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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42)화 (42/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42화

_칼바도스 외전

아버지께선 무슨 색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셨고, 어렸던 나는.

“파란색이 가장 좋아요!”

라고 답했다.

태양 때문에. 태양이 담긴 푸른 하늘이 좋아서. 그래서 파란색이 가장 좋다고, 그렇게 동요를 부르듯 답했다.

아버지께선 내가 자랑스럽다는 듯 웃었고,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그 순간 한 줌을 놓지 못해서, 의미 없는 물음에 의미 있는 답을 드리기 위해 애쓰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

무슨 꽃을 가장 좋아하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해바라기가 가장 좋다고 답했다.

태양을 사랑하여 태양을 닮고, 태양만을 쫓는 그 모습이 태양신을 섬기는 우리 제국과 어울리니까.

씨앗이 빽빽하게 박힌 것이 징그러워서 해바라기가 싫었지만, 나는 그렇게 답했다. 의미 있는 물음에 의미 있다 여긴 답을 드렸으나, 아버지는 만족하지 못하셨다.

그런데 나와 동갑인 너는, 제국민들이 겨울을 날 수 있게 돕는 목화가 좋다고, 그렇게 답했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말할걸. 왜 나는 그런 생각을 못 했지?’

그날 나는 꾸역꾸역 먹은 가지 요리를 전부 토해 내고 말았다.

스스로의 위치가 위태롭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복동생인 루카스를 사랑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관심이 사라지면, 내게 무엇이 남지?’

이복동생과의 황위 다툼에서 죽음을 맞이하겠지. 망상이라 치부하기엔,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었다.

아버지께선 너를 배동으로 들였다며 기뻐하셨다.

태연하게 너를 맞이하려고 했는데 막상 마주하면 황자답지 못하게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그런 나를 한심하다고 비웃을까 봐 나는 그것이 무서워 미로 정원에 꼭꼭 숨었다.

잠시 뒤, 나는 미로의 침입자를 지켜보았다.

길을 잃어 미로를 빠져나가지 못할까 봐 조약돌을 두고 오는 너의 모습에서, 나는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렸다. 동화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커다란 돌을 들고 나를 공격하려던 너는 사악한 악마 같았다.

나는 매일같이 너를 시험했다. 얼마나 똑똑한지 알고 싶었다. 매일 퀴즈를 냈고, 매일 졌다.

‘그래도 검 정도는 내가 이기지 않을까?’

그리고 졌다.

‘아버지께 이 이야기가 전해지겠지?’

앞서 달려가는 너와의 거리가 너무 차이 나서 역전하기는커녕, 따라붙지도 못하겠다. 그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너 혼자서 모든 걸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서툰 것이 있다면, 잘하는 사람을 찾아 온전한 네 사람으로 만들면 된다. 너는 그렇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그 말은 모순적이었다. 왜냐하면 나한테 너는 뭐든지 잘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너는 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 살지?

그런 내 질문에 너는,

“언젠가 황제가 될 너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라고 답했다.

놀랍게도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깨달은 것은, 너는 아버지의 말처럼 차분하고 온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너는 성격이 꽤 더러웠지만 다정했고, 남 놀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아는 너와, 내가 아는 너는 달랐다.

너와 함께한 시간은 소설에서 자세히 다뤄지지 않은 인물의 뒷이야기를 읽는 것 같았다.

너는 나에게 숨겨진 뒷이야기를 공개했고, 나는 그런 너의 곁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나 역시 황자답지 못한 치졸한 모습을 숨기지 않았고, 너는 나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치졸하게 굴었지.

그런 너의 곁은 참 아늑했다.

*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에녹이라는 이름의 영웅이 등장했을 때, 아버지께선 네가 레이델과 사랑에 빠질 것을 염려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상황을 걱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레이델 메릴이 멀리 도망칠 수 있게 도와줘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리베르트 공녀님이 황태자 전하를 두고 에녹 경과 바람을 피우셨대!”

아카데미에서 그 소문을 들었을 때, 기분이 조금 상했다. 너와 내가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보다 그 소문이 더 싫었다.

‘왜지? 내가 버림받는 역할이라 그런가?’

그래서, 기절한 시몬의 공주를 제외하고 너와 단둘이 의무실에 남았을 때 농담과 진심을 적당히 섞어 물었다.

“그냥 네가 황태자비 할래?”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까지 말이 안 되지는 않아 보였다.

정식적인 구혼은 아니었으나 나는 제안했고, 너는 거절했다.

“미친놈…… 너 제정신이야?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지, 어떻게 그런 말을……!”

라며, 내 건조한 청혼을 열렬하게 거부하는 너를 보니 속이 쓰렸다.

‘왜 속이 쓰리지?’

이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너에게 장미꽃을 받은 날, 쿵쾅거리는 심장은 무척이나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너와 연극을 본 후 그 혼란은 더욱 커졌다. 그 연극은 오랜 친구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설마 내가 너를 좋아하나?’

만약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어?”

여주인공이 나를 대신하여 물었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네가 스며들었어.”

남주인공이 나를 대신하여 답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내가 언제부터 너를 좋아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네가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을 부정하고 싶었고, 부정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나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내가 널 좋아할 일은 없어.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너를 내 등에 태우고 짐승처럼 네 발로 황궁을 기어 다닌다.”

라고 말했으니까.

‘……대체 왜 나는 그런 말을 한 거지?’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내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손바닥을 뒤집듯이 말을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너는 아주 안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우리 둘의 관계에서 아늑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내 욕심으로 이 관계가 깨지면, 너와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너를 잃은 나는 아주 많이 슬플 것이고, 나를 잃은 너 역시 조금은 슬퍼할 것이다.

하지만 너는 나보다 더 슬퍼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훨씬 크니까. 너는 이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나는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안 좋아해.’

연극의 이야기와 공연장의 분위기 때문에, 괜한 착각을 한 거지.

나는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왜 보라색을 좋아하냐고?’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엔 특별한 이유가 필요 없다던 네가, 이유를 물었다.

보라색.

권력을 상징하는 화려하고 고귀한 색. 하지만 나에겐, 가지와 나쁜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끔찍한 색.

분명 그렇게 끔찍했는데……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끔찍하던 보라색이 달가워지기 시작한 날이.

아버지께서 너에게 하사하신 보라색 원단을 보고, 너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보라색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그렇게 생각한 기억이 났다.

그 기억을 시작으로, 보라색을 좋아하게 된 다른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네 손에 들린 히아신스 꽃다발은 유독 아름다워 보인 날이 있었다. 그리고 너와 함께 바라본 그 보랏빛 하늘이 너무 찬란해서…… 숨이 막힐 것 같다고 생각한 날도 있었다.

내가 왜 보라색을 좋아하느냐면, 너와 함께 한 그 순간들이 너무도 행복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네가 옆에 없다는 상상을 하는 게 끔찍할 정도로.

너와의 시간이 나를 바꾸었다.

나의 가랑비는 아름다운 보랏빛 줄기를 자랑한다. 그 증거로 나는 보라색에 스며들어 온몸이 푹 젖어 버렸고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가 되었다.

어린 날의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하던 그 보라색이, 이제는 너와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색이 되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에 특별한 이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너였다.

“어때. 네가 생각한 만큼 특별한 이유는 아니지?”

나에겐 네가 특별한데 나 혼자만 너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게 두려워서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너는,

“……아니. 엄청 특별한데.”

라고 답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네가 특별하게 여겼다는 것이 기뻤다.

그래서 나는 괜히 분위기 탓을 하면서, 너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너는 나에게 정말 특별한 사람이고,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축복이라고.

‘부디 너에게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라면서.

그 말을 들은 너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의 그 얄미운 표정으로 돌아온 네가 나를 놀리듯 물었다.

“이야…… 칼바도스, 너 나 사랑하는구나?”

사랑한다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좋아한다는 말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 좋아한다는 감정이 발전해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되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런 의미였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고 말할 수도 없다.

‘내가 너를 사랑하냐니.’

……글쎄.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맞는 것 같은데.

하지만 단순히 좋아한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너를 향한 감정이 크고, 너를 사랑한다고 하기엔 두려운 단계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 부끄럽지만 내가 겁이 많은 사람이거든.

수천 명의 제국인 앞에서 연설하는 것보다, 네 앞에서 보라색이 좋은 이유를 설명하는 게 더 떨렸어.

이제 보니 나는 너와의 관계에서만 이렇게 겁쟁이가 되나 봐.

그래서 겁이 많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을 찾았지.

나는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을 사랑해.

그래서 네가 계속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언젠가, 퍼즐 조각처럼 너와 함께한 순간들이 모여서 내 평생을 완성했으면 좋겠어.

너에게 이 말을 전할 날이 오긴 올까.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데…… 쓰디쓴 약도 뱉지 않고 잘 삼켰으니, 하고 싶은 말도 잘 삼킬 수 있겠지.

나는 오늘부터 이 말들을 꾹꾹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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