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35화
다급함이 느껴지는 손으로 가림막을 걷은 이는 바로 서브남주, 율리안이었다. 셀레네가 다쳤다는 말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것 같았다. 숨을 고르느라 입 밖으로 가쁜 숨만 내뱉던 그가 말했다.
“오는 길에 헤르트 경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안해요. 내 실수로 공주님이 다치셨어요.”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최대한 고의가 아니었음을 어필했다. 침대 가까이 다가온 율리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셀레네를 눈에 담았다.
‘어라?’
잠시 셀레네의 상태를 살펴본 율리안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입에 힘을 주어 제 입꼬리를 꾹 누르고 있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나와 레이델에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제가 옆에 있을 테니 세 분은 식사라도 하고 오시는 게 어떠십니까? 벌써 저녁 시간인데.”
“아뇨. 그냥 계속-”
내 실수로 쓰러진 사람을 두고 어떻게 마음 편히 식사를 할 수 있겠는가. 셀레네가 깨어날 때까지 같이 있겠다는 말을 끊고 제법 단호한 율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습니다. 그러니 다녀오시죠.”
율리안은 나와 레이델을 침대에서 떨어지게 한 뒤 가림막을 쳤다.
율리안을 부른 것은 나였으나, 꼭 쫓겨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
‘셀레네가 다쳐서 화난 건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율리안은 셀레네를 짝사랑하는 입장이니 셀레네를 다치게 한 나에게 화가 났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눈을 깜빡이자 소파에 앉아 있던 칼바도스가 물었다.
“저녁 뭐 먹을래?”
율리안이 나에게 화가 난 건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었다.
‘쟨 진짜 별생각 없구나.’
서브남주가 여주인공을 신경 쓰는 이 와중에도, 남자 주인공인 칼바도스 저 녀석은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
공녀와 황태자, 제국의 영웅이 떠난 뒤, 율리안은 손가락으로 셀레네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툭툭.
셀레네가 눈을 뜨지 않자 다시 한번 가볍게, 툭.
셀레네를 처음 만난 어느 어린 날보다 낮고 굵어진 목소리로 그가 웃었다.
“셀레네. 왜 자는 척해.”
나지막한 목소리에 살짝 눈을 뜬 셀레네가 눈알을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다 갔지?”
“응.”
율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는 괜찮아?”
“지금 내 머리가 중요한 게 아니야, 유리.”
율리안이 걱정스럽게 꿰맨 곳을 살피려 하자 셀레네가 손을 내저었다.
“내가 여기 누워서 뭘 들었는지 알아?”
다친 머리가 중요하지 않다니. 그럼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셀레네와 달리 율리안은 셀레네의 머리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조금 시큰둥하게 물었다.
“뭘 들었는데?”
“황태자가 공녀한테 청혼했어.”
“정말?”
“그런데 공녀가 깠어.”
그렇게 말한 셀레네가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며 까르르 웃었다.
“글쎄 황태자 전하가 공녀한테 ‘너 황태자비 할래?’라고 물어보더니, 어차피 결혼을 해야 한다면 오래 알고 지낸 너랑 하는 게 낫겠다는 식으로 말하더라고.”
‘그게 청혼인가?’
율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태자의 말은 마치, 오늘은 무슨 펜을 쓸지 고민하다가, 가장 오래 사용하여 손에 익은 펜을 고르는 것과 같았다.
적어도 율리안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그럼 황태자가 공녀를 좋아하는 건 아니네.”
황태자는 그저 그 자신에게 있어 가장 편하고 이로운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런 율리안의 말을 들은 셀레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황태자는 공녀한테 마음이 있는 게 확실해. 자각을 못 했을 뿐이지.”
“……대체 어떻게 들어야 그런 해석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두 사람은 오래 알고 지냈다며. 늘 옆에 있었던 친구를 어떻게 연애 대상으로 보겠어. 자긴 절대 공녀를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했을걸.”
“…….”
늘 옆에 있었던 친구를 어떻게 연애 대상으로 보겠냐는 말에 율리안은 조금 슬퍼졌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공주의 말에 귀 기울였다. 공주는 제비꽃을 닮은 보랏빛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지. 에녹 헤르트라는 자가 계속 공녀 옆에 머무니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진 거야. 이제 얼마 안 가 자기 마음을 깨달을걸.”
그 무미건조한 말에서 이렇게나 유의미하고 습한 의미를 도출해 내다니.
그제야 율리안은 자신의 오랜 친구가 소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공녀가 황태자를 좋아할 가능성이 있다고 봐?”
“……아니.”
아무리 봐도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아마 날 때부터 온갖 고귀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온 황태자는 그런 말을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을 것이다.
셀레네는 황태자가 안타깝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공녀는…… 황태자를 남자로 보지 않아. 내가 황태자였으면 그 자리에서 울었어.”
셀레네는 확신했다. 조만간 페르데니아의 황태자가 자신의 마음을 깨달을 것이라고.
그리고 율리안은 황태자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칼바도스와 레이델과 함께 의무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칼바도스는 지나치게 셀레네를 신경 쓰는 나를 이상하게 여겼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타국의 공주라고 해 봤자 내게 항의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레이델은 나 때문에 다친 셀레네를 신경 쓰는 나를 당연하게 여겼다. 그것이 본래 나의 성품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정작 나는 셀레네를 묻어 버릴 생각부터 했는데 말이다.
칼바도스와 달리 나를 잘 모르는 레이델은 나를 착한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좋은 사람으로 보여서 나쁠 건 없었으니 계속 그런 이미지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길을 걷던 중, 우연히 칼바도스와 눈이 마주친 레이델이 고개를 휙 돌렸고 칼바도스 역시 고개를 돌렸다.
‘둘이 룸메이트라면서 아직도 어색한가.’
그리고 바로 그때, 가까이에서 들려온 어느 여자의 맑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에, 에녹 경!”
“헤르트 경이다!”
레이델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온 서너 명의 학생들이 칼바도스와 나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아는 사람인가?’
하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지, 레이델이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저는 웰링턴에 사는 페넬리예요. 경을 찾아다니고 있었어요!”
“저를 말입니까?”
자신을 페넬리라고 소개한 여자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에 에녹 경이 아카데미에 입학하셨다는 걸 듣고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그날 에녹 경이 웰링턴에 없었다면 제 동생과 아버지는 괴물한테 밟혀 죽었을 테니까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레이델은 손을 내저었지만, 페넬리는 레이델의 품에 커다란 선물 상자를 내던지듯 안겨 주었다.
“이거 받아 주세요!”
페넬리의 거센 힘과 커다란 선물에 레이델의 몸이 조금 밀려났다. 그리고,
“제 것도 받아 주세요!”
“이것도요, 경!”
“경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사 봤습니다!”
함께 온 학생들이 선물 상자 위에 계속해서 선물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도망쳤다. 레이델이 뭐라고 할 틈도 없었다.
그런 레이델의 모습을 본 칼바도스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인기 많네.”
“그러게. 검술 수업 때도 에녹을 놓아주질 않던데.”
“그래서, 너는?”
“나? 나는 구석에서 쉬었지.”
내 대답의 어디가 웃긴지 모르겠지만 칼바도스가 실실 웃었다. 바로 그때, 레이델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의 탑에서 제일 작은 상자 하나가 툭 떨어졌다. 떨어진 충격 때문에 상자가 열렸고, 내용물이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양손이 바쁜 레이델 대신 칼바도스가 선물을 주웠다.
“귀걸이네.”
가운데에 붉은 보석이 박힌 치렁치렁한 귀걸이였다. 길게 늘어진 채 반짝거리는 것이 예뻤지만, 저런 귀걸이를 차면 얼마 안 가서 귀가 축 처질 것 같았다.
“이걸 끼울 구멍은 있나?”
귀걸이를 집어 든 칼바도스가 물었고, 레이델은 말없이 붉은 보석을 눈에 담았다.
그는 한동안 귀걸이의 붉은 보석을 바라보더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레이델은 나와 귀걸이를 번갈아 보았고, 한동안 그의 시선이 내 쪽에 머물렀다.
그러다 내 몸에 구멍 나겠다고, 그렇게 말하려던 때 레이델이 칼바도스에게 말했다.
“조만간 생길 겁니다, 구멍.”
“귀를 뚫으려고?”
“예.”
선물 받은 귀걸이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나저나 처음부터 저런 걸로 뚫으면 안 되는데…… 걱정이 앞섰다.
*
잠시 뒤, 의무실에 도착한 칼바도스는 율리안에게 셀레네의 상태를 묻기 위해 무심코 커튼을 걷었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달리 생기 있는 얼굴로 두 눈을 깜빡이는 셀레네를 마주했다.
“……어, 깨어났군요?”
“아, 황태자 전하.”
소설을 읽으며 상상한 셀레네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밝고 가벼운 기운이 귓가를 맴돌았다.
“일어날 필요 없습니다.”
칼바도스를 본 셀레네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칼바도스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는 아주 자애롭고, 배려 가득한 황태자의 얼굴을 한 비즈니스용 가면으로 제 얼굴을 덮고 있었다.
‘으…….’
그렇게 칼바도스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 죄인인 내가 셀레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눈빛을 보냈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로 책을 떨어뜨려서…….”
“나는 괜찮아요. 그것보단 내가 공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들어 줄래요?”
“물론이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데요?”
셀레네가 몸을 숙여 달라는 듯 손짓했고 나는 그대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셀레네는,
“만나서 반갑다고요! 이 말이 하고 싶었어요!”
라고, 아주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얼떨결에 셀레네의 손을 맞잡은 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셀레네는 나와 칼바도스를 번갈아 보며 히죽거렸다.
마치 아주 재미있는 소설을 본 것처럼 입가를 가리며 웃는 셀레네의 모습을 본 나, 칼바도스, 레이델은 생각했다.
‘머리를 다쳤나?’
‘머리를 다쳤군.’
‘머리를 다치셨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실실 웃음을 흘릴 리가 없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는 율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빛으로 물었다.
‘다쳐서 이러시는 거예요?’
‘원래 이럽니다.’
‘아…… 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인데도 눈빛으로 대화가 술술 풀렸다.
‘일단 나한테 화가 난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인데…….’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인 칼바도스를 제쳐 두고 나에게 잘 지내자고 했다.
‘이거, 괜찮겠지?’
셀레네의 부상과는 별개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