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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41)화 (41/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41화

눈 밑에 작은 꽃 여러 개를 그려 넣은 칼바도스와, 뺨에 푸른 나비를 그려 넣은 나는 시끌벅적한 거리를 걸었다. 처음엔 칼바도스에게 끌려다니다시피 하던 나는, 어느새 그와 나란히 걸으며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같은 강의를 수강하는 아카데미 학생을 거리에서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데이트 과제가 떠올랐다.

“오늘이 세 번째 데이트니까, 이제 보고서 작성할 일만 남았네.”

내 말에 칼바도스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벌써?”

“응. 시간이 제법 빨라.”

과제 제출 기간뿐만 아니라, 시험 기간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내 절규를 뚫고, 어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 팔찌 팔아요! 시 팔찌 구경하러 오세요!”

부스 앞에 선 한 남자의 외침에, 나와 칼바도스가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내 쪽이었다.

“……방금 들었어? 난 저 사람이 욕하는 줄 알았어.”

“시 팔찌 구경 오세요!”

“하.”

이어진 남자의 외침에 칼바도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고 남자가 서 있는 부스를 가리켰다.

“큼, 저기 가 볼래?”

“어.”

빨리 가자는 듯 내가 칼바도스의 등을 밀었고 칼바도스는 순순히 밀렸다. 만약 이런 식으로 손님의 관심을 끄는 것이 주인의 작전이었다면, 그 작전은 성공이었다.

부스를 홍보하던 남자가 우리를 안쪽으로 안내했고, 남자의 누나로 보이는 여자가 나와 칼바도스를 반겼다.

“원하는 색의 띠를 잡고 뽑으시면 돼요. 문구는 랜덤이고요.”

형형색색의 띠들이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띠의 끝부분만이 보였고, 띠에 새겨진 문구는 알 수 없었다. 원하는 색상의 띠를 당겨 뽑으면 띠에 새겨진 시의 구절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가장 무난한 검은색 띠를 뽑았고, 칼바도스는 화려한 붉은 띠를 뽑았다. 그리고, 검은 띠에 새겨진 시의 구절을 본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뭐야. 왜 하필 이거야?’

나는 새카만 천 위에 수 놓인 하얀 글씨를 소리 없이 읊었다.

[그대의 눈에는 죽어 가는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가! -일리로멘, 영웅의 회답을 기다리며.]

얼마 전 문학 교양 수업에서 배운 시였다. 신의 자녀를 협박하며 희생을 강요하는 기분 나쁜 시라고 생각했는데, 하필 이 시의 이 구절이 나오다니.

싫어하는 시의, 싫어하는 구절이 새겨진 검은 띠는 나를 놀리듯 밤바람에 몸을 흔들었다.

‘칼바도스는 어떤 시가 나왔지?’

부스를 걸어 나오며 나는 칼바도스의 손에 들린 붉은 띠를 흘끗 보았다.

[어둠을 두려워 말라. 머지 않은 곳에서 태양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호멜, 믿음.]

고난과 시련이 있을지언정, 그 뒤에는 반드시 희망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긍정적인 문구였다.

‘……주인공 버프인가?’

같은 돈을 주고 같은 확률의 뽑기를 했는데,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배알이 꼴리니 주인공 버프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았다.

한 손으로 매듭을 짓는 것이 어려웠기에 부스를 나온 나와 칼바도스는 서로의 팔에 매듭을 지어 팔찌를 완성했다.

불꽃놀이가 시작되기 전, 칼바도스와 나의 발을 붙잡은 것은 한 노점이었다. 진열된 물건을 구경하던 중, 나는 연한 회색빛 원석이 박힌 작은 피어싱을 집어 들었다.

“그거 사려고?”

“응. 이게 끌리네.”

다른 물건을 구경하던 칼바도스의 눈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긴 은색 막대와 연결된 체인에 보라색 보석이 박혀 있는 책갈피였다.

“난 이거 사야겠다. 마침 책갈피가 필요했는데.”

“예쁘네. 그런데 너 보라색 싫어하지 않았어?”

싫어하는 가지 요리를 꾸역꾸역 먹고 토를 한 기억이 깊게 박혀 있어, 보라색까지 싫어하던 칼바도스였다. 수많은 색깔의 보석이 있는데, 굳이 보라색 책갈피를 집은 이유를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무언가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듯이 책갈피를 손에 쥔 칼바도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좋아하게 될 수도 있지.”

“갑자기 왜?”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엔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나한테 그렇게 말해 준 사람은 너야.”

“그랬었지.”

“그런데 뭘 물어.”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엔 이유가 없다고 말했으면서 왜 이유를 묻냐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어릴 적 내뱉은 말에 새로운 말을 덧붙였다.

“처음부터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엔 특별한 이유가 없지만,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 데에는 조금이라도 특별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

말 바꾸는 것도 손바닥 뒤집듯이 쉬운데, 한 문장 추가하는 건 그보다 더 쉬웠다.

네가 처음부터 보라색을 좋아했다면 이유를 묻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보라색을 싫어해서 제비꽃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던 네가, 보라색을 좋아하게 되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가.”

내 말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칼바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복잡한데, 생각이 정리되면 말해 줄게.”

“그래. 기다릴게.”

대체 그 어떤 것이 보라색을 끔찍하게 싫어하던 너를 바꾸었는지 알고 싶었다.

*

그렇게 노점에서 피어싱과 책갈피를 건진 나와 칼바도스는 돗자리와 포도주를 한 병씩 들고 걸었다.

갈림길이 나왔고, 우리는 동전을 던져 길을 정하기로 했다. 앞면은 왼쪽 길, 뒷면은 오른쪽 길. 앞면이 나왔고, 그와 나는 왼쪽 길을 걸었다.

언제나 그래 왔듯 헛소리를 주고받던 우리를 반긴 것은 고요한 공터였다.

공터를 본 칼바도스는 명당을 찾았다며 좋다고 키득거렸다.

썩 질이 좋지 않은 돗자리 위에 사이좋게 앉은 우리는 병을 맞부딪히고 포도주를 넘겼다.

잠시 뒤 펑―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찬란한 불꽃이 밤하늘을 검은 천 삼아 수를 놓기 시작했다.

가장 아름답지만 그만큼 빨리 지는 꽃이 있다면, 그 꽃의 이름은 아마 불꽃일 것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하늘에 솟아오른 그 꽃을 감상했다. 하늘밖에 볼 줄 모르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둘은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였다.

온화한 침묵을 신경 쓰지 않고 불꽃을 즐기던 중, 칼바도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을 정리해 봤어. 내가 왜 보라색을 좋아하게 됐는지.”

“벌써?”

생각보다 정리가 빨랐다.

물론 나는 이유가 궁금한 쪽이었으니 그의 생각 정리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내가 왜 보라색을 좋아하게 되었냐면,”

나는 얘기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칼바도스는 한 편의 시를 읊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보라색이 싫다고 투덜거린 날, 제비꽃이 피어 있던 자리에서 네가 해 준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서.”

“뭐?”

“예전에, 네 귓불에 매달려 있던 자수정 귀걸이가 예뻐 보여서. 얼마 전에 네가 들고 있던 히아신스 꽃다발이 아름다워서.”

“…….”

“연회 날 네가 입은 보라색 재킷이 고고하고 기품 있어 보여서. 너의 크라바트를 장식한 보랏빛 브로치가 신비로워서.”

레이델이 수도에 온 날, 보라색 보석이 박힌 브로치를 선물하기 잘했다며 칼바도스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너와 함께 바라본 그 보랏빛 하늘이 너무도 황홀해서. 그리고 바로 지금. 너랑 마신 포도주 맛이 꽤 좋아서.”

칼바도스가 보란 듯이 병을 흔들며 웃었다. 티 없이 맑고 순수한 미소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불꽃이 반짝였다.

어느 명화를 감상하듯 하늘을 찬찬히 바라보던 칼바도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나 더. 방금 반짝인 보랏빛 불꽃을 너와 함께 보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워서.”

그는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칼바도스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막상 눈이 마주치자 머쓱했는지 칼바도스가 고개를 돌려 눈을 피한 채 물었다.

“어때. 네가 생각한 만큼 특별한 이유는 아니지?”

“……아니. 엄청 특별한데.”

단순히 보라색을 자주 접해서 거부감이 없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와 함께한 시간이 그에게서 사소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꽤 기뻤다.

“칼바도스 너한테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한테는 특별한 이유가 돼.”

이게 특별하지 않다면, 대체 뭐가 특별하겠어.

그러자 칼바도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틀려.”

“뭐가?”

“……나한테도 특별하다고.”

목을 축이듯 포도주를 넘긴 그가 조금 정신없이 말했다.

“남 탓은 좋은 게 아니지만…… 지금부터 나는 분위기 탓을 할 거야. 그 탓을 하지 않으면 평생 너한테 이 말을 할 수 없을 테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무게를 잡지.’

설마…… 저번에 횡령한 거 들켰나? 아니면 비밀 금고에 대한 정보가 샌 건가? 그 밖에도 비밀리에 국적을 취득한 바가 있었다.

칼바도스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양심이 찔리기 시작했다.

역시,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들킬 확률이 전혀 없었는데도 찔렸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거라면 굳이 분위기 탓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긴장을 풀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분위기 역시 아니었고.

“마침 여긴 사람도 없고 조용하지. 불꽃은 보기 좋게 팡팡 터지고 있고. 내 손에는 다음 날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내 부끄러움을 상쇄시켜 줄 포도주도 있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말은 다 분위기 때문이야. 쪽팔려서 두 번은 말 못 해.”

“알았어. 한 번에 잘 알아들을 테니까 말해 봐.”

켕기는 게 많은 나는 태연하게 굴었고, 칼바도스는 나를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너는, 나한테 정말 특별한 사람이고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축복이라고. 이 말을 언젠가 한 번쯤은 해 주고 싶었어. 그게 오늘이 될 줄은 몰랐지만…….”

제법 분위기 있는 칼바도스의 말이 끝난 뒤, 나는 아주 짧은 소감을 내뱉었다.

“이야…… 칼바도스, 너 나 사랑하는구나?”

편지도 아니고, 이런 말을 바로 앞에서 듣는 것이 조금 민망했다. 그래서일까, 짓궂은 반응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내 말에 정색한 칼바도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미쳤어?”

칼바도스는 참 놀려 먹기 좋은 친구였기에 나는 1절에서 관두지 않고 2절을 시작했다.

“맞네. 딱 들켰지? 넌 이제 날 등에 태우고, 네 발로 황궁을 기어 다닐 일만 남은 거야!”

“그런 거 아니라고! 제정신이야?”

성질이 난 것인지 갑자기 칼바도스의 얼굴이 잔뜩 빨개져 있었다. 칼바도스가 날뛰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칼바도스를 보며 깔깔거렸다.

유치하게 놀 수 있는 칼바도스와의 시간이 즐거웠다. 무엇보다도, 보라색을 싫어하던 그가 나와 함께한 시간을 통해 보라색을 좋아하게 됐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닌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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