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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39)화 (39/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39화

친애하는 슈바의 연극이 있는 어느 저녁, 나는 칼바도스를 끌고 연극이 있는 거리로 향했다.

아카데미 학생들만을 위한 공연이 아니었기에, 인근에 거주하는 시민들과 연극 관계자들 역시 자리를 잡았다. 앞줄에 앉아 뒤를 돌아본 내가 칼바도스의 팔을 두드렸다.

“보여? 저 두 사람도 우리랑 같은 과제하러 왔나 봐.”

“저기 여섯 번째 줄에 앉은 사람들도.”

다들 데이트 코스 중 하나로 연극을 떠올린 건지, 나와 칼바도스처럼 데이트 과제를 하러 온 학생들이 꽤 많았다. 몇 쌍의 가상 커플이 있는지 보기 위해 관객들을 훑어보던 때, 대각선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공주님이랑…… 트로이센 공자도 있네?”

“……어. 그러네?”

칼바도스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응시했다.

‘셀레네가 율리안이랑 연극을 보는 장면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칼바도스를 빤히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 네가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닌데.”

조만간 셀레네의 오랜 친구인 율리안을 질투하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초조해할 때가 올 예정이건만.

“무슨 뜻이야?”

정말 모르겠다는 눈으로 칼바도스가 물었지만 나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래, 뭐. 나중에 네가 구르는 것도 재밌겠다.”

“?”

칼바도스의 푸른 눈동자에 혼란이 더해졌고, 나는 칼바도스가 데굴데굴 구를 미래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도스야, 여태 사는 게 쉬웠지?

원래 이야기와 달리 빽 있는 이복동생이 황위 계승을 포기하면서 순탄하게 황태자위에 오르고, 거기에 가문빨 쩔어 주는 친구까지 있으니 그동안 두 발 뻗고 속 편하게 잤겠지.

이제 사랑 때문에 속 끓이면서 고생 좀 해 봐라.

이 콧대 높은 놈이 셀레네의 발닦개 노릇을 하는 꼴이 참 재밌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셀레네 쪽이 훨씬 아까우니, 셀레네가 되도록 늦게 칼바도스의 마음을 받아 줬으면 좋겠다.

옆에 있는 칼바도스가 나를 미친 사람 보듯 바라봤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연극은 소꿉친구인 다이애나와 말렉이 ‘왜 우리는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없을까’라는 주제로 술집에서 한탄하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결혼을 통해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는 친구들과 달리, 다이애나와 말렉은 그대로였다.

시간이 흘러 나쁜 소문이 퍼지자(특히나 말렉은 아랫도리가 제 구실을 못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를 걱정한 다이애나와 말렉의 부모는 두 사람을 약혼시키기로 약속한다.

이에 격노한 두 사람은 약혼식 전까지 새로운 애인을 만들어서, 약혼을 없었던 일로 만들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던 다이애나와 말렉은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훌륭한 선택지라는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달빛 아래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달빛 아래 빛나는 다이애나의 모습을 본 말렉은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했다.

“다이애나, 너를 사랑해.”

“말렉?”

“태양이 뜨고 지듯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듯이. 네가 늘 내 곁에 있는 걸 당연하게 여겨서 네 소중함을 몰랐어.”

말렉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태양과 산소가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듯이, 나는 네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 너는 내 태양이고, 산소 같은 사람이야. 다이애나.”

놀란 얼굴로 말렉을 내려다보던 다이애나가 물었다.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어?”

말렉이 모르겠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네가 스며들었어.”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말렉과 다이애나가 약혼이 아닌 결혼을 하며 극이 끝났다.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무대에서 손을 흔들 때, 나는 칼바도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어때. 우리 슈바 멋있지.”

말렉 역할을 맡은 슈바의 연기가 일품이었다. 아랫도리가 제 구실을 못 한다는 소문을 듣고 억울해하는 모습이 진짜 같아서, 진단서를 떼 줄 의사를 추천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달빛 아래에서 다이애나에게 마음을 고백할 때, 슈바는 정말 사랑에 빠진 남자 같았다.

하지만 칼바도스의 입에서 나온 답은 긍정의 표현도, 부정의 표현도 아니었다.

“……말도 안 돼.”

“엉?”

칼바도스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막을 내린 무대 정면을 응시하다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혼란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쓸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먼저 간다.”

“어? 야! 잠깐만!”

붙잡을 틈도 없이 칼바도스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라지고 말았다.

‘왜 저래? 어디 아픈가?’

칼바도스를 따라나서려 했지만, 슈바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자리에 남기로 했다.

*

칼바도스의 입에서 연극에 대한 긍정의 표현도 부정의 표현도 아닌, ‘말도 안 돼’라는 답이 나왔을 때,

“말도 안 돼…….”

같은 반응을 보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왜 그래, 셀레네? 머리 아파?”

율리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셀레네의 안색을 살폈다. 그 시선 탓에 귀가 붉어진 셀레네가 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 나 속이 안 좋아서 먼저 가 볼게!”

“괜찮아? 같이 가자.”

셀레네는 따라나서려는 율리안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대신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내저었다.

“아냐! 따라오지 마! 유리 너는, 아, 그래, 사인 좀 받아 줘! 남자 주인공이 너무 멋있더라!!!”

“뭐?”

“그럼 나 먼저 갈게! 꼭 사인 받아 줘야 해!”

그렇게 말한 뒤 셀레네는 사슴처럼 뛰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뛰다 도착한 곳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수풀이었다. 셀레네는 커다란 나무에 자신의 머리를 쿵쿵 박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셀레네는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율리안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유리가…….’

혼란스러워진 셀레네가 다시 한번 나무에 머리를 박았다.

하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와 또 다른 쿵 소리에 셀레네는 동작을 멈췄다.

“정신 차려. 걔는 네 친구야.”

다른 누군가도 나무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것 같았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가 보니 페르데니아의 황태자가 있었다. 황태자의 붉어진 이마를 본 셀레네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설마…… 전하도?”

황태자 역시 셀레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설마…… 공주도?”

“이건 정말…… 말도 안 돼요…….”

셀레네가 혼란스럽고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리베르트 공녀?”

홀로 슈바에게 향하던 내 걸음을 붙잡은 것은 율리안의 목소리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 셀레네와 함께 있는 것을 봤는데…… 지금의 율리안은 나처럼 혼자였다.

“아, 여기서 뵙는군요. 혼자 오셨나요?”

“공주님과 함께 왔는데 몸이 안 좋으셔서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칼바도스는 나를 두고 갔고, 셀레네는 율리안을 두고 갔다.

‘둘이 같이 있겠구나.’

손가락을 튕기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칼바도스가 셀레네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조금 걱정했는데. 칼바도스 이 녀석, 뒤에서 할 건 다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칼바도스는 자기 밥그릇은 알아서 챙기는 기특한 녀석이었다.

‘나를 버리고 간 건 괘씸하지만, 셀레네를 만나러 간 거라면 뭐!’

친구의 연애 사업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아픈 공주님과 함께 돌아가시지 않고요?”

“그러려 했는데. 남자 주인공의 사인을 받아와 달라던데요.”

‘제법 치밀한데?’

칼바도스를 만나러 가는데 율리안이 따라오면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여주인공 셀레네는, 서브남주를 따돌리고 남자 주인공을 만나러 간 것이다.

‘율리안은 내가 맡을 테니까, 둘 다 오붓한 시간 보내길.’

나는 내 친구의 평온한 시간을 위해, 율리안 트로이센을 내 옆에 붙잡아 두기로 했다.

“사인이요? 남자 주인공을 맡은 배우와 아는 사이라 인사를 하러 가던 참인데, 함께 가시겠어요?”

“그래 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나는 율리안과 걸으며 칼바도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칼바도스가 셀레네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만약 두 사람이 소설 속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아니었다면, 나는 셀레네를 뜯어말렸을 것이다.

‘솔직히, 칼바도스를 만나기엔 셀레네가 너무 아깝지.’

지금의 칼바도스는 소설 속 이미지와 다르게 꽤…… 지랄 맞았으니까. 남자 주인공의 멋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나는 말없이 신사의 정석 같은 율리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당신이 셀레네를 감시하고, 리오스 왕자에게 보고하지만 않았다면…….’

이번 생에서 나는, 칼바도스가 아닌 당신을 남자 주인공으로 밀었을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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