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31화
시간표에 따르면, 아카데미에서 나의 첫 전공 강의는 레이델과 함께 듣는 검술학 이론 강의였다. 교수가 출석을 불렀고, ‘에녹 헤르트’라는 영웅의 이름이 불리자 정면을 응시하던 학생들이 모두 레이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명인이네.”
“당치도 않습니다.”
레이델이 민망하다는 듯이 짧아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기려 했다. 그 모습에서 레이몬드의 모습이 겹쳐져 나도 모르게 그를 빤히 응시했다.
두 사람은 형제였으나 사람들의 평가는 완전히 반대였다.
동생 레이델, ‘에녹’은 성스러운 영웅으로 제국민에게 사랑받는다. 하지만 형 레이몬드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공작에게 붙었다가, 다시 공작을 배신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간 박쥐 같은 놈이 되었다.
‘레이몬드가 가문의 비리를 고발하고 메릴 가문을 물려받는다 해도 이미지를 회복하기엔 쉽지 않겠지.’
그러니 그가 비리를 고발해도 레이몬드가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말 대신, 가문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와 형들을 배신했다는 말이 들려올 것이다. 그때, 제국민을 지킨 성스러운 영웅 레이델이 정체를 밝히고 형을 지지해야 한다.
레이델 메릴은 죽지 않았다. 그의 형 레이몬드 메릴은 하녀에게 지하실에 불을 지르라 명했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아버지와 형들에게 학대당하던 동생을 도망치게 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유명한 화가에게 괴물을 쓰러뜨리는 레이델의 모습을 그리라고 하자.
시인에게 영웅과 그 형제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은 시를 쓰라 지시하고, 노래로 만들자.
영웅과 형제의 이야기를 연극이나 뮤지컬로 만들어 공연하여, 모든 사람들이 영웅을 동경하고 형제애에 감동하게 만들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레이델이 교재의 여백에 무언가를 적은 뒤, 내 쪽으로 책을 밀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수업에 집중하지 않은 걸 들켰다.
‘무슨 생각을 하냐니.’
방금 했던 생각을 다 옮겨 적다간 잉크가 동나고 말 것이다. 펜을 들어 짧게 답하려다가, 그마저도 귀찮아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너.]
[저요?]
레이델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널 생각한 것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델이 다시 책을 가져가 무언가를 열심히 적었다. 잠시 뒤 내 쪽으로 밀려온 책의 여백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오리엔테이션 내용은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계속, 계속 다른 생각을 하고 계셔 주세요.]
슬프게도 흐름이 깨졌기 때문에 나는 오리엔테이션 내용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내가 수업에 집중하자 레이델은 슬퍼했다. 성적 때문에 벌써부터 견제하는 건가. 역시 경쟁 사회는 치열했다.
*
검술학 이론 수업이 끝난 후, 나와 레이델은 각자 탈의실에서 단출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실습 수업이 있는 대련장으로 향했다.
나와 레이델, 율리안은 2반이었는데, 나와 친분이 있는 귀족들은 거의 1반에 모여 있었다.
2반에는 아는 귀족이 많은 편이었지만 친분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레이델이 있어서 다행이지.’
그가 없었다면 대련장까지 혼자 걸어갔어야 했을 것이다.
혼자 걸어가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겐 레이델이 필요했다.
나와 레이델이 대련장에 들어서자, 1반 학생들이 남기고 간 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우…… 땀 냄새.”
“열기 때문에 실내가 후끈한 것 같습니다.”
땀 냄새에 코를 막으려 했으나, 내 코는 벌써 대련장 내의 공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찝찝하지만 그 덕에 코를 막을 필요가 없어졌다.
잠시 뒤, 대련장에 들어온 아손 교수는 출석번호 순으로 2명씩 짝을 정해 대련하게 했다. 이후에는 짝을 바꾸어 대련하거나, 휴식을 가져도 좋다고 말했다.
땀을 흘리고 싶지 않았기에 빠르게 대련을 마친 나는 휴식을 위해 구석 자리에 주저앉았다. 서늘한 곳에서, 나는 대련장 안을 둘러보았다.
‘레이델은 아직 대련 중인가? 이렇게 오래 걸릴 리가 없는데.’
레이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대련장의 정중앙, 사람들이 가장 몰린 곳에서 레이델과 어느 여학생과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아깐 남학생이랑 대련하고 있지 않았나?’
이제 보니 레이델의 대련 상대가 바뀌어 있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여학생이 손에서 목검을 놓치자 다른 학생이 레이델의 앞에 섰다.
“헤르트 경, 다음은 저와 겨뤄 주세요!”
“그다음은 저요!”
구경꾼이 아니라 줄이었구나.
영웅 에녹과 대련하길 원하는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저게 다 몇 명이야?’
둘, 넷, 여섯, 여덟…….
순박한 레이델은 거절할 수 없을 게 뻔했다. 아무래도 레이델은 이번 시간에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넋을 놓고 레이델의 대련을 구경하던 그때, 누군가가 시야를 가렸다.
‘뭐야.’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익숙하지 않은, 하지만 낯설지도 않은 남자가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또 뵙네요.”
“……율리안 트로이센?”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율리안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생각해 보니 율리안은 내게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이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출석 부를 때 들었거든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내 사과에 율리안이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누군가를 떠올리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엘렌시아 리베르트.”
“그쪽도 제 이름을 아시네요?”
“입학식날 선서할 때, 그리고 방금 출석 부를 때 이름을 들었거든요. 사과가 필요하신가요?”
그는 조금 전 내 말을 따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율리안은 셀레네가 별것도 아닌 일로 그에게 사과하는 것을 싫어했지.’
조금 전 떠올린 이도 분명 셀레네였으리라.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기에 내가 웃으며 답했다.
“아뇨.”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말하며 율리안이 내 옆자리에 앉았고, 우리는 레이델과 다른 학생들의 대련을 구경했다. 레이델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가 레이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붉은 머리의 기사가 괴물을 잡은 영웅입니까? 검술학부에 영웅이 입학했다, 온통 그 이야기뿐이라서요.”
“네. 제국의 자랑이죠.”
이 나라에 큰 애정은 없었으나, 어찌 됐든 나는 페르데니아 제국인이었기에 레이델이 아주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뒤 율리안이 레이델과 나를 번갈아 보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저 영웅분이 자꾸 이쪽을 쳐다보는 것 같은데 제 착각인가요? 혹시 저분이 또 다른 오빠분이십니까?”
“그럴 리가요. 이 세상에 있는 제 오빠는 딱 한 사람뿐입니다.”
다른 세상에도 한 분 있긴 합니다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황태자 전하께선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걔가…… 아니, 전하께서 왜요?”
율리안은 정말 모르겠냐는 듯, 두 번째 손가락과 세 번째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당신과 결혼하면 매일 저런 무시무시한 눈빛을 견뎌 내야 하는 거잖아요.”
“뭐라고요?”
결혼?
제국인의 입에서 그런 헛소리가 나왔다면 바로 아니라고 또박또박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헛소리가 저 멀리 왕국 사람의 입에서 나오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설마 시몬 왕국 사람들까지 나랑 칼바도스가 결혼한다는 헛소문을 믿는 건가?’
셀레네도 소문을 믿는 건 아니겠지?
“이런 빌어먹을…….”
“……예?”
셀레네가 소문을 믿으면 곤란하다.
셀레네라면 결혼할 여자가 있다는 칼바도스를 연애 대상으로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필요 이상의 대화를 나누지도 않겠지.’
그럼 둘 사이에 사랑이 싹틀 틈이 생기기나 할까?
‘도스야! 우리 망했어!’
나는 마음속으로 칼바도스를 부르짖을 뿐이었다.
“그 소문, 어디서 누구한테 들었어요?”
“……입학식 때 앞자리에 앉은 학생분이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율리안의 옆자리엔 틀림없이 셀레네가 있었을 것이다. 셀레네의 옆에서 그녀를 감시하는 것이 율리안의 역할이었으니까.
‘셀레네도 들었을 확률이 아주 높아.’
나는 율리안에게 아주 친절하게, 소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저와 황태자 전하는 그저 친우일 뿐입니다. 제가 황태자 전하와 결혼한다는 건, 전하와 알고 지낸 시간이 길어서 절로 생긴 헛소문이고요.”
“……그렇군요.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 제 실수로 기분이 상하셨을 텐데 사과드리겠습니다.”
“트로이센 공자의 탓은 아니니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알아주시니 기쁘네요.”
“알아 달라고 하신 말씀이니까요.”
순간 그에 대한 내 평가가 손바닥을 뒤집듯이 휙 바뀌었다.
‘율리안…… 이 착한 녀석.’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셀레네를 감시하고,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셀레네에겐 나쁜 놈이 될 예정이지만, 지금의 나한테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앞으로 3년을 봐야 하고 말이다.
나는 최대한 간절한 눈으로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친구분들 중에 소문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꼭 정정해 주셔야 합니다?”
특히 네 친구 셀레네한테. 알았지, 율리안?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인데…… 목소리가 좋아서 그런가, 갑자기 묵직한 신뢰감이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점심시간이 되자, 학생들과의 대련을 끝낸 레이델이 돌아왔다.
그렇게 검을 휘둘러 놓고 땀 한 방울 안 흘리는 걸 보면 괴물 체력이 따로 없었다.
“점심은 어떻게 할까요?”
“글쎄…….”
내가 고민하는 것은 메뉴가 아니라, 같이 식사를 할 사람이었다.
‘칼바도스는…….’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걘 다른 귀족들이랑 먹겠지, 뭐!’
칼바도스와 식사하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 수십은 넘는다. 그러니 내가 그렇듯, 칼바도스 역시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결정을 내린 내가 레이델을 보며 말했다.
“둘이 먹자. 먹고 싶은 거나 가고 싶은 식당 있어?”
“첫날인데 학생 식당은 어떠십니까?”
밥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레이델이 해맑게 웃으며 학생 식당 쪽을 가리켰다.
“그거 좋지.”
그렇게 레이델과 나는 주린 배를 안고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