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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40)화 (40/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40화

셀레네와 칼바도스는 혼란스러웠다. 셀레네가 붉어진 제 이마를 가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역시 리베르트 공녀를 좋아하시는 거죠?”

얼마 전, 본의 아니게 의무실에서 칼바도스의 청혼을 엿들은 셀레네는 확신했다. 황태자는 공녀를 좋아하는 것이 맞다고.

“나는 그냥, 연극 내용이랑 내 상황이 조금 비슷해서 혼란스러운 것뿐입니다. 금방 괜찮아져요.”

엘렌시아에게 꽃다발을 받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5분 정도만 지나면 이 울렁거림과 삐걱거리는 소리도 가라앉겠지.’

곧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숨을 내쉬던 칼바도스가 셀레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는 공주야말로 트로이센 공자를-”

“마찬가지예요! 저도 아직 혼란스러워서, 제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고요.”

남의 입을 통해 감정을 정의당하는 것이 두려워 셀레네는 급히 칼바도스의 말을 끊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라곤 유리 하나뿐인데. 당분간 피해 다녀야겠어요.”

셀레네는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니, 애초에 이 황태자가 연극 티켓을 건네는 호의를 베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혼란스러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황태자를 향한 원망으로 이어지려 할 때, 황태자가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분위기.”

“네?”

“지금 우리가 혼란스러운 건, 공연장의 분위기와 연극 내용 때문입니다. 괜히 그 분위기에 붕 떠서 엉뚱한 착각을 한 걸지도 몰라요.”

“그래서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의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황태자의 말은 아주 그럴듯했다.

공연장의 분위기와 연극 내용 때문에 괜한 착각을 한 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타국이고, 그녀가 의지할 사람은 율리안 트로이센뿐이었다. 그 모든 요소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만들어진 엉뚱한 착각일 것이다.

‘그래.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다시 평소처럼 돌아올 거야.’

마음을 가다듬은 셀레네가 맑게 웃었다.

“조언 감사해요, 전하.”

여주인공에게 서브남주와 함께 관람할 연극 티켓을 주고, 이제는 여주인공에게 서브남주와 함께 시간을 보내라고 조언하는 남주인공의 행보가 이어졌다. 엘렌시아가 알면 미쳤냐고 달려들 일이었지만, 칼바도스가 이를 알 리 없었다.

*

“에녹 경! 함께 축제에 가시지 않을래요?”

“저희랑도 함께 가시죠!”

“다 같이 가면 틀림없이 재미있을 겁니다!”

내가 실외 대련 중 그늘진 풀밭에 주저앉아 땀을 식히고 있을 때, 검술학부 학생 무리가 레이델을 에워쌌다.

나는 꼼꼼하게 레이델에게 축제 구경을 제안한 이들의 얼굴을 살폈다. 모두 평민이었다.

그들은, 웰링턴을 수호자 에녹 헤르트를 사랑한다. 평민들이 레이델을 동경하는 이유는, 평민이었던 ‘에녹’이 ‘신분 상승’을 했기 때문이다.

‘레이델이 사람들과 잘 어울려서 좋은 평을 받을수록 이쪽엔 이득이지.’

레이델은 부패한 메릴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좋은 도구니까.

“아, 저는-”

레이델이 머뭇거리며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나를 신경 쓰는 건가?’

나는 레이델의 주인이 아니니, 그가 내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으며, 일일이 허락을 구할 이유도 없었다. ‘가도 될까요?’가 아니라, ‘갈 겁니다.’라는 통보. 딱 그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았다.

나는 신경 쓸 필요 없으니 다녀오라는 의미를 담아 손을 휘저었고, 레이델은 학생들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습니다. 함께 가지요.”

“와, 정말요? 그럼 어느 부스에 갈지 같이 정해 봐요!”

“저쪽에 게시판이 있습니다!”

그렇게 레이델은 학생들에게 둘러싸인 채 게시판이 있는 곳으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도 계속 나를 힐끔거렸다.

“축제라…….”

소설의 내용에 따르면, 축제는 칼바도스와 셀레네의 첫 데이트가 있는 날이다.

‘두 사람이 언덕 위에서 불꽃놀이를 봤지.’

삽화를 떠올리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율리안이 물었다.

“농땡이 피웁니까?”

“그런 건 안 피우고, 요령은 조금 피웁니다.”

내가 바닥을 툭툭 치자, 율리안이 익숙하게 내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리 트로이센 공자는 축제 때 뭐 합니까?”

“공주님과 축제 구경을 하기로 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태연하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율리안의 답을 듣는 순간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셀레네랑 축제에 간다고?

‘당신 혼자만의 희망 사항 아니고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인간관계를 위해 꾹 참았다.

칼바도스 이 자식, 셀레네랑 잘되고 있는 게 아니었나? 왜 셀레네는 칼바도스가 아니라 율리안과 축제 구경을 가는 거지?

의문도 잠시, 수업이 끝나고 나를 찾아온 칼바도스가 태연하게 물었다.

“우리 축제 때 어디 갈래?”

아주 당연하게, 처음부터 나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다는 투였다.

그런 칼바도스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체 이놈은 셀레네랑 여태 뭘 한 거지?

*

대망의 축제 날, 나는 아주 찝찝한 마음으로 칼바도스를 따라나섰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내 소맷자락을 잡은 채 나를 끌고 가는 칼바도스의 발걸음도 가벼웠다.

지금 이 거리에서 가장 무거운 것 두 가지가 있다면, 아마 내 발걸음과 내 마음일 것이다.

나를 질질 끌고 가던 칼바도스가 걸음을 멈췄다.

“넌 축젠데 얼굴이 왜 그래?”

“내 얼굴이 왜. 예쁘기만 한데.”

“도살장 끌려온 소 같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나랑 축제 온 게 싫어?”

칼바도스가 정말 안 어울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칼바도스의 표정이 어색해서,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었다.

“너랑 온 게 싫은 건 아니야. 그냥 좀…… 복잡해.”

여주인공은 소설에 없던 서브남주와의 에피소드를 추가하고 있고, 남주인공은 서브남주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칼바도스는 이유도 모른 채 내 신경질을 받아 주고 있었고, 나는 이유도 모르고 축제에 끌려왔다.

“하나 묻자. 왜 나랑 축제에 왔어?”

내 질문이 황당했는지, 칼바도스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나야말로 물어보자. 내가 너 아니면 누구랑 와? 난 친구 너밖에 없는데.”

하긴. 칼바도스가 이렇게 유치한 본모습을 보이는 또래 귀족은 나 하나뿐이었다.

다른 귀족들 앞에선 자애로운 황태자인 척 가식을 떨어 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칼바도스가 나의 친구라는 사실보다,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우위에 두고 있었다.

칼바도스를 남자주인공이 아니라 친구라고 생각했다면, 분명 즐겁게 축제를 즐겼으리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달의 미로』라는 소설을 읽지 않고 이곳에 왔다면 어땠을까.’

소설의 전개에 목매지 않고 너와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칼바도스 성격이 지랄 맞아서 절교했을 수도 있겠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인데, 나는 그 한 치 앞을 알고 있다고 좋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처음으로 그 소설을 읽은 것을 후회했다. 자꾸만 내가 관계 하나하나를 계산하는 내가 싫어졌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보다 못한 칼바도스가 입을 열었다.

“네가 뭐 때문에 그렇게 복잡한지는 모르겠고. 일단,”

“일단?”

“일단 먹어. 너는 매운 걸 먹으면 기분이 나아지잖아.”

어느 틈에 산 것인지 칼바도스의 손에는 닭꼬치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나는 칼바도스가 손에 쥐여 준 꼬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매운맛이라더니…….’

생각보다 맵지 않았다. 제대로 사 온 것이 맞냐고 물어보려던 때, 나는 서서히 붉어지는 칼바도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꼬치가 바뀌었나 본데.”

“……넌 대체 왜 이런 독한 음식을 돈 주고 사 먹는 거야.”

칼바도스는 눈물 고인 눈으로 잠시 쿨럭거렸고, 우리는 한 입씩 베어 먹은 꼬치를 바꿨다.

계속해서 쿨럭거리던 칼바도스는 다 먹은 닭꼬치 막대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와중에도 내 표정을 살폈다.

“기분은 좀 나아졌냐?”

우습게도 매운 게 속에 들어가자마자 찝찝한 기분이 사라졌다.

하지만 칼바도스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이렇게 굽신거리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음…… 네가 저걸 하면 기분이 더 나아질지도 모르지.”

내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본 칼바도스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그림을 그리라고?”

“응.”

내가 가리킨 것은 페이스페인팅 부스였다. 푸른 천막 너머로, 부스에서 일하는 학생 한 명이 보였다.

“네가 종종 잊고 사는 모양인데 나 황태자야. 이제 여덟 살도 아니고. 그런데 내가 저런 걸 하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체통이…… 알았어, 알았다고. 하면 되잖아!”

페이스페인팅 부스로 성큼 걸어가던 칼바도스가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뒤따르던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신 엘, 너도 같이 하는 거다.”

“당연하지.”

부스 앞에 사이좋게 줄을 선 나와 칼바도스는 도안을 고르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도안이 그려진 책을 뒤적거렸고, 마땅한 도안을 찾은 내가 칼바도스에게 물었다.

“고양이 수염은 어때?”

“그럼 나는 오늘 불꽃놀이를 못 보겠네. 땅만 보고 걸어야 할 테니까.”

그렇게 답한 칼바도스가 냉정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나는 오른쪽 하단에 그려진 작은 꽃들을 가리켰다. 붓으로 콕콕 찍어서 그린 것 같았다.

“이건 어때? 튀지도 않고 예쁘다.”

“……그럴까. 그럼 너는 이거 어때.”

칼바도스가 나에게 추천한 것은 바로 옆 페이지에 그려진 화려한 나비였다.

“너는 꽃이고, 나는 나비야?”

“어.”

“왜?”

“나비는 꽃을 찾아오잖아. 너는 어렸을 적부터 나를 찾아왔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나비고 나는 꽃이지.”

그렇게 말한 칼바도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의미 없이 책장 넘기기만을 반복했다.

‘나비라…….’

나비가 꽃을 왜 찾아가겠는가. 꽃의 꿀을 빨기 위해 가는 것이다.

나 역시 칼바도스의 곁에서 꿀을 빨고, 단물만 쏙 빼먹으려고 찾아간 것이니, 나와 나비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비로 해야겠다.”

나비 그림을 보던 칼바도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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