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34화
“오셨어요, 공녀님?”
칼바도스와의 대화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온 나를 맞이한 것은 룸메이트인 피오나였다.
셀라 백작가의 둘째 딸인 그녀와는 평소 친분이 있었는데, 오늘은 같이 기숙사 방 청소를 하기로 했다.
‘칼바도스랑 레이델이랑 저녁 약속이 있으니까 그 전까지 청소하면 되겠다.’
보통 학생들이 입사하기 전, 기숙사 쪽에서 일꾼들을 불러서 전체적으로 청소를 하긴 했지만, 발코니 쪽은 신경 쓰지 않았는지 유독 더러웠다.
발코니에서 술 한잔 기울이는 것을 사랑하는 나는 발코니를 치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피오나 역시 동의했다.
이래서 친구하나 보다. 나는 빌어먹을 금주령만 끝나면 피오나와 달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충 남은 날짜를 그린 나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뒤 발코니를 둘러보았다.
난간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구석에는 이전 사용자가 반납하지 않은 먼지투성이 책이 놓여 있었다.
‘이거 횡령한 거 아니야?’
청소업체를 더 싼 업체로 바꾸고 남은 돈을 횡령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발코니 청소를 이렇게 할 리 없지.
역시, 아카데미가 청렴을 개에게 내줬다는 나의 의심은 점점 확신이 되어 갔다.
피오나는 난간을 청소하기 위해 어두운 천 하나를 물에 적셨고, 나는 구석에 놓인 책 몇 권을 살폈다.
‘법전?’
가장 아래 깔려 있던 책은 다름 아닌 법전이었다.
이 방을 쓰던 사람이 법학부 학생이었나?
법전의 표지에는 본 법전이 아카데미 도서관의 도서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럼 반납도 안 하고 졸업했다는 건데…… 다음에 내가 반납해야겠다.’
이전 세입자의 인품을 짐작한 내가 고개를 저었다. 책을 두기에 마땅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책을 대충 난간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피오나와 함께 난간을 닦기 위해 천 하나를 물에 적셨다.
“그런데 공녀님께서 이런 걸 직접 하셔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백작가 영애인 피오나 너도 하는데, 내가 안 괜찮을 이유가 없지 않아?”
물론 나도 사람을 불러서 청소하는 게 좋았지만, 이 정도는 직접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자 난감한 얼굴을 한 피오나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공녀님께선 황태자비가 되실 분이니까…….”
황태자비?
피오나의 입에서 나온 말에 천 쪼가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에이씨…… 그런 거 아니라고 내가 대체 몇 번을 말해야-!”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을 거냐고. 그렇게 화를 내려던 순간, 왼쪽 팔꿈치가 법전에 부딪쳤고, 난간에 올려 둔 법전이 힘없이 툭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꺄악!”
아래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설마 사람 소리야?
당황한 내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어느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머리에 법전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여자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이상할 정도로 눈에 밟혔지만 애써 무시했다.
‘검은 머리카락이라고 다 여주인공은 아니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던 때,
“세상에, 저분은 시몬 왕국의 공주님이세요!”
라고. 아래에서 들린 괴상한 소리를 듣고 발코니로 달려온 피오나가 외쳤다.
……여주인공이 맞댄다.
이제 어떡하지?
*
첫 번째 단계는 현실 부정이다.
“확실해? 정말 저 사람이 셀레네 공주야?”
“네. 같은 교양 수업을 들어서 알아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재차 물었다. 하지만 확고한 피오나의 답에, 나는 강제로 진실을 마주하고 말았다. 현실 부정 다음으로는 혼란, 분노, 책임 회피 등이 이어졌다.
‘미치겠네!’
친구의 아내가 될 사람 머리에 법전을 떨궈 기절시켰다.
‘설마 죽진 않았겠지?’
아무리 시몬이 제국과 남매의 나라라지만, 타국의 공주가 제국 땅에서 죽으면 일이 까다로워진다.
죽었으면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죽었으면 그냥 땅에 묻어 버리자.’
그다음에 실종 처리를 하는 거다.
하지만 그렇게 하자니 목격자인 피오나가 걸렸다.
‘목격자만 없으면 완전 범죄…… 아니지. 애초에 셀레네가 살아 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잖아?’
가까스로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렸다.
“내려가서 보고 올게.”
“……저도 같이 가요!”
생각을 마친 내가 셀레네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피오나와 함께 허겁지겁 1층으로 달려왔을 땐, 칼바도스가 셀레네를 발견한 뒤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우리 저녁 약속 시간이야. 너 데리러 가던 길에 갑자기 위에서 이 책이 떨어졌고, 이 사람은 그 책에 맞아 기절했고.”
“에녹 경은?”
“사람들을 부르러 갔지.”
그렇게 말을 마친 칼바도스가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네가 사고를 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칠 줄은 몰랐지.”
“……3분의 1 정도는 칼바도스 네 탓이야.”
갑작스러운 책임 분할에 칼바도스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런 게 있어.”
칼바도스와 엮인 소문을 듣고 법전을 떨어뜨린 것이니, 칼바도스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나? 그러자 칼바도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남 탓은 못된 거야.”
“……어쩌라고. 네가 내 도덕 선생님이야?”
“도덕 선생님은 아니지만 너의 양심이 되어 줄 순 있지.”
저런 양심이라면 내다 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죽은 건 아닐 거야.’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다면 칼바도스가 이렇게 여유로울 리 없다. 나보다 먼저 셀레네의 곁에 다가간 피오나가 외쳤다.
“아직 살아 있어요, 공녀님!”
“정말?”
“네! 숨을 쉬고 계세요!”
미래의 황후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 것도 잠시, 저 멀리서 아카데미 관계자들과 함께 달려오는 레이델의 모습이 보였다.
*
“찢어져서 몇 바늘 꿰맨 것 말고 큰 문제는 없습니다. 조금 있으면 깨어날 거고요.”
나는 의원의 말을 들으며 의무실 침대에 누운 셀레네를 바라보았다. 시체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니 죄책감이 커졌다. 침대를 가린 천을 걷고, 칼바도스와 레이델이 다가왔다.
“남의 나라 공주님 머리에 법전을 내리꽂았네, 내가.”
칼바도스가 나를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공주가 눈을 뜨면 법의 심판을 받은 거라고 하자.”
“……법의 심판을 받기엔 공주가 너무 결백하잖아.”
“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에 죄를 하나씩 품고 사는 법이니, 괜찮을 겁니다.”
칼바도스와 레이델이 차분한 목소리로 그럴듯한 헛소리를 했다. 친구의 부인이 될 여주인공과 잘 지내 보려고 했는데…… 첫 만남이 최악이었다.
칼바도스가 레이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누구나 가슴 속에 죄를 숨기고 산다고.”
“넌 무슨 죄를 숨겼는데?”
“가슴 속에 깊이 묻은 죄를 굳이 말할 이유가 없지.”
“하긴.”
들키기 싫어 숨긴 죄를 뭐하러 떠벌리겠는가.
‘어?’
칼바도스의 윗옷 단추 부근에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조금 전 셀레네를 살필 때 붙었나 보다. 말로 하는 것보단 직접 떼 주는 게 빠를 것 같아 손을 뻗자, 칼바도스가 경악했다.
“너는 사람이 왜 이렇게 숭하냐? 내 가슴을 봐도 내 죄는 알 수 없어!”
놀란 칼바도스가 팔짱을 껴 몸을 가렸고, 나는 손에 들린 머리카락을 보여 주며 말했다.
“난 네 푸딩 같은 몸에 관심 없어.”
내가 말했지만 사실 푸딩은 좀 아닌 것 같았다. 같이 운동하면서 봤는데 남주인공이라 그런지, 부러울 정도로 몸이 좋았다. 하지만 옆에서 땍땍거리는 게 시끄러워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하!”
칼바도스가 신경질적으로 가림막을 걷고 나갔다. 황족 모욕이다 뭐다, 사람이 왜 이렇게 숭하냐는 등 꿍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칼바도스는 의무실을 나가는가 싶더니, 침대에서 떨어진 의무실 소파에 걸터앉았다.
“에녹, 트로이센 공자를 불러 줄래? 아무래도 공주님이 눈을 떴을 때 아는 사람이 있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알겠습니다.”
레이델은 칼바도스와 다르게 조용한 발걸음으로 의무실을 나섰다.
레이델이 오랜 시간을 메이와 함께 지내서일까, 레이델의 발걸음이 메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델이 떠난 뒤, 나는 가림막 탓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 칼바도스에게 작게 물었다.
“칼바도스, 공주님이랑 친해?”
“오늘 처음 보는데 친할 리가.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
“그냥…… 너랑 친하면 내 실수를 용서해 줄지도 모르잖아.”
“사람을 면죄부 취급하고 있어.”
어이없다는 헛웃음이 가림막 너머로 들려왔다.
“아까 그건 무슨 뜻이야? 공주가 이렇게 된 데에는 내 탓 3분의 1 정도 있다고 했잖아.”
“아. 피오나가 내가 황태자비가 된다는 말을 믿더라고.”
“아니라고 신경질 부리다가 법전을 떨어뜨린 거고?”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으나 오랜 친구는 그 안에 담긴 긍정의 뜻을 읽었다.
“3분의 1은 너무 크고. 그 반의 반 정도는 책임져 줄게.”
“관둬.”
쥐꼬리만큼 책임지고, 코끼리 몸통만큼 생색을 낼 것이 뻔했기에 거절했다.
한편 칼바도스는 혼자 멋대로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황태자비라……. 엘.”
“응.”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짧은 침묵을 다리 삼아 다음 말이 이어졌다.
“이대로 소문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냥 네가 황태자비 할래?”
“미친놈…… 너 제정신이야?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지 어떻게 그런 말을……!”
차라리 저주를 퍼부어라.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려던 때, 옆에 있는 환자의 존재를 인식한 나는 황당함과 분노를 억누르며 최대한 조곤조곤 답했다.
“머리를 다친 건 공주님인데 헛소리는 네가 하네.”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다니는 것은 봤어도, 해가 해바라기를 따라다니는 것은 보지 못했다.
사람이 소문을 가지고 노는 일은 있어도, 소문이 사람을 가지고 노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소문 때문에 결혼하면 나와 칼바도스가 소문에 놀아나는 꼴이었다. 나는 소문에 놀아나기 싫었다.
‘그게 뭐야? 선화 공주도 아니고.’
내가 선화 공주였다면 서동을 암살했을 것이다.
“그냥…… 어차피 황태자비를 들여야 한다면,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오래 알고 지낸 네가 나을 것 같아서 해 본 말이었어. 차라리 내가 너를 황태자비로 고용할까?”
나를 좋아해서 청혼한다는 말보다는 훨씬 정상적인 답변이었다.
그렇지만 헛소리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칼바도스, 지금 바빠?”
“아니. 별로.”
“그럼 지금 당장 기숙사 옥상에서 뛰어내려.”
이젠 머리에 충격을 주어서라도 친구가 정신을 차리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칼바도스가 입을 열려던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의무실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