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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36)화 (36/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36화

잠이 쏟아지는 따뜻한 오후. 칼바도스와 나는 강의실에 나란히 앉아서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 강의를 들었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창문 틈으로 햇빛이 들어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눈이 감겨 다시 떠지지 않으려 할 때마다, 옆자리에 앉은 칼바도스가 나를 흔들어 줘서 버틸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열심히 따라갔다는 건 아니다. 멀쩡하게 깨어 있는 것과 비몽사몽 깨어 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수업 내용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슬슬 과제를 공지하겠습니다.”

라는 교수의 말에, 바늘에 허벅지를 찔린 것처럼 눈이 번뜩 떠졌다.

따닥따닥, 하고 분필과 칠판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내용은 경쾌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가상 연애 과제>

-가상으로 커플을 이뤄 데이트를 하고, 데이트 후 소감문 제출

칠판에 적힌 ‘과제’라는 글씨를 보자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해당 강의의 성적 반영 비율이 떠올랐다.

‘중간고사 30%, 기말고사 40%, 출석 10%, 과제 20%라고 했었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다 적은 것인지 교수는 분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강의실 구석에 있던 항아리 두 개를 중앙으로 가지고 왔다.

“데이트를 하려면 파트너가 필요하겠죠? 이 항아리 두 개는 마법학부 학생들이 기증한 마법 항아리인데, 랜덤으로 돌을 뱉어 줍니다. 여학생은 왼쪽 항아리, 남학생은 오른쪽 항아리에 자기 이름을 적은 돌을 넣고 기다리는 거죠.”

돌 뱉는 항아리라니.

‘저런 항아리는 대체 누가 만드는지.’

사실 누가 만들었는지보다는, 왜 만들었는지가 더 의문이었다.

점심 메뉴 정하기에는 참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시시한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교수가 외쳤다.

“비록 이 자리에는 없으나, 항아리를 기증한 레반 디아스와 카인 리베르트 학생에게 박수를!”

누가 기증했다고?

누가 만들었는지 듣고 나니 쓸데없었던 항아리가 갑자기 고급스러워 보였다. 원효 대사 해골물의 반대 사례다. 나는 흡족한 얼굴로 박수를 치며 옆자리의 칼바도스에게 동의를 구했다.

“정말 아름다운 항아리야. 그렇지?”

“항아리는 다른 데서 사 온 거 같은데?”

“…….”

그리고 할 말을 잃었다. 모두가 박수를 칠 때, 칼바도스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파트너 하고 싶은 사람 있어?”

“딱히 없는데…… 어차피 무작위 추첨이잖아. 나는 많은 걸 바라지 않아. 그냥 성실한 태도로 과제에 임하는 사람이면 돼.”

“네가 말한 그 기준에 내가 부합하는 것 같은데. 우리 둘이 파트너가 되는 건 어때?”

“너랑?”

흠…… 그건 좀 내키지 않는다. 굳이 데이트 과제를 칼바도스랑 할 필요가 있나?

괜히 잠잠해진 약혼설에 불붙이는 짓 같았다.

언젠가 귀족 모욕죄를 들먹이며, 본보기로 한두 명 정도는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어차피 저건 데이트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과제고, 나는 아주 성실한 태도로 과제에 임할 거야. 나를 오래 봤으니 너도 알잖아? 살면서 내가 대충 제출한 과제는 없어.”

나는 아주 오랜만에 칼바도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칼바도스는 과제 도중에 잠수 탈 녀석이 아니었다.

그리고 칼바도스와 파트너가 되면, 괜히 어색한 사람과 데이트를 하며 어색한 시간을 보낼 일도 없었다.

‘그래. 모르는 사람이랑 데이트하는 것보단 친한 사람이랑 놀러 다니는 게 낫지.’

처음 만난 사람과는 친해지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원활한 과제 수행도 어려울 테고 말이다.

칼바도스 역시 나와 같은 이유로 파트너를 제안한 것 같았다.

“……의외로, 설득력이 있어.”

아주 많이.

“네가 잊고 사나 본데, 내 모든 발언은 설득력을 토대로 해. 그리고, 나랑 파트너가 된 학생이 나한테 반하면 골치 아파.”

설득력을 토대로 한다는 것 치고, 지금 발언은 설득력이 없었다. 심지어 재수도 없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한테 반할 줄 아나 보지?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세상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으니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칼바도스가 주인공인 세상이 굴러가는 꼴을 떠올리던 그때, 나는 칼바도스가 놓친 허점을 떠올렸다.

“아니, 잠깐만. 애초에 우리 둘이 파트너를 하고 싶어 해도, 결국 파트너를 결정하는 건 저 항아리잖아? 그럼 우리끼리 이래 봤자 아무 의미 없는 거 아니야?”

“……아, 맞다.”

칼바도스가 바보 같은 표정으로 답했다.

설득력이 넘치긴 개뿔, 어차피 파트너는 항아리가 뱉어낸 돌에 적힌 이름대로 배정된다.

‘방법이 없나?’

아무 문제 없이 우리 두 사람이 파트너로 배정될 방법이…….

“아.”

서로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온 작은 탄성에, 칼바도스와 나의 시선이 부딪혔다.

칼바도스의 푸른 눈동자를 보자마자 나는 그가 어떤 방법을 떠올렸는지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그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를 보고 입꼬리를 올린 칼바도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같은 방법을 떠올린 것 같은데.”

“그러게.”

끼리끼리 친구 한다더니,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우리는 생각이 겹치는 게 환멸 난다는 듯 동시에 웃었다.

그래. 이 방법이라면, 서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

학생들은 마법 항아리에 각자의 이름이 적힌 돌멩이를 넣었다.

여학생인 나는 왼쪽 항아리에, 남학생인 칼바도스는 오른쪽 항아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항아리 안은 그저 검은 공간이었는데, 앞서 학생들이 넣은 돌을 확인할 수 없는 구조였다.

모든 학생이 돌멩이를 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항아리와 왼쪽 항아리에서 작은 회색 돌멩이가 하나씩 툭 튀어나왔다. 돌맹이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센치 교수가 외쳤다.

“아킬론, 폴릭시아!”

이름을 불린 남학생과 여학생이 수줍게 웃으며, 가상 커플을 위해 따로 마련된 자리로 이동했다.

“티오, 레이나!”

.

.

.

그렇게 나와 칼바도스를 제외한 모든 학생의 이름이 적힌 돌멩이가 튀어나왔다.

항아리에서는 더 이상 돌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직 황태자 전하의 돌이 나오지 않은 거지?”

“공녀님의 돌도 나오지 않았어.”

“그럼 이미 정해진 거네? 두 분이 파트너가 되신 거야! 운명 아니야?”

내심 칼바도스와 파트너가 되는 것을 기대한 이들이 있었기에, 칼바도스의 돌멩이는 크나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잠자코 지정석에 앉은 학생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칼바도스가 입을 열었다.

“내 돌만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제 돌 역시 나오지 않는군요.”

“항아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뭐, 정해진 거나 다름없지. 리베르트 공녀가 나의 파트너가 되는 거군.”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오른쪽 항아리에서 나를 제외한 모두의 돌이 나왔으니, 어차피 마지막으로 나올 돌은 내 것일 테고.”

“왼쪽 항아리에서도 저를 제외한 모두의 돌이 나왔으니, 어차피 마지막으로 나올 돌은 제 것일 테니까요.”

내가 지정석으로 향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자 칼바도스가 모두의 앞에서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를 선보였다.

“리베르트 공녀, 내 오랜 친우인 그대가 나의 파트너가 되어서 진심으로 기뻐.”

“제 파트너가 된 영광을 마음껏 누리세요, 전하.”

내가 네 파트너가 된 게 아니라, 네가 내 파트너가 된 거야.

쓸데없이 그런 이상하고 사소한 곳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사이였다.

*

모든 게 계획대로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며, 나와 칼바도스는 무표정으로 태연하게 손바닥을 부딪쳐 하이파이브를 했다.

짝, 하는 경쾌한 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건물 밖 분수대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던 우리는, 주머니에서 작은 돌멩이를 하나씩 꺼냈다.

조금 전 항아리에 넣었어야 하는 돌멩이였다.

주변을 곁눈질하던 칼바도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가 안 보지?”

“어.”

그렇게 내 대답을 끝으로, 우리 두 사람은 주머니에서 꺼낸 돌을 분수대에 던져 버렸다.

돌멩이까지 완벽하게 처리하고 완전 범죄를 저지른 칼바도스가 안도하듯 말했다.

“혹시 우리랑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없어서 다행이지.”

나와 칼바도스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두 사람 다 처음부터 항아리에 돌을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학생들의 돌이 뽑히고, 항아리에서 돌이 나오지 않으면 어차피 마지막으로 뽑힐 것은 나와 칼바도스의 돌이라고 주장하면 되는 거다.

돌을 넣는 시늉을 하며 항아리에 손을 넣었을 때 알게 된 사실 역시 도움이 되었다.

‘항아리 안을 확인할 수 없어서 일이 더 쉬워졌어.’

항아리 안을 확인할 수 없으니, 그 안에 나와 칼바도스의 돌이 없다는 사실을 들킬 일이 없었다.

목표를 달성해 후련해진 나는 칼바도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뻐해. 나랑 파트너 하는 게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흔한 기회가 아니거든.”

“우리 지난 9년 동안 파트너였던 걸로 아는데.”

하긴. 여덟 살 때 칼바도스가 춤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그의 파트너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 연회에 갈 때도 칼바도스는 언제나 내 파트너였다.

“그럼 앞으로는 아닐 테니까 이 순간을 소중하게 여겨.”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바도스의 얼굴이 굳었다.

“앞으로는 아닐 거라니?”

“너는 황태자비의 파트너를 맡아야지. 나도 언젠가 약혼자가 생길 테니까 그 사람이 내 파트너가 될 테고.”

“……내가 장담하는데, 넌 약혼자랑 입장할 일 없어.”

“너 지금 나 저주해?”

“어. 그리고 겸사겸사 너한테 코 꿰일 가여운 약혼자를 구원하는 거지.”

“황태자비 될 사람은 안 불쌍한 줄 알아??”

갑자기 셀레네가 불쌍해졌다. 지금의 칼바도스에게선 소설 속 칼바도스의 멋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의롭고 선한 황태자가 아니라 찌질한 친구 한 명이 눈앞에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셀레네 앞에선 다르겠지.’

예전부터 칼바도스가 유치하게 구는 대상은 나와 루카스로 한정되어 있었다.

다른 귀족들 앞에선 점잔을 떠니 셀레네에게도 멋진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사기 결혼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거기까진 내 알 바 아니었다.

칼바도스가 결혼하면 이 지긋지긋한 스캔들에서도 벗어날 수 있으니까!

‘셀레네가 황태자비가 되면 잘해 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칼바도스의 저주는 흘려들은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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