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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32)화 (32/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32화

수업이 끝나고, 책과 펜을 정리한 칼바도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칼바도스의 곁으로 다가오는 무리가 있었다.

“황태자 전하, 선약이 없으시다면 함께 식사 어떠십니까?”

서글서글한 얼굴을 한 귀족 청년이 칼바도스에게 물었다. 대충 이름을 아는 귀족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칼바도스의 머릿속에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의 얼굴이 스쳤다.

스치려다, 그대로 머릿속에 머물렀다.

엘렌시아와는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았다.

약속을 잡지 않았다면 따로 먹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하지만 연회에선 언제나 둘이 식사를 했는데.’

초청받은 자리에서 서로에게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은 한, 둘은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런 암묵적인 규칙이 하나 있었다.

그 규칙과 함께 오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도 밥 먹으러 가기 전에 나를 떠올렸을까? 너도 고민했을까?

아니면 나만 이렇게 고민하고 너를 생각하나.

조금은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만 고민한 거면 억울하니까.

‘오전엔 검술 수업이 있다고 했다고 했지.’

결국 칼바도스는 식사 요청을 거절한 뒤, 검술학부 학생들이 이용하는 대련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칼바도스는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대련장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엘렌시아와 레이델은 보이지 않았다.

‘검술학부 건물로 가야 하나?’

대련장이 아니라 이론 수업이 있는 검술학부 건물에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칼바도스가 바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검술학부 건물에서도 연이어 허탕을 쳤다.

어디 간 거지? 설마 벌써 간 건가?

‘사람들한테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자애로운 황태자의 미소를 걸친 칼바도스는 분수대 앞에 모여 있는 검술학부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칼바도스를 마주한 일곱 명의 학생들이 고개를 숙였고 칼바도스는 익숙하게 인사를 받았다.

“혹시 리베르트 공녀와 헤르트 경을 봤나?”

“그 두 분이라면 아까 대련장에서 봤습니다.”

“대련장에는 없던데.”

아주 잠시, 칼바도스는 표정 관리하는 것을 잊었다.

황태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자, 학생들은 최대한 공녀와 영웅의 행방을 떠올리려 애썼다.

겨우 무언가를 떠올린 학생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학생 식당에 가신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수업이 끝나고 바로 그쪽으로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바로?

“둘이서만 간 건가?”

검술학부 사람들과 다 같이 가는 거라면 칼바도스가 끼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식사를 하러 갔다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아서 칼바도스는 계속 구차하게 물었다.

“네! 두 분이서 가시는 걸 봤어요!”

“뛰어가시는 걸 봤습니다!”

심지어 뛰어갔댄다.

답해 줄 수 있는 질문이 나오자, 학생들은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쁘다는 듯이 답했다.

그리고 칼바도스는 삐졌다.

하지만 도움을 준 이들 앞에서 기분이 상한 것을 티 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으므로 칼바도스는 오랜 친구가 혐오하는 대외용 미소를 지었다.

“알려 줘서 고맙다. 다들 맛있는 점심 식사를 했으면 좋겠군.”

온화한 미소도 잠시,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리자마자 칼바도스의 표정이 굳었다.

저를 두고 간 친구에게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당연히 앞으로도 계속 함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환경이 달라지니 관계도 자연스럽게 달라지는 건가?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한 사이에서 그렇지 않은 사이로 변한다는 게 싫었다.

‘고작 이런 일로 섭섭하면 내가 미친 걸까.’

음. 미친 게 틀림없었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 섭섭했다. 그래서 칼바도스는 자신이 아주 조금 미쳤다는 결론을 내렸다.

늘 일정하고 안정적이던 칼바도스의 세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초조함과 불안감이 칼바도스의 안에서 싹을 틔웠지만 칼바도스는 알아채지 못했다.

허기를 느끼긴 했지만 그보다 공허함이 더 컸다.

조금 전까진 출출했던 것 같은데, 혼자 식사할 생각을 하니 놀랍게도 입맛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 원래 혼자서도 밥 잘 먹는 사람인데.’

드디어 미쳤구나, 그렇게 읊조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기숙사로 돌아갈 뿐이었다.

그리고 분수대 앞 학생들은 말없이 초라한 황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만 같은 느낌에 학생들은 좀처럼 입을 열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때, 한 학생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화나신 걸까?”

“나는 슬퍼 보이던걸.”

화난 거다, 슬픈 거다. 해석은 그렇게 둘로 나뉘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화가 났고 슬픈 거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황 탓에 모두가 침묵한 그 순간이었다.

“……나는 보고 말았어. 배신의 상처로 얼룩진 전하의 푸른 눈동자를.”

헛된 통찰력을 가진 한 학생의 말이,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고맙다고 말하며 웃는 황태자의 모습은 어딘가 애처로워 보였다. 그들이 아는 부드럽지만 강인한 황태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눈치챈 건지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여학생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제 알겠다.”

“뭘?”

여자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자, 같이 있던 학생들이 머리를 모았다. 그리곤 목소리를 낮추곤 말했다.

“너희들, 황태자 전하께서 에녹 경을 공녀님께 맡긴 거 알고 있지?”

“응.”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황태자는 괴물을 쓰러뜨린 에녹의 공을 치하하며, 그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황태자비로 내정된 리베르트 공녀에게 그를 맡겼다. 제국을 수호한 자니 그에 맞는 훌륭한 대접을 해 달라면서.

물론 공녀와 황태자는 약혼이 사실이 아니라고 오래전부터 정정해 왔지만, 그 이야기는 맛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에녹 경이 공작저에 머무는 동안 황태자 전하를 향한 공녀님의 마음이 변한 거지.”

“에이, 설마?”

“공녀님이 그러실 리 없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9년을 알고 지낸 거면 공녀님 마음도 변할 때가 됐지.”

나름 그럴듯한 이유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에녹 경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 어떻게 보면 에녹 경이 전하의 은혜를 저버리고 공녀님을 가로챈 거잖아?”

“늠름한 얼굴 뒤로 그런 행동을 하셨단 말이야?”

오해를 정정해 줄 사람은 부재했고, 학생들의 망상은 더욱 커져만 갔다.

*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셀레네는 귀를 쫑긋거리며 옆 테이블의 대화를 엿들었다. 물을 가지러 간 율리안이 컵 두 개를 들고 자리로 돌아오자, 셀레네가 율리안에게 속닥였다.

“유리, 그때 그 수석 입학생 기억나?”

“응. 왜?”

바로 전 수업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으니 기억을 못할 리가 없었다.

“방금 옆 테이블에서 말하는 걸 들었는데, 그 사람이 약혼자인 황태자를 버리고 바람이 났대.”

자극적인 소문에 공주가 눈을 반짝였다.

“뭐?”

양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극적인 소문에 율리안이 물을 들이켰다.

‘아까 그 사람이 말한 헛소문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그러고 보니 소문을 믿는 친구가 있다면 아니라고 정정해 달라 했던가?

셀레네는 여전히 옆 테이블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더 자극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공주는 입을 틀어막더니 ‘방금 들었어? 라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런 공주를 본 율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헛소문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같은 검술학부라서 아까 이야기를 나눴거든. 황태자 전하와 오랜 친구라 헛소문이 도는 모양이야.”

“그래?”

타오르기 직전 힘없이 꺼져 버린 소문의 불씨가 아쉬운 것인지, 셀레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원래 자극적인 소문이라는 건, 내가 엮이면 열 받지만 내가 제3자가 되어 들으면 재미있는 것이었다.

율리안은 공녀에게 관심이 있었다. 물론, 셀레네를 향한 이성적인 관심과는 다른 종류의 관심이었다.

관심을 가진 이유는 간단했다.

오빠와 사이좋은 공녀를 보자, 공주와 리오스 왕자님이 떠올랐기 때문에.

그 공녀가 신경이 쓰인 것은, 셀레네와 리오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아니었다면 소문을 정정해 달라는 부탁은 대충 흘려들었을 것이다.

율리안의 세상은 철저하게 셀레네와 리오스 왕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남의 얘기를 관두는 것은 아쉬웠는지 셀레네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리베르트 공녀는 대단한 것 같아. 수석이면 몇 문제를 틀린 거지? 다섯 개보다 적게 틀렸으려나?”

“글쎄. 듣기로는 한두 문제라던데. 셀레네, 너는 도대체 몇 등이야?”

왕국에서 제국에 오기 전까지 통 성적을 공개하지 않은 그녀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셀레네가 머쓱하게 웃었다.

“……나? 난 48등인데. 헤헤…….”

“48등……?”

“응…… 그렇지 않아도 외조모님한테 한 소리 들었어.”

율리안의 눈썹이 휘어졌고, 셀레네는 잔소리가 시작될 것을 직감했다.

“그러니까 소설 좀 그만 읽고, 시험 준비에 신경 쓰라고 했잖아.”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님의 소설이 연극으로 나왔는데 그걸 어떻게 참아. 당연히 다시 한번 읽어 줘야지!”

왜 다시 읽어야 하지……? 한 번 읽었으면 된 거 아닌가?

예상하지 못한 셀레네의 당당함에, 율리안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물들어 갔다.

“설마, 그래서 시험 준비 기간에 왕궁을 빠져나간 거야? 연극을 보려고?”

“응.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몰라!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동생이고, 작가가 언니래! 세상에, 자매가 어쩜 그렇게 재능이 넘치지?”

공부 안 하고 어딜 갔나 했더니 연극을 보러 갔다고 한다.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제국까지 왔는데 우연처럼 만났으면 좋겠다……!”

셀레네는 기도하듯 양손을 포갠 채 외쳤고 율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배우 라티아에게 브로치를 선물하고 그녀의 초상화를 벽면에 걸어두고, 이미 읽은 작가 벨라의 책을 수십 번은 더 읽을 정도로. 셀레네는 배우 라티아와 작가 벨라의 광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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