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33화
식사 후, 나는 레이델과 헤어진 뒤 칼바도스와 함께 듣는 문학 교양 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향했다. 칼바도스와 의논한 후 강의를 신청했기 때문에 함께 듣는 교양 수업이 많았다.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저 멀리 고독하게 앉아 있는 찬란한 금발의 뒤통수가 보였다. 얼굴을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저렇게 반짝이는 건 칼바도스 머리뿐이지.’
주인공 버프 때문인가, 같은 금발이어도 칼바도스의 머리가 유독 반짝이는 것 같았다.
‘뒤통수도 잘났네.’
나는 칼바도스의 옆자리에 앉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지만 예상하지 못한 복병이 있었다.
칼바도스의 양 옆자리에 책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옆에 서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칼바도스는 좀처럼 고개를 돌려 알은척을 하지 않았다.
‘누가 칼바도스 옆자리를 맡아 놓은 건가?’
뭐, 워낙 인기가 많은 녀석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같이 수업을 듣기로 했으면 함께 앉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를 본 거 아닌가?
하지만 정작 칼바도스가 앉아 있는 자리에는 책이 없었다.
‘그럼 이건 칼바도스 책이라는 건데…….’
“칼바도스?”
“왜.”
“나 여기 앉지 말라고 올려놓은 거야?”
“……네 자리 맡아 놓은 거거든. 너도 알다시피 내 옆에 앉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넘쳐서.”
칼바도스가 냉큼 책을 치웠고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칼바도스는 계속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왜 저래.’
오랜 경험을 토대로 깨달은 게 하나 있는데, 칼바도스는 삐졌을 때 저런 반응을 보인다.
아, 예전에 루카스와 단둘이 소풍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먼저 운을 뗄까 하여 쉬운 주제로 입을 열었다.
“밥 먹었어? 난 에녹이랑 학식 먹었는데 그냥 그렇더라.”
“나는 그냥…… 혼자 검술학부 건물 앞 분수대에서 물 떠먹고, 대련장 근처 나무의 나뭇잎을 뜯어서 모래를 담아 먹었지.”
‘?’
아직 학기 초인데…… 얘가 벌써 실성했나?
굉장히 뭔가를 많이 먹은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는 굶었다는 거다.
“굶었어? 왜?”
“네가 없어서. 난 원래 안 친한 사람들이랑 밥 먹으면 체해.”
칼바도스가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여태 연회에서 보인 자신의 여유로운 모습들을 파기하는 발언이었다.
‘굉장히 복잡한 심정인데.’
그러니까…… 무슨 심정이냐면, 새학기가 되어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친구 말고 새로 사귄 친구와 같이 급식을 먹었는데,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자기 친구 없다며 쫄쫄 굶은 상황을 직면한 심정이다.
어느 정도 상황에 차이가 있었고 칼바도스에게 내가 사과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죄책감이 안 드는 건 아니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칼바도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너랑만 먹을 거야.”
“너 성인 아니야? 우리 동갑인 걸로 아는데.”
내 착각이었나? 동갑내기 친구가 아니라 동생이었나 싶다. 그렇게 마구 약 올리고 싶은 걸 사람들 눈 때문에 겨우 참았다.
“나는 성인이고, 굳이 따지자면 내가 너보다 생일이 훨씬 빠르지.”
비꼬는 걸 알면서도 태연하게 답하는 꼴이 얄미웠지만, 이어진 칼바도스의 말에 얄미움도 잠시였다.
“점심이랑 저녁은 매일 같이 먹는 거다. 빠지게 될 땐 미리 공지하기.”
“나야 상관없긴 한데…… 다른 사람들은 어쩌고?”
“그럼 정치학부 건물이랑 역사학부 건물 사이 벤치에서 만나는 걸로.”
질문에 대한 답을 무시하며 다른 답을 하는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 바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알았어. 아, 나랑 같이 먹으려면 에녹이랑도 같이 먹어야 돼. 상관없지?”
물론 칼바도스가 상관있다고 말해도 에녹을 두고 갈 생각은 없었다.
“걔 버리고 둘이서만 먹자고 하면, 그렇게 해 주나?”
“해 줄 것 같아?”
“기대도 안 했어.”
그렇게 말한 칼바도스가 기분 좋게 웃었다.
*
신의 자녀여, 모습을 드러내 우리를 보호하소서.
당신의 10년으로 천 명의 백성들을 구원하소서.
우리의 영웅이 되어 주소서.
그대의 이름을 널리 떨치소서.
그리한다면 우리는,
당신이 죽음의 신의 손을 잡고, 죽음의 강을 건너는 그날까지
당신을 극진히 대우하리라.
그대의 눈에는 죽어 가는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가!
그대의 귀에는 울부짖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우리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그리한다면 우리는,
당신이 죽음의 신의 손을 잡고, 대지의 여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당신을 극진히 대우하리라.
-일리로멘, 영웅의 회답을 기다리며
‘일리로멘이 시를 읊고,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자, 모습을 드러낸 신의 딸 트리세이아가 창을 들었다. 훌륭한 황금 갑옷을 입은 그녀는 적군을 물리쳤고, 사람들은 그녀를 찬양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와 그녀의 가문은 명예와 부를 얻었다.’
칠판을 가득 채운 것은 하얀 글씨였다. 강의가 끝나고 지워지는 칠판을 바라보던 내가 못마땅한 투로 읊조렸다.
“중간부턴 거의 협박이네.”
우리 다 죽게 생겼으니 네가 희생해서 우리를 구해라, 라는 뜻이었다.
영웅 트리세이아가 명예와 부를 얻었다고?
‘그럼 뭐 해?’
전쟁이 끝나고 1년 뒤, 트리세이아는 사냥 대회에서 잘못 날아온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의 일이었다.
이름을 알린 신의 자녀는 단명한다. 그것이 운명이었다. 독버섯을 먹어서,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강도를 당해서. 극적인 죽음은 아니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죽음은 신의 자녀를 찾아와 그들의 목을 물었다.
불평에 가까운 내 혼잣말을 들은 칼바도스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그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인 내가 턱을 괸 채 물었다.
“도스 네가 신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할래? 전쟁이 났고, 너는 힘을 가졌어.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1년 뒤에는 우연히 꼬리를 밟은 독사한테 물려 죽을 거야. 넌 그래도 전쟁에 나가서 싸울래?”
“당연하지.”
나의 질문을 들은 순간부터 그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까지. 칼바도스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망설임 없는 그의 답에, 질문을 한 내가 우스워져서.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너는 페르데니아를 사랑하니까.
“신의 아들이라…….”
그렇게 읊조린 칼바도스가 무언가를 고민하며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이번에는 그가 내게 물었다.
“70년 전 기록을 끝으로 태양신의 자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엘, 너는 어떻게 생각해?”
“태양신이 여자에게서 눈을 돌렸거나, 생식기능을 잃었거나. 둘 다 아니라면 신의 자녀는 분명 어딘가에서 숨죽인 채 살아가겠지.”
그래. 신의 자녀들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자신에게 겨누어진 운명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가 신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뿐.
“……자리를 옮기자.”
칼바도스가 답지 않게 굳은 얼굴로 말했고, 나는 그의 뜻을 따랐다.
잠시 뒤, 빈 강의실 책상에 나를 앉혀 둔 채 칼바도스가 입을 열었다.
“아주 예전에 외조부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
칼바도스의 외조부라면 헤레이스 남작이다. 한미하기 짝이 없는 남작가의 주인.
“무슨 말씀?”
“헤레이스 가문에 신의 아들이 태어났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어.”
“남작은 딸만 셋인 걸로 아는데…… 혹시 사생아?”
로테 헤레이스. 일레노아 헤레이스, 에밀리 헤레이스. 그리고 사생아. 사생아의 가능성까지 포함해 네 개의 손가락을 펼치자 칼바도스가 내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사생아는 없어.”
“그럼 손자가 있다는 거네?”
남작의 첫째 딸은 실종 후 사망한 채 발견되었고, 둘째 딸인 칼바도스의 어머니 역시 사망했다. 현재 후계자는 남작의 셋째 딸인 에밀리 헤레이스였다.
‘칼바도스는 신이 아닌 황제의 아들이니, 첫째 딸이나 막내딸의 아들이라는 건데.’
“돌아가신 큰이모님께 아들이 하나 있었대. 아들을 낳고 얼마 후에 저택을 떠나셨지. 그리고 외조부께선 그때 큰이모님이 데리고 도망친 아들이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계시고.”
‘첫째 딸인 로테 헤레이스가 왜 가문을 떠났지?’
생각보다 답은 간단했다.
로테 헤레이스가 태양신의 아이를 낳은 것이 맞다면, 자신의 아들이 오래 살기를 바랄까, 단명하길 바랄까?
그녀가 떠난 이유는 그녀의 아들이 오래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작이 그녀의 아들을 찾는 이유는 역시 간단하다.
‘가문 내에서 신의 피를 이은 영웅을 배출하기 위해서겠지. 영웅이 있다면, 그 가문의 위상이 달라지니까.’
칼바도스가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신의 자녀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태어나잖아? 그래서인지 에녹이 수도에 왔을 때, 사라진 외손자일지도 모르니까 만나게 해 달라고 하셨어. 나이가 다르단 걸 듣곤 바로 포기하셨지만.”
“잠깐, 그럼 아직도 찾고 계시는 거야?”
로테 헤레이스가 죽은 건 11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외손자를 찾는다고?
‘하지만 남작이 외손자를 찾는다면 왜 내가 알지 못했지?’
사람을 찾으려면 신문에 광고를 내거나, 포상금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잃어버린 손자를 찾는 것치고는 너무 은밀하게 찾고 있었다.
“11년 동안 열렬하게 외손자를 찾으시는데, 정작 그 손자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라니…… 아.”
내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얼굴로 말을 멈추자, 칼바도스가 드디어 알았냐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신의 자녀는 널리 이름을 알리고 죽었다.
“……설마 손자를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내면, 손자의 이름이 알려져서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적극적으로 손자를 찾지 않는 거고?”
“우습게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모양이야.”
“이름을 알린다는 게 그런 뜻이 아닐 텐데.”
이름을 널리 알린다는 것은, 그만한 업적을 남긴다는 뜻이다.
신의 자녀는 공을 세워 널리 이름을 알린 후에 죽었다.
하지만 남작은 단순히 이름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외손자가 죽을까 염려하여 광고조차 내지 않았다. 신의 아들인 외손자가 공을 세우거나, 별다른 활약 없이 죽으면 아깝다고 생각하면서.
“욕심이 많으신 분이야.”
칼바도스가 은근하게 외할아버지를 욕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신의 아들…… 그 사람의 이름이 뭐야?”
여전히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띤 칼바도스가 어느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남자의 이름을 읊었다.
“단델리온 헤레이스.”
단델리온.
‘단델리온이라…….’
투박하게 시작하여 부드럽게 끝이 나는,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