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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38)화 (38/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38화

다음 날, 나는 아카데미 연극 동아리의 부실로 향했다. 만날 사람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누구세요?’라는 말 대신,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 단번에 문을 열어 주는 이가 있었다.

“슈바!”

“공녀님!”

무대 의상을 입은 슈바가 나를 반겨 주었다. 늘 공작저에서만 보던 슈바를 아카데미에서 만나니 제법 신선했다.

동아리 부실이 신기하여 부실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때, 어느 낯선 목소리가 낯선 호칭으로 나를 불러 세웠다.

“카인의 손톱을 먹은 쥐!”

카인의 이름이 들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파란 머리 남자가 구석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검을 닦고 있었다. 입학식 날 만난 카인의 친구였다.

‘로미오 디아스구나.’

사실, 로미오는 나를 ‘카인의 손톱을 먹은 쥐’라 부를 자격이 없었다. 디아스 형제야말로, 형과 동생의 얼굴을 구분하기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동생인 로미오를 알아볼 수 있었던 건 그의 손에 들린 검 때문이었다.

‘로미오 디아스는 검술학부 2학년 수석이랬어. 마법학부인 레반이 검을 들고 다닐 리 없지.’

“로미오 선배죠? 여기서 또 뵙네요.”

단번에 로미오를 알아보자 기분이 좋았나 보다. 그가 픽 웃으며 의자를 빼 주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로미오의 옆자리에 앉았다.

“선배도 연극부예요?”

“응.”

“그런데 왜 명단에 선배 이름은 없어요? 오면서 포스터를 봤는데 선배 이름은 못 봤거든요.”

무대에 오르지 않아도 포스터에는 이름이 실린다.

하지만 슈바가 주인공인 이번 연극의 포스터에 로미오의 이름은 없었다. 그러자 로미오가 담담하게 말했다.

“유령 회원이야. 부모님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연극은 절대 안 된다고 하셨거든.”

연극, 진짜 하고 싶었는데.

로미오가 짤막하게 덧붙였다.

부모님이 연극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선대 디아스 공작의 정부가 연극배우였지. 세브리만 백작의 정부도 가수였던가.’

이곳에서 배우는 귀족의 정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디아스 가문은 로미오가 그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로미오는 검술학부 수석이니까 연기를 하게 내버려 둘 리가 없지.’

밝은 분위기로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분위기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내가 살짝 로미오의 눈치를 보자, 로미오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홀가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부모님 돌아가시면 할 거야. 언제쯤 돌아가시려나.”

갑작스러운 패륜아 멘트에 할 말을 잃을 뻔한 것도 잠시, 나는 곧 괜찮은 답을 꺼낼 수 있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도 할 수 있기를 바랄게요.”

“카인이랑 똑같이 생긴 얼굴로 다른 말을 하네.”

내 답을 듣고 카인을 떠올린 것인지, 로미오가 나를 보며 웃었다.

“오빠가 뭐라고 했는데요?”

“부모님 눈에 흙 뿌리라고. 혼자 못하겠으면 같이 해 주겠대.”

“오빠는 참 다정한 사람이네요.”

다정하다.

소설에서 엘렌시아를 제외하고는 냉혈하기 짝이 없던 그가, 친구의 꿈을 위해 부모님 눈에 흙을 뿌려 주겠다는데. 이게 다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렇지? 카인은 참 다정해.”

로미오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두 분 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가까이 다가온 슈바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와 로미오를 번갈아 보았다.

“오빠 칭찬. 그런데 그거 나 주려고?”

슈바는 티켓이 들어 있는 얇은 보라색 봉투 하나를 건넸다.

“네. 제가 공녀님 티켓은 따로 빼 놨습니다. 두 장이니까 친구분과 함께 보러 와 주세요. 열심히 준비한 거라 꼭 보여 드리고 싶어요.”

“티켓 고마워. 기대할게.”

나는 슈바의 어깨를 격려 차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봉투가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자, 옆에 있던 로미오가 물었다.

“누구랑 보려고?”

“오빠한테 시간 괜찮은지 물어보려고요.”

슈바는 공작가의 후원을 받으니 카인과 함께 연극을 보러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카인은 이미 한 장 받았어. 내가 레반이랑 카인한테 줬거든. 네 친구랑 봐.”

“그래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아, 선배.”

“응?”

“괜찮으면 다음에 제 극단에 한번 놀러 오시겠어요? 불편하면 거절하셔도 돼요.”

충동적인 제안이었다.

처음엔 그냥 무시할 생각이었는데, 부모님의 눈에 흙을 뿌려서라도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로미오가 신경 쓰였다.

“……카인이 동생을 참 잘 뒀어. 혹시 공작저에서 나를 입양해 갈 생각은 없는지-”

“없을걸요.”

“그래…….”

연극부 부실을 나선 나는 주머니 속 티켓을 매만졌다.

누구와 함께 보면 좋을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칼바도스랑 보면 되겠네.’

이걸로 두 번째 데이트를 해치우면 될 것 같았다.

*

어느 월요일, 역사학부 부실에서 어느 학생이 연극 표를 되팔고 있었다.

“안 사면 후회할걸? 슈바가 남주인공인 공연이야. 졸업하고 리베르트 극단에서 활동하면 앞으로 보기 어려워질 텐데?”

연극 동아리의 꽃이라 불리는 슈바가 남주인공으로 나온다는 말에,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학생들이 표를 사기 위해 난리를 피웠다.

반응이 뜨거워지자, 표를 팔던 학생은 원래 가격의 두 배로 값을 올렸다. 물론 학생들의 반응도 다른 의미로 뜨거워졌다.

“양심 없다!”

“우우우! 죽어라 플미충!”

학생들이 열렬히 항의하던 때, 칼바도스는 우연히 부실 문을 열어젖혔다.

모두의 눈이 간절하게 그에게로 향했다. 학생들은 정의로운 황태자가 이 부당한 행위를 멈춰 주길 바랐다.

칼바도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칼바도스의 눈치를 본 학생이 본래 가격으로 값을 내렸다. 그리고 학생에게 다가간 칼바도스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나한테 팔면 되겠군. 그 티켓.”

“예……?”

“안 팔고 뭐 하나?”

“아, 여기 있습니다……!”

원래 가격에 티켓을 얻은 칼바도스가 기분 좋게 웃었다.

‘엘렌시아랑 보면 되겠네.’

그에게는 아직 두 번의 데이트가 남아 있었으니까.

잠시 뒤, 칼바도스가 다음 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이동하려던 때였다.

“도스야!”

엘렌시아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을 까딱였고, 칼바도스는 익숙하게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왜?”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 없으면…… 그냥 비워.”

“어……? 어.”

‘연극이 이번 주말이었던 것 같은데…… 뭐, 상관없나.’

연극을 보든 뭘 하든, 어차피 엘렌시아와 하는 것이니 뭐든 상관없었다.

그래서 칼바도스는 연극 티켓을 주머니 속에 묻어 두기로 했다.

“우리 이거 보러 가자. 이걸로 과제 처리해야지.”

엘렌시아는 주머니에서 티켓 두 장을 꺼내 보였다. 조금 전 칼바도스가 구입한 것과 같은 공연의 티켓이었다. 하지만 칼바도스는 굳이 같은 티켓이 있다는 것을 티 내지 않고 태연하게 물었다.

“좋아. 그런데 이 티켓 이거 어디서 구했어? 매진됐다고 들었는데.”

“슈바가 줬어. 슈바가 남자 주인공이거든.”

“아. 어릴 때 네가 주워 온 그 남자.”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칼바도스는 무의식적으로 티켓이 들어 있는 자켓 주머니를 더듬었다.

“주머니에 뭐 들었어? 왜 자꾸 뒤적거려?”

‘어쩌지.’

칼바도스는 티켓을 들키기 싫었다. 티켓이 두 장이 더 있다는 걸 들키면, 레이델과 카인을 불러서 함께 가자고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칼바도스는 주머니에서 티켓 대신 습관처럼 가운뎃손가락을 꺼내 들었다.

“왜 갑자기 시비야?”

“그냥 갑자기 시비가 걸고 싶었어.”

엘렌시아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습관처럼 손가락을 꺼내든 걸 후회했지만, 위기를 넘겨 안도한 그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남은 티켓 두 장은 어쩌지?’

인기가 많은 공연이니 티켓을 썩혀 두긴 아깝고, 카인 리베르트에게 주긴 싫었다. 카인 리베르트가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연극을 봐도 체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레이델.

딱히 그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레이델이 있으면 엘렌시아가 레이델 쪽을 신경 쓰려나.’

그래서 레이델에게도 주기 싫었다.

남은 티켓 두 장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때, 칼바도스의 눈앞에 우연처럼 시몬의 공주가 나타났다.

체력이 부족한지, 아래층 계단에서 올라오던 공주가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칼바도스를 발견한 셀레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

“머리는 좀 괜찮습니까?”

“네.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요, 뭘.”

순박한 미소를 지은 공주가 괜찮다는 듯 제 머리를 두드렸고, 무언가를 고민하던 칼바도스가 공주에게 갈색 봉투를 건넸다.

“이거 받으시죠.”

<우정과 사랑의 거리>라는 제목의 티켓 두 장이 들어 있는 봉투였다. 봉투를 열어본 공주가 물었다.

“연극? 와, 고마워요! 그런데 이걸 왜 주시는 거예요?”

“지난번에 공주의 머리에 내 친구가 법전을 떨궜죠. 그 친구가 공주에게 가진 죄책감의 일부를 내가 갚는다고 해 둡시다.”

무엇보다도, 이제 그 티켓은 칼바도스에게는 필요 없는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그러자 셀레네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직접 보시지 않고요? 저한테 주는 것보단 전하께서 공녀와 함께 보는 쪽이 더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이미 데이트 신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티켓으로 연극을 보는 건 어려울 것 같아서 공주에게 주는 겁니다.”

그렇게 상황을 설명한 그가 태양보다 눈부시게 미소 지었다.

“흠.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평소랑 똑같습니다.”

너무 기분 좋은 티를 냈나 싶어서 칼바도스가 천천히 미소를 거두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전하. 연극 보는 걸 좋아하는데 정말 잘됐어요.”

셀레네는 칼바도스가 건넨 연극 티켓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장이네.’

누구와 함께 보면 좋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오래전부터 셀레네의 곁을 지켜 온 진정한 친구는 한 명뿐이었다.

‘유리한테 보러 가자고 해야지.’

율리안 트로이센, 나의 친구.

소중한 친구를 떠올리며 셀레네가 미소 지었다. 황태자와 달리 셀레네는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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