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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37)화 (37/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37화

데이트 횟수는 총 3번, 코스를 정해서 보고서를 쓰고 소감문을 작성해야 했다.

화창한 주말, 나는 칼바도스와 함께 과제를 수행하러 떠났다.

레이델을 혼자 남겨 두는 것이 걸렸으나, 검술학부 학생들이 레이델을 끌고 갔다는 칼바도스의 말을 듣자 안심이 됐다.

나와 칼바도스는 다른 학생들이 추천해 준 맛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소화를 시킬 겸, 산책을 하기 위해 호수 공원으로 향했다.

유명한 산책로답게 사람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호수는 고요했고, 칼바도스는 푸른 호수를 보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난 호수를 보면 옛날 생각이 그렇게 나더라.”

아마 나, 칼바도스, 루카스가 수업을 빠지고 함께 꿩사냥을 나간 벌로 황궁 호수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으로 유배를 간 기억일 것이다.

“나도. 이제 나한테 호수는 낭만적인 곳이나 관광지가 아니라 유배지로 전락해 버렸다고.”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칼바도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네가 나를 호수로 밀어 버렸지.”

뒤끝 있는 말을 참 담담하게도 하는구나 싶었다.

사실 칼바도스의 말은 조금 틀렸다. 내가 일방적으로 칼바도스를 호수로 밀어 버린 것이 아니라, 유배 중 말다툼이 몸싸움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물에 빠진 칼바도스의 행동은 더욱 가관이었는데…….

혹시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만 기억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나는 고개를 기울인 채 물었다.

“네가 발에 쥐가 난 척해서, 널 구하러 나까지 물에 들어간 건 기억 안 나나 봐?”

“내가 언제?”

전혀 모르겠다는 칼바도스의 반응은 나를 열 받게 하기 충분했다.

“너 진짜 기억 안 나? 기껏 구해 주러 들어갔더니, 네가 내 머리를 물에 처박았잖아!”

호수에 빠진 칼바도스가 갑자기 허우적거리며 발에 쥐가 났다고 소리치자, 놀란 나는 그를 구하러 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칼바도스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물에 담가 버렸다.

“기억 안 나는데?”

잔뜩 흥분한 나와 달리 칼바도스는 실실 웃고 있었다.

‘아니, 이 망할 놈이?’

다 기억하면서, 모르는 척 잡아뗀 것이다. 기가 막힌다는 내 눈빛에도 칼바도스는 머쓱해하기는커녕,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장난이야. 다 기억하지.”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일기를 쓰잖아. 잊더라도 일기를 보면 어릴 적 일이 바로 기억이 나서.”

“몇 살 때부터 썼다고 했지?”

“여덟 살. 너를 처음 만난 날부터 썼지.”

나를 만난 날부터 썼다고?

‘그건 몰랐는데.’

내 마음을 읽은 것인지, 칼바도스가 친히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그날 미로 정원에서 네가 내 머리를 돌로 내리치려고 했잖아. 네 불경한 행동을 기록해서 언젠가 너를 혼낼 증거로 아버지께 제출할 생각이었어.”

“어……?”

친절하고 담담한 목소리에, 그렇지 못한 내용이었다. 그걸 일러바칠 생각이었다고?

“너 나를 폐하께 고발하려고……!”

칼바도스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하지만 칼바도스는 묵묵히 제 할 말을 할 뿐이었다.

“처음엔 분명 그렇게 시작했지. 그런데…… 너랑 같이 있으면 내 하루는 폭풍에 휩싸이는 것만 같았어. 그래서 나는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내 하루를 어딘가에 정리해야만 했지.”

칼바도스가 웃었다. 루카스와 셋이 함께한 과거를 떠올린 것 같았다.

“눈을 뜨면 황자궁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책을 읽다가 눈을 감는 것이 일상이었던 내 하루가 소란스러워지는데…… 나는 그게 좋았어. 그래서 혹시 그 좋은 날을 잊어버릴까 봐, 잊어버리는 게 겁나고 싫어서. 그래서 계속 일기를 쓰게 됐어.”

말을 마친 칼바도스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예전엔 내가 더 컸는데. 지금은 칼바도스가 훨씬 컸다.

“어때, 아직도 고발용 같아?”

“아니.”

고발용에서 하루를 정리하는 용도로, 하루를 정리하는 용도에서 하루를 잊지 않기 위한 용도로. 그렇게 일기장의 목적은 변해 왔다.

‘이 자식, 나랑 논 시간이 소중하긴 했나 보네.’

묘한 감정에 가슴이 뭉클해지려던 그때,

“그러니까 안심해. 네가 잊어버려도 네 흑역사는 전부 내 일기장에 적혀 있으니까.”

“너 일기장 간수 잘해라. 내 손에 들어오면 바로 찢어 버릴 거니까.”

유감스럽게도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

잠시 뒤, 칼바도스와 나는 식당에 이어 카페에서도 배를 꽉 채운 상태로 가게를 나섰다. 칼바도스가 바깥 공기를 마시며 기지개를 켰다.

‘하루가 먹다가 끝나네.’

뭐, 맛있었으면 됐지.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치부하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보고서는 어떡하지.’

보고서에 하루 종일 먹으러 다녔다고 쓰긴 좀 그랬다. 이거 아무래도 다음번엔 제대로 코스를 짜야 할 것 같았다.

아카데미 정문 입구 거리에 다다르자 예상대로 학생들이 붐볐다.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며 걷던 칼바도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뭐야.’

뭐 맛있는 거라도 파나?

칼바도스의 시선이 유리창 너머 어느 건물 안 사람들에게 닿았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우리 학부 학생들 같은데.”

역사학부 학생들 여럿이 모여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것인지 학생들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건물 안에서 칼바도스와 눈이 마주친 한 여학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건물을 빠져나와 칼바도스에게 다가왔다.

“황태자 전하, 저는 전하와 같은 역사학부인 루시오 켈리입니다. 잠시 이야기 괜찮으십니까? 전하도 계신데 저희끼리 학부 일을 결정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얼마 안 걸릴 겁니다.”

칼바도스가 동의를 구하기 위해 나를 흘끗 보았고, 나는 등을 밀어 주었다.

“다녀와.”

“피곤하다고 먼저 가기 없다.”

“알았다고.”

그렇게 칼바도스가 건물 안으로 끌려갈 때, 어느 모녀가 운영하는 꽃집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정확히는 입구에 놓인 붉은 장미 바구니가 시선을 끌었다.

‘그러고 보니 칼바도스가 장미를 좋아했었지.’

나는 망설임 없이 꽃집으로 발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주인의 어린 딸이 나를 반겼고,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채 꽃집 안을 둘러보았다.

“장미 꽃다발을 하나 사려고 하는데…….”

꽃집 안에는 붉은 장미뿐만 아니라 형형색색의 장미들이 가득했다.

“원하시는 색상이 따로 있으세요?”

“분홍색으로 부탁해.”

“네, 예쁘게 해 드릴게요!”

딸이 주문을 받았고, 어머니는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주인이 하얀 포장지와 연분홍색 포장지를 가져와 꽃다발을 만드는 동안, 나는 꽃집 안을 구경했다. 그리고 그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꽃이 하나 있었다.

‘히아신스다.’

방 안에 꽃을 두면 좋을 것 같아서 나는 히아신스 꽃다발을 추가로 주문했다.

그렇게 내 왼손에는 하얀 리시안셔스와 조화를 이룬 보라색 히아신스 꽃다발이 들렸고, 오른손에는 분홍색 장미 꽃다발이 들렸다.

‘칼바도스는 언제 오려나.’

양손에 꽃다발을 들고 있으니 민망해서, 나는 칼바도스의 빠른 귀환을 빌었다. 그리고 내 바람대로 건너편 건물의 문이 열리고 칼바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웬 꽃다발? 누가 준 거야?”

갑작스러운 꽃다발의 등장이 의아했는지, 칼바도스가 물었다.

“내가 샀어.”

“두 개나?”

“어.”

“히아신스네.”

“응. 방이 좀 칙칙한 거 같아서.”

룸메이트인 피오나는 방 안이 칙칙하다며 유리 화병 안에 레몬을 넣어 두었다.

레몬 대신 꽃을 꽂아 두면 피오나가 좋아할 것 같았다.

한 번에 커다란 꽃다발 두 개를 드니 조금 부담스러웠다.

“도스야, 이것 좀 들어 봐.”

칼바도스는 내가 시키는 대로 장미 꽃다발을 들었다. 애가 곱상하게 생겨서 그런가, 분홍 장미가 제법 잘 어울렸다. 그래도 어느 쪽이 꽃인지 헷갈릴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걷자, 칼바도스는 영문도 모르고 꽃다발을 든 채 내 옆을 따라 걸었다.

“그럼 내일 보자.”

“아니, 잠깐만.”

“왜?”

기숙사 정문 앞에 선 내가 작별 인사를 하자, 칼바도스가 품 안의 풍성한 꽃다발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 이거 언제까지 들고 있으라고?”

“계속. 이제 그거 들고 그대로 기숙사까지 가.”

“……나 주는 거였어?”

“응.”

칼바도스가 멍청한 얼굴로 천천히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물었다.

“이걸 왜 주는데?”

“어렸을 때 네가 장미를 좋아한다고 한 것 같아서. 갑자기 그게 생각나서 사 봤어. 아직도 좋아하지?”

“……별걸 다 기억하네.”

툴툴거리는 어조와 달리 칼바도스는 웃고 있었다. 장미꽃을 바라보는 그는 꽃처럼 화려하게 웃었다.

역시 꽃은 사람은 웃게 하는 힘이 있나 보다.

“너는 일기를 쓰면서 지나간 일을 기억한다며. 그래서 나도 기억을 좀 해야 할 것 같아. 둘이서 같은 경험을 했는데, 둘 중 한 명만 기억하고 있는 건 너무 슬프고 억울하잖아.”

일어난 일과 일어날 일.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어느 장소에서 무엇을 한다, 후작가가 어떤 악행을 벌인다 등, 이 세계에서 일어날 일만을 떠올리지 말고,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누군가와 함께 기억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내 장미꽃만 볼 것 같던 칼바도스가 생각보다 쉽게 장미에서 눈을 뗐다.

그러고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오늘을 기억할 거야. 그러니까 엘, 너도 오늘을 기억해. 네 말대로 나만 오늘을 기억하면 엄청 슬프고 억울해질 것 같으니까.”

“걱정 마. 나 기억력 좋은 편이거든.”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면, 칼바도스에게 장미를 선물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한번 믿어 보라는 듯 거만하게 입꼬리를 올리자, 칼바도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조금 전 내 모습이 재수가 없었나 보다.

“믿을게. 내일 보자.”

그렇게 짧은 인사를 끝으로 칼바도스가 급히 몸을 돌렸다.

꽤 큰 꽃다발이었는데, 칼바도스가 등을 돌리니 꽃다발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남자 기숙사로 돌아가는 칼바도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그냥 평소랑 똑같네.’

데이트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평소와 똑같은 하루였다.

아마 칼바도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역시 다음 일정은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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