 개 같다는 말을 들어 놓고 기분이 좋다니.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다.

왜 기분이 좋냐는 내 물음에 레이델이 어깨를 으쓱였다.

“공녀님이 웃으셨잖습니까. 게다가 귀엽다는 말도 들었고요. 공녀님께선 개를 좋아하시나요?”

“……응.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넓은 집에서 개 한 마리를 키우면서 사는 게 꿈이었지.”

“지금은 아니라니요?”

넓은 집은 있는데 개를 못 키웠다. 알레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땐 하루 종일 울었는데.’

슬픈 기억을 떠올린 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알레르기 때문에 못 키워.”

그러자 두 주먹을 불끈 쥔 레이델이 배에 힘을 주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그럼, 제가 공녀님의 개가 되겠습니다! 시키시는 건 다 해내는 아주 충직한 개가 될 겁니다!”

피, 필요 없는데요……. 나는 개에게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 그는 나와 달리 아주 충직한 사냥개를 떠올리고 있었다.

‘……시키는 걸 다 해내겠다고?’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 끌리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레이델을 내 개로 두면 레이몬드는 충격을 받아 기절하고 말 것이다.

“됐어. 뭘 그렇게까지.”

가녀린 레이몬드를 떠올린 내가 살짝 웃으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속을 감추지 못하고 대놓고 시무룩해하는 레이델의 모습에 나는 말을 돌렸다.

“아, 참. 오늘 칼바도스랑 도서관에서 공부하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그러자 레이델이 아쉬움을 덕지덕지 바른 얼굴로 말했다.

“……저는 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녁에 대련장을 빌려서 검술 시험 준비를 하기로 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필기시험만 있는 게 아니었지.”

‘나도 슬슬 실기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데…… 다음에 레이델한테 대련하자고 할까?’

하지만 요즘 레이델은 다른 학생들과 교류하느라 꽤나 바빠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던 때, 레이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녀님, 다음에 제 대련 상대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진짜? 나야 좋지. 마침 부탁하려던 참이었어.”

물어볼지 말지 고민했는데, 레이델이 먼저 말을 꺼내 주어서 부담이 줄었다.

“그럼 제가 대련장을 예약해 두겠습니다.”

“좋아. 다음에 같이 가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델이 기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주머니 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 들었다.

“이게 뭐야?”

“……축제 날 공녀님 생각이 나서 샀습니다.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지?

상자를 열어보니 작은 위시본 목걸이가 하나 들어 있었다.

목걸이는 정말 예뻤다. 매일 차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쓸데없이 예쁘네.’

어차피 차고 다닐 수도 없는데. 그냥 거절할까?

“……제 선물을 받아 주시는 겁니까?”

하지만 선물을 주는 쪽에서 이렇게 간절한 얼굴을 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하겠는가.

뇌물이면 거절하기 쉬운데. 레이델이 순수한 마음으로 건넨 선물은 참 거절하기 어려웠다.

나는 별수 없이 레이델의 손에 들린 상자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 그런데 축제 날 샀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까지 이걸 계속 가지고 다닌 거야?”

“언제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난 그냥 다짜고짜 아무 때나 던져 줘도 괜찮았는데.”

물론 진짜 던져 주면 화낼 거다.

“앞으로는 다짜고짜 아무 때나 드리겠습니다.”

장난스러운 내 말을 알아들은 그가 농담처럼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연습 시간이 다 되어서요.”

“그래. 선물 고마워. 연습 잘하고.”

“예.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먼저 고개 숙여 인사를 한 건 레이델 쪽이었지만, 먼저 몸을 돌린 건 내 쪽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선물 받은 목걸이를 기숙사 방 안 서랍에 넣어 두었다.

선물을 한 이에게는 미안하지만 한동안 꺼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공녀님, 이걸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공녀님, 선물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목걸이를 선물한 후, 레이델은 이틀 연속으로 내게 디저트를 선물했다.

‘앞으로는 다짜고짜 아무 때나 드리겠습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담이었나 보다.

레이델은 정말 다짜고짜 아무 때나 디저트를 선물하고 있었다.

어제는 내게 망고 푸딩과 롤케이크가 든 상자를 건네주더니, 오늘은 망고 타르트가 든 상자를 들려 주었다.

괴수를 잡은 공으로 황실에서 내린 상금을 망고 디저트를 사는 데 쏟아붓고 있었다.

함께 휴게실에 앉아 있던 칼바도스가 나 대신 타르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매운 음식을 먹을 때와 달리 우아한 모습이었다.

“혹시 내가 에녹한테 미움받을 짓이라도 했던가?”

“……그 녀석이 널 미워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주는 것도 재주였다.

하필 내가 과일 중 가장 싫어하는 게 망고였다.

“내일도 주진 않겠지?”

“줄 것 같은데.”

불편한 내 마음과 다르게 칼바도스는 태연하게 답했다.

싫다고 거절하는 게 맞았지만, 호의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녀석에게 싫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난데없는 망고 공세에 곤란함을 느낀 내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나는 싫어한다고 말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 줄 몰랐어.”

만약 레이델이 나에게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바로 선물을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레이델이 필요했고, 레이델은 내게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호의를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쓸모없는 호의였다.

“다음에는 솔직하게 말하고 거절해. 받는 사람이 불편하면 그게 무슨 선물이냐? 너를 불편하게 하는 선물은 그 녀석도 원하지 않을걸.”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라, 나는 머리를 박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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